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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22화 (222/388)

◈ 76. 부탁 하나 하자 (2)

“아, 날씨 좋다.”

날씨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핀의 위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는 키릴 파레이라, 그녀의 기분 역시 좋은 상태였다.

오빠가 돌아왔다. 그것도 일주일이라는 무척 짧은 시간 만에.

물론 루루의 호언장담이 있긴 했기에 5년이나 걸릴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몇 개월은 알칸트라에서 보내야 할 거로 생각했었다.

물론 결계가 만들어진 이유가 오빠의 의지가 아닌 ‘악마의 습격’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뭐 어때? 그 악마, 이미 두 번이나 무찔렀잖아.’

그렇다.

그냥 악마도 아니다. 루루의 말에 따르면 신성왕국의 모든 성기사들이 소집됐을 정도로 대단한 악마라고 한다.

허나 그처럼 강한 녀석을, 오빠는 벌써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 그것도 이번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했다.

키릴이 고개를 돌려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평온한 얼굴로 명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루루, 오빠 멋있지?”

“응! 아이른은 항상 멋있지.”

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지도를 펼쳤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곧 도착이었다.

너른 들판에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집이 육안으로 들어왔다. 그 앞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보였다.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대륙 최강의 검사 중 하나, 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받아들인 제자이자,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주디스.

키릴의 관심을 더 많이 끄는 쪽은 후자 쪽이었는데, 이는 검술관 사람에게서 들은 풋풋하고 달달한 로맨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야 아무것도 몰랐고, 청소년 시절에는 오빠를 구할 생각에 요술 수련만 했었다.

허나 지금의 키릴은 걸릴 것이 없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기에 이성에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 와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엄한 스승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랑을 쟁취한 주디스는 멋있고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고위 귀족 도련님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자기도 그에 못지않은 열렬한 연정을 표할 수 있었던 걸까?

키릴의 머릿속에 핑크빛 생각이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아이른! 죽여 버린다아아아!”

멈칫

그리핀의 위에서 뒹굴거리던 루루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움직여 아이른을, 그리고 키릴을 쳐다보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깜짝 놀라 아래를 쳐다보는 두 남매의 모습이 들어왔다.

루루가 더욱 집중한 쪽은 동생 쪽이었다.

‘……큰일 났다!’

차갑게 굳어진 얼굴.

눈에서 엄청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웠다. 부르르 몸을 떤 루루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키릴…….”

“조용히 해.”

“…….”

그러곤 곧바로 입을 닫았다.

조용히 다가온 고양이를 품에 안은 아이른이 바통을 이어받아 동생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 키릴?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디스는…….”

“괜찮아, 오빠. 나 막 예전처럼 멋대로 굴고, 그런 사람 아니야.”

물론 아이른의 말 역시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차갑게, 날카롭게 자신의 말을 끊으며 천천히 그리핀을 조종하는 키릴 파레이라.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오빠를 욕했는지, 일단 이유는 들어 볼 생각이야.”

“…….”

아이른이 턱을 긁었다.

딱히 변명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저런 애라고 말하기도 모호했고, 그렇다고 자신이 딱히 욕먹을 짓을 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주디스를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고, 그 사이 그리핀은 무사히 지면에 착지했다.

직후 키릴, 루루, 아이른 순으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아이른! 이 개새끼!”

터엉!

굉장히 밝은 미소와 함께 달려드는 주디스를 보며, 셋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야?’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키릴 파레이라였다.

아이른과 루루는 주디스의 성격을 익히 알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몇몇 이야기를 들었다곤 하지만 이처럼 만나자마자 검을 빼 들고 달려들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그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카아앙-!

‘……못 끼어들겠어!’

주디스와 오빠의 검이 충돌하는 순간까지도, 상대를 제지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키릴이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을 쳐다본 게 아니다. 붉은 머리 검사의 눈은 시종일관 오빠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도 무서웠다. 속된 말로 쫄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흘러나온 사납고 무시무시한 투기(鬪氣)를 마주한 순간,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던 요술사는 처음으로 자신이 기 싸움에서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쾅!

콰앙!

콰아아앙-!

키릴이 자신을 무서워하건 말건, 주디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아이른만이 보였다.

황금의 기세를 내뿜고 있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꺾고 싶은 존재만 보였다.

꺾고 싶다.

이기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최선을 다한 녀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싶다!

어마어마한 투쟁심과 승부욕이 붉은 머리 검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불꽃은 녹초가 됐던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강렬한 오러를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행신공을 운용한 주디스가 힘차게 적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놀랍게도, 오늘 보였던 검격 중 가장 만족스러운 한 방이 나왔다.

속도도 빨랐고, 위력도 훌륭한, 그야말로 현재의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수.

까다롭고 엄격한 쿤조차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주디스의 현재 페이스는 나쁘지 않았다.

허나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다.

불처럼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며, 쿤의 제자가 이안의 제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여유로운 그의 눈을 노려봤다.

분했다.

짜증 났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최선을 다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 준다더라도…….

‘녀석의 호흡조차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버렸구나.’

차갑고도 잔인한 현실.

오러 소드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주디스가 비릿하게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내뱉으면 조금 더 편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식도를 타고 다시 흘러 들어가는 핏물이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라고 형편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낭비할 수 없었다.

온전히 품어 내야 했다. 모조리 안고 가야 했다.

지옥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내면의 화.

그것에 깊고 진하게 몰입하던 주디스가, 숨조차 내뱉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파앗-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움직임.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빠르긴 했으나 처음의 돌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발걸음에 현묘한 무언가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신출귀몰했던 예전 주디스의 보법을 생각하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뜰 정도로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

아이른 파레이라는 경시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주디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여자 치고 큰 편인 그녀의 몸이, 정말이지 요술을 부린 것처럼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한 자루의 검.

그녀가 들고 있던 붉디붉은 검만이 크게 확대되어 아이른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쇄도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주디스다운 모습으로.

그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모습으로!

“하압!”

우우우우웅-!

그런 생각이 스친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가 오러 소드를 뽑아 냈다. 그리고 휘둘렀다.

대충 사정 봐준 수준이 아니었다.

근력도, 오러도, 마음의 힘마저도 최대치로 뽑아낸, 그야말로 현재의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한 수!

쩌어어어어어엉-!

황금의 검과 적색의 검이 격돌했다.

직후,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적색의 검이 붉은 선을 그리며 뒤로 튕겨 나갔다. 보이지 않았던 주디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쿠당탕탕,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수십 번 죽어도 모자랄 만큼 여러 번 땅에 부딪히며 날아간 그녀는 끝끝내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안전에 대한 증거는 아니었다.

깜짝 놀란 아이른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런, 너무 심했다!’

난데없이 대련이 시작된 이후, 솔직히 말해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증명의 땅 이후 둘의 격차는 하늘과 땅 만큼 벌어졌다.

주디스가 제아무리 엑스퍼트 최상위의 실력자라 한들, 최고위 성기사인 퀸시 마이어스조차 인정한 아이른을 상대로는 한참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에 비유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그 일격은, 마치 불꽃 같았어.’

그렇다.

아무리 힘없고 왜소한 어린아이가 상대라 할지라도,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연스레 날붙이에 눈이 가며 경계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주디스가 들고 있는 것은 날붙이 수준이 아니었다. 불꽃 그 자체였다.

어찌나 강렬하게 타오르는지,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던. 순간적으로 몸이 굳을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던.

‘아니, 지금 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아이른 파레이라가 억지로 생각을 끊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아른거릴 정도로 놀라웠던 일격이지만, 그것보다 주디스의 상태가 훨씬 중요했다.

표정을 굳힌 그가 빠르게 주디스를 향해 뛰어갔다.

아니, 뛰어가려 했다.

허나 그 앞을 주디스의 스승, 쿤이 막았다.

그가 말했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허약한 녀석을 제자로 뒀을 거 같냐? 멀쩡해. 아니, 멀쩡한 건 아닌가? 뭐, 조금 다치긴 했지만, 저 정도면 침 바르면 나아.”

“…….”

“하지만 진짜로 침만 발라 주면 불쌍하니까, 회복 포션 정도는 발라 줄까. 효과가 꽤 좋아. 뒈지게 아프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

쿤이 웃었다.

진심이었다.

둘의 대련을 보면서 떠올렸다. 주디스의, 주디스만을 위한 수련 방향성을 말이다.

동시에 이거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자신의 유일한 가능성인 쾌검에만 집중하여 이안을 따라잡았듯.

주디스 역시 오늘 발견한 가능성을 극대화한다면.

‘모든 면이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단점을 모조리 뒤덮을 만한 장점 하나만 극한까지 갈고닦을 수 있다면…….’

생각을 마친 쿤이 더욱 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아직 힘 남았지? 검 들어라.”

“……예.”

화아아악-!

대답하게 무섭게, 폭발하듯 솟구치는 기세.

이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대검호를 앞에 두고,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들어 올렸다.

‘오늘 하루, 얻어가는 게 많겠어.’

그의 얼굴에도, 쿤과 마찬가지로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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