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부탁 하나 하자 (1)
아이른 파레이라가 크로노 검술관을 정식으로 졸업하고 하루 뒤, 일행은 쿤과 주디스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나는 됐다. 지금은 별로 그 녀석을 보고 싶지 않군.”
이안은 동행하지 않았다.
그 말에 키릴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검사는 아니지만,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쿤과 이안의 라이벌 구도는 누구나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었으니.
물론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기에, 현재 그리핀에 탄 것은 아이른과 키릴, 그리고 루루가 전부였다.
그리핀의 나름 안정적인 등판 위에서, 아이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은 자연스레, 최근에 익힌 물의 마음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물의 검을 배우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불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이그넷에게서 옮겨붙고, 일리아로부터 자극받고, 그 밖에 수많은 사건과 경험, 인물로부터 지펴진 불길이 자신을 해하고 있었던 탓이다.
허나 이러한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물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한참 소홀했다.
그저 불길을 잡고 싶었고.
물을 얻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물을 베어 내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집착에 빠졌다.
그것이 건강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걸, 암흑 결계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후우…….”
긴 날숨과 함께, 아이른이 심상세계를 떠올렸다.
그러자 또다시 우뚝 솟은 검이 자신을 반겨 주었다. 주변을 아우르고 있는 불꽃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 세기가 예전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의 기운 덕분이었다.
마음의 들판을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아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물을 억지로 끌어와서 불을 잡으려 한 건 잘못된 생각이었어.’
아이른이 재차 암흑 결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도한 집착은 감정을 고이게 했고, 고인 감정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유발했다.
실망감, 자괴감, 피로감을 비롯한 것들이 한데 모여 마음을 썩게 만들었다.
그것이 건강한 노력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여전히 있구나. 내 마음의 고인 감정들.’
갇혀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아이른은 더 넓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커다란 웅덩이에는 물길을 냈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은 웅덩이도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그 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집중을 깨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아이른이 뒤를 돌아보자, 요술소녀로 변한 루루가 입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크롸롸롸롸-
“아악! 으악! 못 해 먹겠어! 너무 짜증 나!”
“…….”
“건드리지 마, 오빠.”
동생의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예민한 상태의 루루였다.
이유야 뻔했다. 자신에게서 빌려 간 오행 목걸이를 분석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루루는 내가 결계에서 빨리 나온 게, 저 목걸이 덕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했지.’
정령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기준, 오행.
허나 그것들도 처음엔 하나였다고 한다.
다섯 기운은 물론이고, 세상 만물 모든 것을 품고 있던 위대한 원(混元, Universe).
‘그 안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도 있다고 들었어. 고르하가 말해 줬어! 그러니까 이 목걸이를 뛰어난 요술사의 직감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다 보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거야!’
가슴을 쭉 편 채 당당하게 말했던 루루의 모습이 생각난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신경이 곤두선 루루를 보며, 아이른은 키릴에게 조용히 물었다.
“네가 한소리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배려해 주네?”
“……오빠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설마 다른 요술사가 연구하는 것도 이해 못 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어, 아니…….”
“그렇지? 아니지? 그러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성의 표시라도 해 봐.”
“…….”
아이른이 조용해졌다.
자신의 말실수가 분명했기에 변명할 게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고민해 봐도 될까?”
“당연히 되지. 더 고민한 만큼 내 마음에 쏙 드는 말이 나오겠지?”
“…….”
동생을 쳐다보던 아이른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핀은 주인의 명을 따라 열심히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 * *
털썩!
“후우, 후우.”
한여름인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두르던 주디스가 털썩 들판에 누웠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더는 무리였다.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
한줄기 불어오는 바람이 열이 오른 그녀의 몸을 식혀 줬다.
평범한 스승이 봤다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볼 법한 광경.
허나 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애송이 녀석! 그 정도로 지치다니, 네 안에는 검에 대한 열정과 숙적에 대한 승부욕, 세계 최고를 향한 들끓는 의지가 없단 말이냐!”
“…….”
“이 나를 봐라! 나이가 100세에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너보다 뜨겁다. 어이, 패배자! 수련이란 이런 것이다. 힘들어 뒤질지언정 지쳐 쓰러지지 않는 근성! 라이벌보다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러야겠다는 독기! 그것이야말로 쿤의 제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란 말이다! 핫! 흐앗! 핫!”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는 쿤.
주디스는 어이가 없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는 몰랐다. 이렇게 유치하고 가벼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누구보다도 위에 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삶 자체가 고통이더라도 기꺼이 그를 감내하며 나아갈 줄 아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압! 죽어라! 이안, 죽어라! 개자식! 대머리 놈! 나보다 키도 작은 게! 죽어!”
후웅!
후우웅-!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쿤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평생 한 번의 승리를 위해 검을 수련해 온 사내가 이안에 대한 분노와 승부욕을 터뜨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 불꽃 같은 성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과 꽤 닮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었다.
뭐라도 딴지를 걸고 싶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주디스가 자신의 사부에게 말했다.
“그렇게 유치하게 남 까고, 욕하고, 그러는 게 수련에 도움이 됩니까?”
“물론, 되고말고! 후웁, 훅!”
휘휘휘휘휙-!
훅훅훅훅훅-!
비꼬는 말에 시원하게 대답한 쿤이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눈부신 검술. 엑스퍼트 최상위에 오른 그녀의 눈조차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주디스는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놀라운 검술을 펼쳐 내며,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자식아, 후웁, 후웁, 우리 같은, 훅, 성격이 지랄 맞은, 사람들은, 후웁, 이렇게 성질나고 짜증 내고…… 으랴압! 핫! 그래야 더 힘이 나서, 후우, 아니, 없던 힘도 생겨서, 어? 재능 있는 새끼들 발끝이라도, 하압! 으챠앗! 따라갈 수 있는, 후웁, 거라고!”
“…….”
스승의 말을 들은 주디스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쿤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자기들은 별수 없다고.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들이 재능 있는 놈들 쫓아가려면 밥 먹고 일 보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노력해야 한다고.
마음의 여유?
효율 좋은 수련을 위한 휴식?
그는 그런 말 따위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검을 내지를 수 있을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수련을 이어 갈 수 있을지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라이벌 이안에 대한 욕설을 늘어놓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녀석에 대한 분노와 시기, 질투심을 억지로 끌어올려서라도 자신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관주님한테 대머리가 뭐야, 대머리가.’
주디스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허나 그런 것과 달리, 몸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유치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주디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쿤의 방식이 자기에게도 나름 들어맞는 편이라는 사실을.
“쯧.”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 여러 인물을 떠올렸다.
어떤 새끼가 가장 자신을 빡치게 만들까?
어떤 녀석이 자신의 가슴에 있는 불꽃을 더 크게, 더 세게, 더 오래 타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앞에, 아이른 파레이라의 이미지가 자리잡혔다.
“아이른, 이 개새끼!”
후웅!
콰아아아앙-!
타라칸에게서 선물 받은 적검이 강하게 휘둘러졌다. 강타당한 나무 한 그루가 터지듯 부서져 나갔다.
그런데도 주디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거칠게 날뛰며 자신의 검술을 뽐내기 시작했다.
아이른에 대한 욕설 역시 끊기지 않고 흘러나왔다.
‘재수 없는 새끼!’
녀석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맙다. 친구로서, 그를 누구보다 좋아한다. 5년 동안 동고동락한 검술관 동기들보다도 더.
그의 착하고 순한, 바보처럼 남을 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그런 기분이 들 터였다.
후우웅-!
후웅!
하지만 그러한 감정과 별개로, 주디스는 그가 정말정말 짜증 났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엄청난 잠재력.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빛나는 재능.
자신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으면서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도망가버린 상대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가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쾅쾅쾅쾅쾅!
“흠, 좋구만. 누구를 떠올렸지? 아이른인가?”
이를 지켜보던 쿤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안이 봤다면 너무 과하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테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저런 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부류를 위로 올려놓는 원동력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부정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이 진실이었다.
주디스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그녀가 대답했다.
“네. 허억, 후우, 그 개새끼, 후우, 맞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아이른을 부를 때는 개새끼라고 부르도록!”
“네!”
“좋아, 아이른은 뭐라고?”
“개새끼!”
“아이른은 뭐라고?”
“개자식!”
“개새끼는 뭐라고?”
“아이른! 죽여 버린다아아아!”
주디스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하늘 높이 날아다니던 새들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우렁찼다. 쿤이 고개를 젖히고 껄껄껄 웃었다.
그런 그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그리핀이었다.
“…….”
현실에 있을 리 없는 환상의 동물이 빠르게 떨어져 내리다, 지면에 닿을 시점부터 속력을 조절했다.
이윽고 사뿐히 착륙한 그리핀의 등에서 두 인물과 고양이 하나가 뛰어내렸다.
루루.
키릴 파레이라.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쿤이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주디스는 아니었다.
익숙하고 반가운.
허나 누구보다 패주고 싶은 면상을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아이른! 이 개새끼!”
터엉!
강하게 발을 구른 주디스가, 젊은 소드마스터를 향해 사납게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