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베어야 할 것은 (3)
“……!”
너, 나를 속였구나?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해진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고, 광대 악마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실수였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원래 이런 인내심 싸움에선 급한 쪽이 먼저 나서는 법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터뜨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어째서일까?
예로부터 이런 내기는 악마의 전문분야였다.
기껏해야 100년 남짓한 수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 달리, 악마는 수천 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에 등장한 가장 어린 마족조차 인간의 몇 배는 긴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10년, 20년 정도의 기다림은 식사 전의 설렘과도 같은 것.
하지만, 광대 악마는 그렇듯 마냥 즐거운 기분으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천 년 전의 기억.
수십 년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과실을 따 먹지 못했던.
고통과 분노, 괴로움과 의심 속에서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던.
그리하여 결국엔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존재, 카렌 윈커로 인한 상처가 그의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젠장!”
자신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를 지켜보던 광대 악마가 빠르게 쇄도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콰아아아앙!
두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단한 힘!
하지만 허사였다. 신성하진 않지만, 절대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진 내기 장소다.
세 치 혀로 상대를 현혹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방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광대는 멈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발길질로 계속해서 아이른을 두드렸다.
그의 집중력을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번쩍하고 눈을 뜬 아이른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스윽-
쩌적
“……!”
별것 아닌 검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광대는 알 수 있었다.
오러 소드조차 둘리지 않은 저 검이, 저 녀석의 힘이.
암흑으로 가득 드리워진 결계에 균열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걱, 석, 서걱-
아이른의 검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는 듯.
가볍고 맑은 표정으로 연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그를 보며 광대가 대노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악마의 욕설이 결계 전체를 진동시켰다.
물론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에게 있어서, 악마의 외침은 하등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끅, 어극, 그그그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광대는 더 화를 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물을 베는 검.
아니, 집착을 베는 검을 깨달은 아이른은 내기의 승자였고, 패자는 대가를 지급해야만 했다.
악마는 괴로운 표정과 함께 폭발하였고, 악취 나는 살덩이와 뼛조각을 남기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역겨운 잔해물들이 물에 녹아들어 더욱 끔찍한 풍경을 만들었다.
아이른은 그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이제 알겠어.’
물의 검을 가르치는 이안 관주를 보며,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아이른이었다.
첫날의 대단했던 검과, 그 이후에 보여 줬던 보잘것없는 검격이 사실은 똑같은 것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심지어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알쏭달쏭한 선문답만을 이어 가는 스승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리라.
허나 이제 알겠다.
곧바로 답을 말해 줘 봤자,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정말로 베어야 할 것은 집착이라고 말해 줘 봤자 머리로만 이해할 뿐, 진정으로 공감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견디며, 검을 휘두르며, 아이른은 또 다른 아픔을 느꼈다.
불처럼 격렬한 감정만이 자신을 망치는 게 아니라, 물처럼 먹먹하게 쌓이는 감정 역시 자신을 해한다는 것을 말이다.
‘더는 그러지 말자.’
쩌적, 쩌저저적……
균열이 더욱 심해졌다. 무겁게 고여 있던, 흐르지 못해 악취가 진동했던 호숫물이 결계의 틈을 타고 새어나가다가, 이내 콸콸콸 흘러나갔다.
과도한 집착이 가로막아 쌓여만 가던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자연스레 흐르기 시작했다.
움켜쥐려는 노력이 아닌, 내려놓으려는 노력.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아이른의 몸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웅……
아니, 정확히는 아이른이 착용하고 있던 오행 목걸이에서 기인한 변화였다.
전생의 세월을 통해 완성된 강철의 기운을 품고, 현생의 모험을 통해 피운 불꽃의 기세를 뿜어낸다.
물의 기운은 이를 강제로 억누르려 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화롭고 도도하게 흘렀다.
금(金), 화(火), 수(水)의 기운만이 아니었다.
다섯 정령의 나머지 둘.
금속처럼 단단한, 허나 보다 포용력 있고 안정적인 땅(土)의 기운이 조금씩 자라났다.
직관적으로 느낄 정도는 아니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는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나무(木)의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새싹에 지나지 않았지만, 건강한 뿌리를 통해 언제고 굳센 줄기로 돋아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물과 열기, 병든 가지를 쳐 내기 위한 강철의 기운이 이를 보조했다.
그렇게 미약하게나마 다섯 정령(五行)이 완성되자,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다섯 개의 기운이 회전하고 섞이며, 음과 양이 되었다.
음과 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쫓자 하나의 원이 되었다.
고대의 악마들조차 태어나기 전인, 우주 만물의 근원(The Great Ultimate)이 되는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알지 못했다.
이제 겨우 다섯 정령 중 세 번째에 멈춰 있는 그로서는 지금의 깨달음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후웅
후우웅
후우웅-!
그는 깨어져 나가는 암흑 결계 속에서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풍경의 변화도 잊은 채.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빠지는 부분 없이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하나씩 점검해 나갔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기나긴 어둠이 지나고 따스한 햇볕이 그의 황금색 머리에 내려앉을 즈음이었다.
“…….”
평소와 같은 풍경.
에메랄드빛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묘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가 출현했는데 낚시꾼들이 멀쩡히 낚시를 즐기고 있었을 리 없었다.
괜찮을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을까?
아이른의 선한 마음씨가 세상에 퍼지는 순간이었다.
“오빠!”
“아이른!”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이른이 고개를 들었다. 사자도, 새도 아닌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키릴의 그리핀이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가지 걱정 때문이었다.
‘혹시, 또다시 엄청 시간이 지난 건…….’
아이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예전 요술 결계 때만 해도 무려 5년의 세월이 흘렀었다.
결과적으로는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공백 때문에 주변인들이 느꼈을 기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느낌이었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는 사이, 거대한 그리핀이 그의 앞에 착륙했다. 위엄 있는 몸뚱이와 달리 얼굴은 꽤 귀여웠다.
독수리라기보다는 앵무새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키릴의 취향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핀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셋.
키릴 파레이라, 루루, 이안 관주의 얼굴이 전과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이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완전히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른다. 1년, 어쩌면 2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
‘만약 그렇게 되면…… 난 죽었다.’
일리아 린제이와의 약속을 떠올린 아이른이 긴장한 표정을 지은 뒤,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키릴.”
“오빠, 괜찮아? 악마야? 진짜 악마가 나타난 거야?”
“응, 괜찮아. 오히려 좋아. 악마는…… 맞아.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그런데 혹시…….”
결계가 생긴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을까?
아이른이 조심스레 질문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길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눈을 서너 번 깜빡일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
허나 그 순간이, 아이른은 마치 몇 시간에 달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물론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로 딱 일주일 됐어.”
“내가 말했지, 키릴? 이번에는 얼마 안 걸릴 거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그럼 저번에는 5년이나 걸릴 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아, 아니, 그런 뜻은…….”
고리눈을 뜨는 키릴과, 그런 그녀의 시선에 빠르게 자신의 뒤로 숨는 루루.
그런 그를 보며 아이른이 진정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데, 지금껏 말을 아끼고 있던 이안 관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물었다.
“물의 검은, 깨달았나?”
“…….”
아이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슈욱, 황금의 대검을 소환한 그가 저벅저벅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 관주의 시선이, 투닥대던 키릴과 루루의 시선이 이를 쫓았다.
휙
철퍽
그런 그들에게 아이른이 보여 준 건 별것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물살이 튀었을 뿐.
허나 뒤돌아서는 아이른의 표정은 더없이 개운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가슴이 시원해진 느낌은 듭니다.”
제자의 대답을 들은 스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광대 악마와의 일을 모두에게 털어놓은 뒤.
관주와 독대한 아이른이 증명패를 건네받았다.
정식 수련생을 뜻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졸업패.
크로노 검술관의 품을 떠나, 어엿한 한 명의 검사가 된 아이른 파레이라가 관주에게 말했다.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졸업패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허허, 네가 졸업을 못 하고 있으면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하지만…….”
“그만. 어차피 졸업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니 크게 의미 두지 마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관주가 재차 말을 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졸업자가 되었다는 뜻은, 관주인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검에 관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나와 동급인 쿤, 그 녀석과 대면할 자격도 차고 넘친다는 뜻이지.
말을 마친 이안이 호로록 차를 마셨다.
마주 앉아 찻잔을 들어올린 아이른이 조용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쿤의 행방을 찾아서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였구나.’
이상했다.
분명 일주일 전의 자신은 무엇보다 쿤과의 만남을 원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인정을 받아 토벌대에 합류하는 것.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쿤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안 관주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검사를 만날 기회다.
집착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흘러가는 물의 마음을 깨달아가는 아이른이었으나, 이런 만남을 거절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균형을 찾은 마음속의 불꽃이 은은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주디스를 보고 싶었다.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맑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