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주디스의 선택 (2)
“……!”
주디스의 돌발행동에, 브랫 로이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갑자기 멱살을 잡힌 것도 그렇지만, 자신과 그녀의 입술이 맞닿아 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꽤 세게 부딪혀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짧은 시간, 브랫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자신이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기다릴 거라고.
2년, 어쩌면 더 오랜 시간 너를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야 문제 될 거 없다고. 5년 동안 못 보고 지낸 아이른 파레이라와도 절친한 사이가 됐는데, 고작 그 정도 시간에 달라질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고.
물론 지금 상황에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주디스의 입술이 자신에게서 떨어졌음에도 말이다.
브랫은 멍한 표정으로 주디스를 쳐다봤다.
볼이 붉었다.
볼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붉었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겨우 이 정도 마셨다고 저렇게 될 거였으면, 애초에 마시게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머리카락보다 빨간데, 이거로 놀리면 분위기가 깨지려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냥 닥치고 있기로 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임에도 어쩔 줄 모르던 주디스가, 뒤늦게 생각을 정리하고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너!”
“응.”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거에 알았다고만 대답해. 알았어?”
“그러지.”
“알았다고 해.”
“알았어.”
‘그러지’나 ‘알았어’나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브랫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 주디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1년에 한 번…… 아니, 1년에 두 번! 나 만나러 와. 멀어도 와. 왔다 갔다 하는 데 시간 오래 걸려도 무조건 와. 알았어?”
“알았어.”
브랫이 대답했다.
“와서 대련 말고는 딱히 할 건 없을 거야. 나가서 놀고, 술 마시고, 뭐 구경하고…… 이런 거 꿈도 꾸지 마. 그냥 검술관에서 데이트하는 거라고 생각해. 알았어?”
“알았어.”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가문에서도 열심히 수련해. 올 때마다 네 실력이 안 늘어 있으면, 내가 스승님한테 할 말이 없어져. 너랑 사, 사, 사귀는, 어? 아무튼, 그게 내 검술 수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라고. 적어도…….”
“…….”
“그 정도는 되어야, 내가 스승님한테 비벼 볼 구석이 있으니까. 알았어?”
“…….”
“뭐, 뭐야? 왜 대답 안 해?”
주디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브랫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내뱉은 말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었으니까.
싸가지 조금 없는 것 빼면 모자란 거 하나 없는 저 녀석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편의를 봐줄 이유는 없었다.
주디스의 심장박동이 드럼처럼 빨라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할 일이 벌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브랫이 두 손으로 주디스의 볼을 잡았다. 붕어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이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그의 눈에는 아니었다.
살짝 미소 지은 브랫이 주디스가 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
처음보다 조금.
아니, 많이 긴 시간이 지나고 둘의 거리가 벌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터질 듯 붉어진 주디스의 얼굴을 보며, 브랫 로이드가 늦은 대답을 건넸다.
“알았어.”
* * *
“…….”
“와아, 멋있어! 브랫!”
동기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른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루루는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이리저리 빠르게 날아다녔다.
입에서는 연신 브랫과 주디스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나 오래 그러지는 못했다.
눈빛을 보내 루루를 진정시킨 키릴 파레이라가 오빠의 친구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정말로 쿤이, 그 쿤이 허락해 줬어요?”
“어? 아아…….”
그가 살짝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주디스 말고는 대부분 남자들밖에 없는 검술관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또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다 보니, 연애 이야기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키릴은 자극이 강했다.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소개시켜 줄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최대한 좋은 인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의 동기가 최대한 친절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물론 키릴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졌건 아랑곳하지 않고 내용에만 집중했다.
치즈처럼 이야기가 질질 늘어나긴 했지만, 결국 핵심은 이거였다.
주디스와 브랫은 쿤의 허락을 받아 냈고, 수련 중에도 교제 관계를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여기까지 파악한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뭐 느끼는 거 없어?”
“어? 무슨?”
“아이른! 혹시 너도 무슨 일 있었어?”
“뭐야, 여행 다니면서 연인이라도 생긴 거야? 혹시…….”
“아, 아니! 무슨! 그런 일 없어. 아무 일도 없었어.”
“뭐?”
“어?”
“아무 일도 없어?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뭐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계속해서 따지고 드는 동생을 보며, 아이른이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정말이었다. 여정 내내 수련만 한 자신에게 연애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쿠바르와 루루, 주디스, 브랫, 일리아 정도가 전부였…….
‘……일리아?’
우뚝, 아이른의 생각이 더 이어지지 않고 멈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을 뿐인데, 일리아 차례에서 덜컥 마음이 멈췄다. 물론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헌데 그 찰나의 순간을 키릴이 놓치지 않았다.
“누구 생각했어?”
“어?”
“지금 말이야. 누구 생각한 사람 있었잖아. 빨리 말해.”
“아니, 그냥 여러 명 생각했는데.”
“그래? 여러 명 누구?”
“아니, 왜 갑자기 다들 나한테…….”
아이른이 주변을 돌아봤다.
뭔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기들과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의 동생, 그리고 볼 재미는 다 봤다는 듯 초연한 눈빛으로 그루밍에 힘쓰고 있는 루루.
헌데,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들의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
크로노의 주인, 이안의 미소를 본 아이른이 깜짝 놀라 외쳤다.
“관주님!”
“헉? 관주님?”
“언제 오셨…….”
“허허, 방금 왔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조용히 듣고 있었지. 그런데…….”
“…….”
“아무래도 답답해서 안 되겠다. 백날 천날 물어봐야 내 입만 아프겠어. 쯧쯧…….”
답답하구나, 답답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이안을 보며 키릴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루는 여전히 그루밍에 집중했다.
동기들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어디론가 사라졌다.
최근 예전만큼 수련에 열중하지 않는 둘이었기에, 관주와 계속 같이 있다가는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관주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제자야. 오랜만이로구나.”
이안이 근 2년 만에 만나는 아이른을 바라봤다.
정중하게 숙인 고개가 올라오고, 시선이 마주친다.
그러자 그 안에 타오르고 있는 뜨거운 불꽃이 엿보인다.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달라졌구나. 많이.’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허나 그러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린 그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제자의 검은 따로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아이른이 물었다.
예전에 검술관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주는 자신에게 검의 대화를 먼저 청했으니까.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가 푸슬푸슬 웃으며 말했다.
“검이 선 것을 이미 봤는데, 또 볼 필요는 없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그 얘기나 하자꾸나.”
* * *
오랜만에 들른 관주의 방은 예전과 같았다.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가구를 제외하면 별다를 게 없는, 대륙 최고의 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소탈함.
꾸미는 걸 좋아하는 키릴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공허한 느낌도 들었다.
물론 아이른과 루루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관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깊은 눈으로 제자를 주시했고, 시선을 받은 아이른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천천히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그는 분명 예전보다 빠른 템포로 자신의 속내를 쏟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뿜어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아이른은 불을 뿜어내듯, 라바트에서 알칸트라까지 오는 내내 자신이 품었던 고민들을 스승께 털어놓았다.
“…….”
모든 것을 들었음에도, 이안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아이른이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언을 위한 말을 고르는 것일까?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왠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확한 근거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감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른은 초조함을 느꼈고, 그가 초조한 것을 지켜보는 루루와 키릴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짐을 느꼈다.
관주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완전히 식어 버린 차를 호로록 마신 그가 입을 열었다.
“문제없다.”
“……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꽃이 널 잠식할까 두렵다고 했나?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실제로 과한 경쟁심이 자괴감으로 변하고, 열등감으로 화하고…… 그걸 견디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이 부지기수다. 우리 검술관에서도 양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지.”
“…….”
“하지만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으냐. 그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호로록, 남은 찻물을 전부 마셔 버린 이안이 말을 이어 갔다.
“위험한 것으로 치면 오히려 예전의 네가 더 심했지. 꿈도, 희망도, 열의도 없는…… 비어 버린 쇠그릇 같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가던 어린 날에 비해, 지금의 너는 굉장히 훌륭하다. 고생했고, 잘했어. 이 스승은 칭찬을 건네고 싶구나.”
“…….”
“……하지만 이것은 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겠지, 결코.”
관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도 더 깊은 고민이,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모양새.
이를 보는 아이른의 마음도 덩달아 불편해졌다.
하지만…….
‘관주님의 칭찬 한마디에 그냥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이른이 눈을 빛냈다.
처음 이그넷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슈아 린제이에게 추가 지도를 부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뜨겁기 그지없는 시선.
그것이 이안 관주에게 꽂혔다.
물의 검을 원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다소 아이러니한 광경이었으나, 아이른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비로소 눈을 뜬 이안이, 키릴 파레이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릴이라고 했나?”
“네, 네.”
키릴이 말을 더듬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항상 자신감 넘쳤던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이 할아버지 앞에선 행동과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첫 만남에선 발랄하게 행동했던 루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관주는 어딘가 낯선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고민에 갇혀 있는 아이른조차 어렴풋이 이를 느꼈다.
이안은 그 모든 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듣기로는 뛰어난 요술사라고 들었네. 전설의 동물인 그리핀도 소환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럼 혹시, 우리가 함께 그걸 타고 어디론가 이동할 수도 있나? 그리 멀진 않다만, 걷기에는 어중간한 거리여서 말이야.”
“물론이죠.”
“좋아. 바로 이동하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건물을 벗어났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그에 적응하지도 못한 채, 아이른 일행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커진 그리핀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와!”
“우오오…….”
검술관 수련생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릴은 이안이 말하는 쪽으로 그리핀을 조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밖의 호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착륙했다.
폴짝 뛰어내린 이안이 아이른을 보며 말했다.
“물의 마음을 깨닫고, 물의 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려운 문제지. 나도 이를 어찌 말로 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여기까지 왔지. 아이른, 보고 배울 준비가 됐나?”
“……됐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휘적휘적 걸어간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검을 뽑아 호수를 향해 휘둘렀다.
휙-
철퍽!
키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자자한 대륙 3강의 검이라기엔 너무 형편없었다.
검술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눈에 제대로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실망감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철퍽 소리를 내며 호수에 꽂히는 검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서걱-!
천 조각이 깊게 베어지는 소리.
그와 함께, 물이 베어졌다.
단순히 강한 위력으로 인해 옆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얼음이 갈라진 듯 완전히 두 동강이 나 버린 호수.
커다란 소리도, 압도적인 풍경의 변화도 없이.
마치 그림을 쪼갠 것 같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 서 있던 이안이 아이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조금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뭘 베었는지는 봤고?”
“물을…….”
“그래?”
그가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 사이, 시간이 멈춘 듯 쪼개져 있던 호숫물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철썩-
키릴도, 루루도, 아이른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바다처럼 파도치는 물결을 뒤로한 채 빙긋 웃은 관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 더 노력해야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