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14화 (214/388)

◈ 73. 주디스의 선택 (1)

당장 검술관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관주님을 만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던 아이른 파레이라다.

미안한 말이지만 주디스는 후순위였다.

하나 계속해서 쏟아지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달랐다.

쿤의 제자라니?

이안을 꺾기 위해 아이도 낳지 않고, 아내와도 반쯤 별거하며 수련을 이어 가던 그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제자가 되었다는 말은, 주디스 역시 동의했다는 말 아닌가.

‘굳이 크로노 검술관을 나와서, 아니 나온 건 아니지만…… 하여튼 쿤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더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없던 사이 무슨 특별한 사건이라도 벌어졌던 것인지.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잔뜩 흥분한 동기들의 관심은, 오히려 그 부분보다는 주디스와 브랫 사이의 로맨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빨리! 빨리 말하라고!”

“아, 답답해! 그냥 좀 말하면 안 돼? 우리 진짜 깜짝 놀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맨날 처 싸우던 둘이 그런…… 하! 분명 그 전부터 조짐이 있었을 텐데. 아이른, 너 분명 아는 거 있을 거잖아. 어?”

“어어…….”

있기는 하다.

아이른이 두르칼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브랫의 용감한 고백과 적극적인 행동, 그것을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여지는 남겨 두는 태도를 보였던 주디스.

이후 둘이서만 검술관으로 복귀했으니, 그사이에 또 뭔가가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그가 천천히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풀어갔다.

남의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이미 검술관 모두가 둘의 관계를 아는 모양이었기에 이내 떨쳐 냈다.

‘아니, 오히려 나만 모르는 거 같은데? 그 뒤에 어떻게 된 거야?’

초롱초롱 빛나는 동기들의 눈을 보며.

왠지 모르게 덩달아 눈을 빛내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아이른의 마음속에도 둘에 대한 흥미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전처럼 브랫이 적당히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주디스는 적당히 인상 쓰고…… 이 정도 모습만 보여 준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더 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동기들에게 물었다.

“나는 아는 거 다 말해 줬으니까, 이젠 너희들 차례야.”

“우리?”

“둘 도착하고 무슨 일 있었어? 쿤도 그렇고, 둘 사이도 그렇고. 나도 궁금하니까 말해 줘, 빨리.”

“오…….”

“오오…….”

그의 말을 들은 동기들이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머리에 물음표가 뜬 아이른이 재차 물었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니.”

“우리는…….”

동기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확인하듯이.

그 반응에 아이른이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이런 쪽에는 별 관심 없는 줄 알았어서.”

“어?”

“그렇잖아. 우리도 뭐 백날 천날 검만 휘두르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너는 특히 검밖에 모르는 느낌이 강한데…….”

“남의 연애 얘기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까, 조금 신기하긴 하네.”

“하긴, 네가 우리보다 나이도 많았지. 이제는 관심 가질 때도 됐긴 하네.”

“…….”

아이른이 주변을 돌아봤다.

동기들이야 그렇다 치고, 동생과 루루마저 그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변명해 봐야 본전도 못 찾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을 재촉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 건데?”

“으음. 그러니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 * *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이 검술관에 도착하기 전.

아무도 없는 밤의 공터에서, 주디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이어 가고 있었다.

쿤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갑작스럽기는 했다.

소문만 많이 들었을 뿐, 주디스는 그와 일면식도 없던 관계였으니까. 대륙 최고의 스승인 이안을 두고 굳이 그의 밑에 들어가야 하나, 하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았다.

하지만…….

‘그 눈빛.’

주디스가 쿤이 보였던 눈빛을 떠올렸다.

그에게서 나온 목소리를 떠올렸고, 데일 듯 뜨거웠던 분위기를, 그 모든 것에 자극받아 전신에 소름이 돋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와 똑같았다.

자신의 미래가 바뀐 날.

빈민가에서 쓰레기처럼 살던 자신을 난생처음 보는 검사가 거둬 갔을 때, 그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충격이 자신을 덮쳤다고 느낀 순간. 주디스는 마음을 정했다.

자신은 여전히 크로노의 검사지만.

동시에 쿤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정했다.

그렇다면 지금 주디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크로노 검술관의 인연들이었다.

누구와도 좋은 관계로 엮이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그녀에겐 좋은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자신을 크로노로 데려온, 매일 같이 고마움을 표현해도 모자랄 존경하는 파시스 선배님.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은 이안 관주님, 누구보다 엄하지만 누구보다 자상한 케이라 핀 부관주님.

수많은 가르침을 선사한 다른 선배님들과, 항상 두드려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덤벼 오는 근성 좋은 동기들.

개같이 열 받지만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순박한 녀석, 아이른 파레이라.

첫인상은 완전 별로였지만, 어느새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친해진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브랫 로이드.”

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린 주디스가, 울적한 표정으로 바닥의 돌을 툭 걷어찼다.

그렇다. 사실 앞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다. 아니, 아무래도 좋다까지는 아니지만…… 참을 수 있다.

2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은 자기만 아는 나쁜 사람이니까.

하지만 브랫 로이드는 아니었다.

“하.”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녀석은 자신이 싫어하는 모습을 다 가지고 있었다.

누구보다 풍족한 재력.

누구보다 훌륭한 가문.

또래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재능과 자신의 잘난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까지.

‘외모도 내 취향은 아니야. 그 자식, 좀 느끼하게 생겼어.’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런 그를 좋아한다.

누가 고백했고, 누가 더 표현했느냐는 상관없다. 주디스는 브랫을 보고 싶었다.

브랫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의 스승이 될, 아니 스승인 쿤을 떠올린 주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2년은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 말라고 했지.’

빈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안이라는 큰 산을 넘기 위해 아내도, 인생도, 검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사내다.

그런 그가 제자를 허투루 가르칠 리 없었다. 사실 왜 제자를 받았는지조차 모르겠다.

그가 보여 줬던 진심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

결국, 브랫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검술관을 떠나기 전의 며칠이 전부일 터였다.

‘그래도 데이트 한 번은 하고 가네.’

주디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소보다 더 태연한 얼굴로.

하지만 자신만은 알 수 있는 씁쓸함을 담은 모습으로, 브랫 녀석이 말했다.

내일 데이트하자고. 거절은 거절한다고.

검술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붙어 다녔지만, 이처럼 정식으로 데이트 제안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마음이 설렜다.

아니, 꽤 많이 설렜다.

그래서 더 우울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끄럽다는 생각에, 민망하다는 생각에 제대로 된 표현조차 한 적 없는데.

……심지어 내일조차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주디스를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파박.

“……잠이나 자자.”

애꿎은 땅바닥을 걷어찬 주디스가 방으로 돌아갔다.

검을 수련하지 않은 것도, 일찍 침대에 눕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 * *

“……넌 이런 게 좋냐?”

“어. 엄청 좋은데? 날씨도 좋은데 밖에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낫지. 답답하게 안에서 연극 보고 그런 거, 누나 취향 아니다.”

“날씨가 좋기는, 춥구만.”

평소와 똑같이 툴툴대는 브랫과, 예전과 마찬가지로 까칠한 주디스.

하지만 달랐다.

처음 크로노 검술관을 떠났을 때와 달리, 둘은 꼭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알칸트라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차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검술 스타일부터 사소한 취향까지 너무나도 다른 둘이기에, 수행 초기에는 그것 때문에 다툼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로만 그럴 뿐, 진심으로 감정이 부딪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주디스가 거리 서커스를 보자고 하면 브랫이 따라가고.

브랫이 얼음 조각 공예를 구경하자면 주디스도 걸음을 옮기고.

그 밖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쉴 새 없이 서로의 의견과 취향을 까대면서도 단 한 번의 반대도 없이,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 갔다.

둘 모두 알고 있었다.

다투고 짜증 내느라 시간을 낭비하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짧다는 것을.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저녁이 되고, 늦은 밤이 되고.

식사를 끝마친 둘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중앙에는 반쯤 먹다 남은 술이 있었는데, 주디스도 브랫도 딱히 그에 관심을 두진 않았다.

“…….”

“…….”

왁자지껄한 가게의 안에서, 둘만이 조용했다.

여전히 비슷한 브랫 로이드의 표정을 보며, 주디스가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자신의 마음이, 브랫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편해질까.

물론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주디스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건 아이른이나 일리아의 방식이었지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아마 이 자식도 그 녀석들하고 비슷하겠지.’

주디스가 브랫의 입을 노려봤다.

조금씩 움찔거리는 게,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마 적절한 단어를 고르느라 머리가 복잡한 듯싶었다. 그녀는 궁금하면서도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뭘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 걸까.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영원히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말이 나오든.

그에 관해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조금 있으면 오늘은 끝났다. 그리고 둘의 관계도 끝난다.

그 사실이 주디스를 돌아보게 했다. 브랫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했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주디스가 머리를 굴렸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기에 괴롭고 힘들었지만, 어쨌든 열심히 굴렸다.

자신은 검의 최강이 되고 싶다.

아이른보다, 이그넷보다, 세상의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쿤의 제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주디스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바람이 그에 비견될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과연 무엇일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하거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

그래서였다.

주디스가 고민을 정리하기 전, 브랫 로이드의 입이 움직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

브랫 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한 생각이 스친 순간, 주디스의 팔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브랫의 멱살을 낚아챘다.

당황으로 얼룩진 표정, 눈빛.

그리고 말이 끊긴 입술.

주디스가 행동했다. 생각하기 전에 움직였다.

자신 쪽으로 상대를 끌어당긴 그녀가, 입술을 포갰다. 잠깐 닥치고 있으라는 듯 눈을 치켜뜬 채로.

“허억!”

“어, 어어어?”

“우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곳곳에 숨어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검술관 동기들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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