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불길을 잡을 방법은 (2)
인간의 오러 운용과 오크의 오러 운용, 둘 사이의 차이점은 비단 정령에만 있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기본인 인간의 방식과 달리 좌공(坐功)에 주력하는 것도 그렇고, 육신 전체를 오러의 그릇으로 쓰기보다는 내부의 몇몇 포인트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렇다.
지금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머릿속에는 두르칼리에서 배운 지식이 사라지지 않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었다.
수련을 이어 가는 와중에 깨달았다.
섬세한 기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카라쿰과 고르하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알기 전에도, 자신은 금속의 기운을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불꽃의 기운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물론 오행신공의 이론적 지식 덕분에 성장에 탄력을 받은 것은 맞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 아이른은 잊지 않고 있었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한 아이른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심상 세계가 나타났다.
오랜만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물론,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
아이른이 날카롭게 집중력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도, 바닥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그가 조용히 마음을 관조하였다.
‘……역시 전과는 다르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중앙에 꽂혀 있는 쇠말뚝.
아니, 이제 더는 쇠말뚝이라 부를 수 없었다. 불꽃을 만나서 날카롭게 다듬어진 모습은 온전한 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검이 아니라, 자신이 요술을 통해 소환하는 황금빛 검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그것이 전부도 아니었다.
검을 둘러싼 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화기(火氣)가 넓게, 예전보다 훨씬 넓게 퍼져 있다.
확장된 마음의 크기보다도 더 먼 곳까지, 지평선의 너머까지 번지고 있는 불씨를 보며 아이른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과해.’
불꽃으로 인해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날 것인가.
아니면 불꽃에 잠식되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인가.
아이른이 바라는 것은 당연히 전자였다.
샬럿도, 빅터도, 그레이슨도, 증명의 땅에서 마주했던 일리아 린제이의 모습도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오행신공의 가르침,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타고 흐르는 소리에 따라 물의 기운(水氣)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날을 다듬다 못해 녹여 버릴 듯 강한 화기를 억누른다.
너른 들판 곳곳에 피어나는 불씨에도 물을 흘린다. 따스한 온기가 쓰라린 열상으로 번지지 않도록 최선에 최선을 다한다.
허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츠아아앗-!
뿌리자마자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물줄기.
심지어 몇몇 곳에서는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물 한 바가지로 산불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포기할 순 없었다.
허나 노력에 노력을 더해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천하의 아이른이라 할지라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성과 없이 명상을 마쳤고, 땀이 줄줄 흐르는 자신의 몸 상태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쉬운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어.’
아이른이 약 2년 전, 주점에서 쿠바르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건넸던 조언을 떠올렸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은 쇳덩이이며, 그것을 다스릴 것은 뜨거운 불꽃이라고.
‘경험이 부족한 나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령술까지 곁들여서 설명했었지.’
허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알하드 산채에서 향상심을 깨닫고.
이그넷과 만나며, 또 과거 일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투쟁심을 깨닫고.
그 이후에 있었던 수많은 경험과 고민, 고찰을 통해 뜻을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유의미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물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오행신공을 배웠다고, 오러와 물의 정령을 함께 다룰 수 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었다면, 애초에 이만큼 커다란 불씨를 품지도 못했을 터다.
‘결국 중요한 건 정령이 아니고 마음이야. 물의 마음.’
문제는, 지금 자신의 옆에는 그에 대해 조언해 줄 멘토가 없다는 점이었다.
쿠바르와 함께 대륙을 떠돌았을 때는 달랐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가 제때 방향을 잡아 주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푸근한 웃음의 오크 정령사를 떠올리니 울적했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어.’
당장 실마리가 없는 건 사실이다.
당장 자신의 옆에 멘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허나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크로노 검술관이다.
대륙 최강의 검사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대륙 최고의 스승이라는 부분에는 이견이 없는 존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른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식힐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만 의지해선 안 되겠지.’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여전히 뜨거운 불꽃.
여전히 미약한 물줄기.
그러나 아이른은 포기하지 않았다. 힘에 부쳐도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도록, 노력을 이어 갔다.
오늘도, 다음 날도, 일주일 후에도 말이다.
물론 효과는 크지 않았다.
아니,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아이른의 마음은 여전히 처음과 다름없이 열기로 가득 찬 상태였다.
문제는, 아이른이 이러한 상황에 다시금 조급함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후우.”
마음속의 쇠말뚝에 아무리 불꽃을 퍼부어도, 의지의 망치로 단조를 이어 가도 별다른 진전이 없던 시절.
그 시절의 아이른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이어 갈 뿐이었다.
크게 바라지도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강철처럼 묵직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었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또래들보다 훨씬 뜨거운 불꽃을 품게 된 그는 전에 없는 열정을 품어냈지만, 예전의 인내심을 일정 부분 잃어버렸다.
불의 마음으로 물을 다룸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이른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타고…….
남부의 대수림에서 출발한 악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악의는 음습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겨울밤의 인적 없는 골목길보다 은밀했고, 경비대의 시선을 피하는 도둑보다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괴로움에 매몰된 아이른의 뒤편으로, 조용한 어둠이 잔잔히 스며들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오빠. 할 얘기 있으니까 문 좀 열어 봐.”
“……잠시만.”
키릴의 노크를 들은 아이른이 명상에서 깨어났다.
그에 따라 잠들어 있던 감각도 다시 깨어났다. 악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이른은 이를 알지 못했다.
키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오빠에게 가 있었다.
그녀가 살짝 치켜뜬 눈으로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댔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가장 중심되는 부분은 ‘요즘 너무 수련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신에게 소홀해진 것이 아니냐’ 하는 내용이었다.
아이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대답하고.
그런 오빠를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본 키릴이 쾅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아이른은 담담한 얼굴로 동생이 닫아 버린 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후, 루루가 얌전한 발걸음으로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른, 키릴이 신경질 부려도 이해해 줘. 그게 본마음은 아니니까.”
“…….”
“최근에 아이른, 수련이 잘 안 풀리는 분위기를 많이 보였잖아. 그래서 그래. 키릴이 나한테 말했어. 안 풀릴 때 집착하면 더 안 되니까, 잠깐 내려놓고 다른 생각이라도 하면서, 그러면서 기분 전환하고 그러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 자기는 그렇다고.”
“응, 알지.”
“그렇지? 아이른도 알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릴은 원래 그랬다. 앞에서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에게 소홀하지 말라’라는 말은 ‘수련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라’라는 뜻이라는 걸, 오빠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침대 한켠을 바라봤다.
온갖 물건들이 늘어서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재주를 부리는 동물 서커스 인형, 두 번 톡톡 두드리면 신나는 노래를 부르는 눈사람 인형, 시시각각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는 요술 액자…….
‘방에 올 때마다 선물 하나씩은 꼭 놓고 가는 동생인데, 오해할 리가 없지.’
동생의 얼굴, 그리고 새침한 표정을 떠올린 아이른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몰랐지만, 드넓게 번져 가던 불길이 전보다 약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 * *
4월이 되었다.
여전히 아침에는 쌀쌀하지만, 그래도 광대 악마와 마주했을 때보다는 훨씬 쾌적한 날씨였다.
정오의 하늘을 바라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미소를 지었다. 최근 본 하늘 중 가장 멋진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제야 도착했네.”
“와, 알칸트라다! 키릴, 그거 알아? 여기에 내 친구들 엄청 많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하늘만이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도시 알칸트라 역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아이른, 키릴, 루루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뒤 도시로 향했다.
“헉…… 아, 아이른 파레이라!”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그……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제 건틀릿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뭐야, 오빠 엄청 출세했네?”
“출세했네, 출세했어!”
“헉! 말하는 고양이…… 혹시, 루, 루루 님이십니까?”
“응! 맞아! 내가 루루야!”
“저, 저기! 괜찮으시다면, 루루 님도 사인…… 아니, 앞발로 잉크 한번 묻혀서 여기 찍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좋아!”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당황했다.
지금껏 도시 검문소에서 몇 번 눈길을 끈 적은 있어도, 이렇게 과한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 검사를 꼽는다면 첫 번째가 이그넷 크레센시아, 두 번째가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세 번째가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검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 바로 알칸트라였으니, 검문관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하네.”
“왜 이상해? 난 좋은데.”
“그래, 오빠. 좋게 생각해. 마스터가 됐으면 관심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어.”
동생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무시할 순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헤일 왕국, 특히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보다 훨씬 엄청난 환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그 생각은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아이른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크로노 검술관을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목적은…… 쿤의 행방을 알고 싶어서였지.’
그렇다.
그가 크로노 검술관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쿤의 행방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검을 이안에게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불길을 잡을 방법.
즉, 물의 기운과 물의 마음을 품을 방법.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아이른은 큰 걸음으로 검술관 내부로 들어갔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하고 있는 동기들을 가장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주디스가 쿤의 제자가 됐다고?”
아이른만 놀란 게 아니었다.
키릴도 놀랐다.
검사는 아니지만 쿤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아는 그녀였기에, 평생 자신을 위한 검만을 휘둘렀던 그가 제자를 들였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그에 관한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를 물어보기 전에 동기의 질문이 먼저 터져 나왔다.
“너도 여행 중에 주디스, 브랫하고 같이 다녔다며?”
“응. 그게 왜?”
“그, 여행 도중에 둘이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그니까! 혼자만 알지 말고 빨리 우리한테도 알려 줘!”
“어? 어어?”
아이른 파레이라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