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같이 가자 (3)
[외전 - 린제이 가문]
다그닥 다그닥
린제이 가문의 마차들이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일리아 린제이의 생사가 불분명했던 때라면 모를까, 긴급 상황도 아닌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긴급 상황은 맞나…….’
마차 밖의 풍경을 보며, 린제이 가주가 상념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15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악마가 출현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말에 의하면 대 악마라고 불리기에도 손색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심지어 녀석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악마들이 숨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웅의 후손이자 대륙에 몇 안 되는 강자인 그의 입장에선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대륙의 안녕이 아니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조슈아 린제이가 오래 전 자취를 감춰 버린 칼 린제이를 떠올렸다.
‘아들…….’
명가의 장남이라는 위치에도 자만하지 않았던, 허나 재능에 어울리지 않는 심약한 마음씨를 가졌던 자신의 아들.
그의 실종에 악마가 개입했을 거라는 추측이 강하게 들었다.
그 정도 존재가 아니고서는 가문의 방비를 뚫을 수 없다. 조슈아의 의심이 더욱 진해졌다.
아들은 어떤 상태일까.
이미 죽었을까. 아니면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악마의 실험체가 되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우우우우웅……
조슈아 린제이의 몸에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넓게 퍼지지는 않지만, 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운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일리아 린제이가 입을 연 것은, 그러한 기세가 마차를 가득 채우는 것도 모자라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아빠.”
“……그래, 딸.”
스르르륵……
기운을 거둔 조슈아 린제이가 자상한 미소를 보였다.
실수였다. 딸의 앞에서 자기 마음조차 다스리지 못하다니. 아빠로서 실격이었다.
아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피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성왕국을 비롯한 대륙 연합과 함께 천천히, 허나 물샐 틈 없이 수색망을 좁혀 나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바로 눈앞에 있는 일리아 린제이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에게 집중하는 일이었다.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일도 있어.’
딸과 사소한 잡담을 이어 나가며, 아버지는 조금 전과 달리 밝은 생각을 떠올렸다.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전보다 훨씬, 아들의 실종 직후보다 훨씬 밝아진 딸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더는 불안해하지 않고.
더는 집착하지도 않았다.
강박과 신경과민도 없어 보였다.
단단하고 은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아를 보며, 조슈아의 눈 역시 그믐달처럼 휘어졌다.
딸의 성장에 자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더욱 좋아졌다.
‘……상담이 끝나기도 전에 그 녀석을 보러 뛰쳐나간 건 조금 아프지만.’
당시를 떠올린 조슈아 린제이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아버지로서 정말로 멋있는 말을 했다고, 지금의 광경을 마도구로 촬영해서 아내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했던 분위기가 그 녀석 때문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못마땅했다. 아주, 몹시 못마땅했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감정이 부정적이기만 하냐고 묻는다면, 조슈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 역할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건 아이른…… 그 녀석일 테니까.’
처음 라바트에 도착했을 때 깨달았다.
많이 달라졌다고. 여전히 힘들어 보이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이그넷의 뒤를 쫓아가던 2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라고.
이제는 자신의 말과 마음이 충분히 딸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한 변화를 이끈 존재가 아이른이라면, 딸이 녀석에게 빠진 것도 충분히 이해됐다.
그리고…….
‘솔직히, 아이른 정도면 사윗감으로 부족하지는 않으니까.’
이별의 순간, 아이른에게 조언을 해 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더 훌륭한 검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훌륭한 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언젠가 까다로운 자신의 기준조차 충족시킬 정도로 훌륭한 남자, 훌륭한 사윗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물론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빠, 아빠?”
“응? 아아,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조슈아가 자신의 실수를 연거푸 사과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듯 딸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몇 년 만이지 않은가.
하나하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리아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긴 뒤, 의외의 제안을 했다.
“저녁에 식사만 하지 말고, 술도 가볍게 한 잔 할까요? 아빠?”
“수, 술?”
“네. 사실 괜찮은 술을 한 병 가지고 있어요.”
일리아가 배낭에서 술병을 꺼냈다.
라그불란 16년이라는 이름을 본 조슈아가 깜짝 놀랐다. 귀한 술이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술이었다.
또 위스키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는, 독특한 맛을 가진 술이었다.
“두르칼리…… 오크 영토에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술이에요. 맛이 괜찮더라고요.”
“……술을 배웠구나.”
“네. 엄마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저라도 아빠랑 같이 마셔 드리고 싶어서 조금 배웠어요.”
‘조금 배운 거 맞나?’
너무나도 여유롭게 술 얘기를 하는 딸을 보며 조슈아가 의구심을 품었다.
딸이 술을 배우다니. 아버지로서 기쁘면서도 슬펐다. 기분이 묘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 술자리를 제안한 딸을 보며, 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 네가 벌써 술을 알 나이가 되다니…… 고맙구나. 좋아! 그럼 저녁때 가볍게 한잔할까?”
“좋아요.”
“그래. 그런데 술은 혹시 누가 알려 줬니? 그…… 아이른?”
“아니요. 아이른은 술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그럼…….”
“브랫 로이드라고, 같이 여행 다녔던 친구 있어요.”
“아아, 그렇구나. 브랫, 브랫…….”
‘또 남자잖아…….’
속에서 피어나는 생각을 억지로 누르며, 가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든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행복한 조슈아 린제이였다.
[외전 - 일리아 린제이]
출발로부터 한달 반이 지나고, 린제이 가문 일행은 무사히 영지로 돌아왔다.
안주인 올리비아 린제이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일리아 린제이의 복귀를 축하해 줬다.
“고마워요, 모두들. 정말로.”
그녀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예전이라면 그런 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었을 일리아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였다. 혹시나 섞여 있을 악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일에 자신의 심력을 낭비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아빠. 고마워, 아이른.’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두 존재.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 일리아가 정원을 거닐었다.
‘꽃이 많이 피었네.’
5월의 따스한 날씨다 보니 여러 꽃이 피었다.
이름은 알지 못했다.
어렸을 적에야 잠시 관심을 가졌던 적 있지만, 7살 이후의 그녀는 오로지 검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갔었다.
그녀는 말없이 산책로를 걸으며 추억에 잠겼다.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오빠.
그런 오빠의 앞에 강렬한 모습으로 마주 섰던 이그넷.
얽히는 검과 검, 순식간에 난 결착, 아버지의 굳은 얼굴과 가신들의 당황, 그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16살의 어린 칼 린제이.
그보다 훨씬 어렸던 소녀 시절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노란색 복수초(Adonis).
“……그러고 보니 없구나.”
정원을 돌아본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칼 린제이가 패배한 날 이후, 복수초는 린제이 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신이 크로노 검술관에서 돌아왔던 때 다시 심을까 한 기억이 있지만, 오빠의 실종 때문에 또다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복수초는 좋지 못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불길한 꽃이었다.
“…….”
그렇지 않았다.
일리아가 눈을 감았다.
오빠도.
이그넷도.
그들의 싸움도, 그들의 싸움 이후에 피어났던 좋지 않던 분위기도.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지워 버렸다.
그렇게 하나하나 지워 나가다 보니,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아 그녀에게 물었다.
자신은 이 꽃을 좋아하는가?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 린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했으니까 들고 있었겠지.”
명료해진 사고 속,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내일은 아버지께 복수초를 사 달라고 말해야겠어.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짧은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 뒤편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답답했던 린제이 가문에 부는 새롭고도 시원한 바람이었다.
* * *
저 멀리 사라지는 린제이 가문의 마차들을 아이른과 키릴, 루루가 바라봤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눈은 그쪽을 향하고 있을지언정, 아이른의 신경은 온통 방금 전의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꼭 놀러와.’
‘이번에도 안 오면…… 직접 찾아가서 엄청나게 괴롭혀 줄 거야.’
‘약속.’
‘좋아, 약속했어. 히히.’
약간은 가벼운, 마치 루루와 같은 웃음과 함께 사라진 일리아 린제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동시에, 예전에 몇 번 경험했던 감각이 피어났다.
브랫과 주디스를 봤을 때.
혹은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간질간질한 기분.
“…….”
아이른은 이에 깊게 집중하지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둔한 사람이기도 했고, 어딘가 모르게 두렵다는 기분도 들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회피의 감정이 든 그가 자신의 동생, 키릴을 바라봤다. 그러자 간지러운 감각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쩌다 보니 동생하고 함께 여행하게 됐네.’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동생은 꼬맹이 시절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키릴은, 어머니를 제외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말괄량이이자 고집불통이었다.
그런 동생과 같이 다니면서, 사건 사고가 안 날 수 있을까?
물론 예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는 하지만…….
“오빠.”
“응?”
“누가 누굴 걱정해. 이상한 생각하지 마.”
“…….”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부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섬뜩한 생각을 한 아이른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리핀에 우리 둘이 같이 탈 수 있어?”
그가 예전 일을 떠올렸다.
11살 시절의 키릴이 요술로 빚어냈던 그리핀은 용맹하기보다는 앙증맞고 귀여운 느낌을 줬었다.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아, 성인 둘이 타기에는 비좁은 느낌이 들었었다.
물론 크게 걱정이 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때보다 훨씬 성장했을 테니, 그리핀의 크기 역시 커졌겠지.
허나 키릴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그리핀 안 탈 건데?”
“응?”
“느긋하게 갈 거야. 기념적인 오빠와의 첫 여행이잖아.”
“…….”
“왜, 싫어?”
“아니, 아니! 좋아.”
“대답이 조금 늦었는데.”
“어, 그게…….”
“아이른이 너무 좋아서, 감격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대답이 늦었던 것 같아! 응! 그런 거야!”
“…….”
“아이른, 맞지?”
“으응, 그게 맞아.”
아이른이 루루를 쳐다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키릴이 피식,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했다.
“좋아! 믿어 줄게. 그럼, 출발해 볼까!”
“출발해 볼까!”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키릴 파레이라, 그 뒤를 똑같은 걸음걸이로 쫓아가는 루루.
잠시 멍한 상태로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뒤늦게 그들을 쫓아갔다.
맑은 하늘에서 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