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같이 가자 (2)
아이른 파레이라의 여동생, 키릴 파레이라가 연무장에 등장했다.
물론 린제이 부녀는 그녀가 아이른의 여동생이라는 걸 몰랐다.
조슈아 린제이는 자신에게 존재감을 숨기고 등장한 젊은 여성을 보며 조금 놀랐다가, 복장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동부에서 자주 볼 법한…… 마법사나 요술사겠군.’
일반인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닌 마스터라 할지라도, 기상천외한 능력을 사용하는 요술사나 마도구로 잔뜩 무장한 마법사의 기척은 충분히 놓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고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리아 말고도…… 다른 여자가 있어?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극성인 여자가?’
일리아 린제이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아름다운 머릿결과 귀여운 외모,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매섭다기보단 당찬 느낌을 줬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았고,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굉장해 보인다고 할까.
그렇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자존감은 지금의 일리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저벅저벅 걸어온 금발의 여자가 확, 아이른을 껴안았다.
순간, 린제이 부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이 키릴에게 안긴 채로 변명했다. 왜 변명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저, 그, 동생입니다, 친동생. 일리아, 예전에 한번 말한 적 있잖아.”
“그래? 아, 맞다. 기억났어.”
“음, 그렇군.”
“네. 키릴, 어떻게 여기를…… 아니, 일단 소개부터 하자.”
“오빠는 거의 2년 만에 만난 동생이 안 반가워?”
“…….”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이른은 키릴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
침을 꿀꺽 삼킨 그가 일단 동생을 떼어 냈다.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제쳐 두고, 키릴 파레이라가 린제이 부녀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파레이라 가문의 여식, 키릴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아이른 오빠의 동생이에요.”
“크흠, 반갑다. 조슈아 린제이라고 한다.”
“일리아 린제이예요. 반가워요.”
“예, 반가워요.”
“…….”
“…….”
침묵이 감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른과 일리아야 지위나 검술 실력에 비해 순한 성격이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조슈아 린제이까지 키릴 파레이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분위기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순서대로 셋을 바라보던 키릴의 시선이 조슈아 린제이에게서 멈췄다.
엷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했다.
“방금 봤는데…… 오빠를 심하게 다루시더라고요?”
“…….”
조슈아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는 아이른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평소보다 훨씬, 지도 대련의 성격 이상으로 강하고, 사납게.
허나 변명거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그…… 아이른 군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제대로 된 가르침을 내리려면 다소 지도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고…… 또 평소에는 이렇지 않다. 어쩌다 보니 오늘 조금 심했을…….”
“루루, 정말이야?”
“……평소에도 똑같았어.”
살짝 조슈아의 눈치를 본 루루가 키릴에게 이실직고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슈아가 딱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키릴의 질문에 거짓을 답할 순 없었다.
대답을 마친 루루가 아이른의 뒤로 숨어 눈만 내밀었다가, 가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완전히 숨어 버렸다.
“그렇다는데요?”
“…….”
“키릴, 그, 초면에 너무 무례한…….”
“가만히 좀 있어 봐.”
아이른이 동생을 말리려 했으나 턱도 없었다.
눈짓 한 번으로 오빠를 깨갱시킨 키릴이 조슈아에게 말을 이어 갔다.
“저도, 그리고 루루도 요술사다 보니 대충은 알 수 있어요. 가주께서 오빠에게 큰 악감정을 가진 건 아니라는 거. 하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엄하게 대하는 면이 분명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
“검의 길을 걷는 이에게 거친 훈련은 필수적이겠지만, 동생 된 처지에서 걱정이 되다 보니 저도 조금 감정적으로 말했네요. 그 점은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미안하다, 신경 쓰게 만들어서.”
조슈아 린제이가 손사래를 치며 잘못을 인정했다.
아이른으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광경.
허나, 키릴은 너무나도 쉽게 가주의 사과를 받아 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릴 파레이라의 시선이 이번에는 일리아 린제이 쪽으로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에게 꽂혔다.
일리아는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마찬가지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아버지와 달리, 자신은 딱히 실수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
갑작스레 시작된 눈싸움.
또다시 분위기가 묘해졌다.
조슈아와 아이른은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멍하니 둘을 바라봤고,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1분, 2분,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일리아 린제이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눈싸움에서 패배하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다.
살짝 옆으로 시선을 피한 일리아에게 키릴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
“응? 어? 네?”
“저보다 한 살 많으니까 언니 맞아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냥 키릴이라 불러도 돼요.”
“어…… 정말?”
“네. 불러 주실래요, 제 이름?”
“……키, 릴?”
“고마워요, 언니. 저도 일리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어어, 으응…….”
순식간에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온 키릴이 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마법 사진기로 찍어서 따로 놓고 본다면 산뜻한 기분이 들 정도의 표정이었다.
허나 이 자리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묘한 압박 속에서, 키릴이 따로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 언니.”
“응?”
“잠깐,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 저쪽에서 잠시 얘기해도 될까요?”
“그, 그래.”
“루루는 여기 있어.”
“응, 키릴. 얌전히 있을게.”
아이른의 등 뒤에 있는 루루가 대답했고, 일리아와 키릴이 멀어졌다.
조슈아와 아이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멀어지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둘 다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물론 계속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조슈아 린제이였다.
그가 아이른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문으로 따라올 거냐?”
“원래라면 고민해 봤겠지만…….”
후우욱-!
조슈아 린제이의 기세가 강해졌다.
넓게 퍼지는 게 아닌, 아이른에게만 집중되는 기운. 명백히 키릴 파레이라의 눈치를 본 처사였다.
땀을 한 방울 흘린 아이른이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따로 갈 곳이 있거든요.”
“흠. 이그넷이 한 말과 관련이 있나?”
“맞습니다, 후우.”
기세가 줄어들자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이른은 며칠 전, 떠나기 직전 이그넷이 자신에게 한 귓속말을 조슈아에게 말해 주었다.
‘신성왕국의 정보에 따르면, 쿤은 지금 크로노 검술관에 있다고 하는구나.’
그 말 한마디로 아이른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사실 원래도 검술관에 들를 생각이 있었다.
이안 관주에게 자신의 검도 보여 줘야 했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되긴 했으나 주디스도 보고 싶었다.
거기에 쿤까지 그곳에 있다고 하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쿤의 인정을 받진 못하더라도, 1년 뒤에라도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약속은 잡아 둬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작 성취를 얻었는데도 쿤을 찾느라 잔뜩 시간을 허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이른은 이를 조슈아 린제이에게 설명했고,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안도하는 와중에도 뭔가 불만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둔한 아이른은 그 이유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일리아와 함께 합류한 키릴이 아이른에게 물었다.
“크로노 검술관에 간다고?”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집 나간 지 거의 2년이나 됐는데? 가문으로는 안 돌아갈 거야?”
조슈아, 일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아이른 역시 말문이 막혔다.
카라쿰과 대륙을 떠돌던 때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용병 중개소를 통해 편지를 보냈었다.
허나 오크의 영토로 진입한 이후로는 워낙 많은 일이 있었다 보니 가족들에 소홀해졌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잠시 잊었다.
가족의 응원과 사랑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었다. 동생에게도 미안했다.
……하지만 검술관 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악마로 인해.
이그넷으로 인해.
퀸시 마이어스를 비롯한 정화단 성기사들로 인해 불이 붙은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결정을 내린 아이른은 고집을 부리기로 했다.
“알겠어.”
“응?”
“가자고, 검술관.”
아이른이 입을 열기도 전에, 키릴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아이른이 되물었다.
그 물음에도 동생은 태연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에 아이른은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요술에 더 능통해진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신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더욱 감이 좋아진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아. 오빠가 고집을 부릴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도 신기하고, 또 내 그리핀을 타고 다니면 여기저기 금방 들를 수 있으니까.”
“맞아. 키릴 말이 맞아!”
“루루, 많이 착해졌구나.”
“응! 나는 누구보다 착한 고양이야! 앞으로도 루루를 믿어 주고, 예뻐해 줘!”
“알았어.”
키릴이 빙긋 웃으며 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루루는 그 어느 때보다 얌전한 모습으로 그녀의 손길을 즐겼고,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일리아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린제이 부녀를 바라본 그녀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갑작스레 등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 내서 죄송했습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오빠 때문에 경황이 없었어요.”
“이해하네.”
“이해해, 키릴.”
“고맙습니다, 가주님. 고마워요, 언니. 죄송하지만, 밀린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데…… 오늘은 오빠를 독점해도 괜찮을까요?”
지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이의 말이었다.
린제이 부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맑은 웃음을 보인 키릴이 곱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떠나기 전에 자주 뵀으면 좋겠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른과 루루를 끌고 가는 키릴 파레이라.
조슈아도, 일리아도 멀어지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침묵이 깨진 것은 셋의 신형이 건물에 가려 사라졌을 즈음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일리아.”
“네, 아빠.”
“파레이라 양과 한 얘기, 알려 줄 수 있니?”
“죄송해요.”
“……그래.”
가주가 살짝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 *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아이른은 키릴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악마와 엮인 이야기도 말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지만, 루루가 키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키릴은 생각했던 것만큼 펄쩍 뛰지 않았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던 동생이 짧게 말했다.
“믿을게. 그러니까 잘해.”
“……열심히 할게. 걱정 끼치지 않도록.”
키릴은 린제이 부녀와도 꽤 잦은 만남을 가졌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아와 키릴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가주 역시 일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는데,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그를 보며 아이른은 조금이지만 황당함을 느꼈다.
“아이른.”
“응?”
“키릴이랑 비교하면 안 돼.”
“……그래.”
물론 루루의 말을 듣고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흐르고.
결국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린제이 가문 일행은 아단 왕국이 있는 서쪽으로.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동쪽으로.
라바트 영지 밖에서 마주 선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이른.”
“예, 가주님.”
다만, 조슈아의 경우 인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검술에 대한 조언.
아니, 그보다는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에 아이른은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가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으음.”
짧게 고개를 끄덕인 조슈아 린제이가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애증이 교차하는 녀석이었지만, 역시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검사를 무작정 미워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른에게 다가온 이는 일리아 린제이였다.
라바트에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밝은 표정.
그리고 훨씬 맑은 미소를 보인 그녀가, 이그넷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코앞까지 얼굴을 내밀다가 귓가로 틀었다.
은은한 속삭임이 들려 왔다.
“우리 가문, 1년 안에 꼭 놀러와.”
“…….”
“이번에도 안 오면…… 직접 찾아가서 엄청나게 괴롭혀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