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같이 가자 (1)
이그넷과 율리우스를 비롯한 정화단 사람들이 떠나고, 라바트의 영지는 이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물론 신성왕국의 인사들이 그동안 소란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공식적으로 라바트의 손님으로 있었던 흑기사단, 그리고 팔랑케와 칼벤의 인사들까지 한 번에 자국으로 돌아가다 보니 더 한산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연신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연무장이었다.
증명의 땅에서의 챔피언 결정전에 이어, 광대 악마와의 일전으로 대륙의 강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존재, 아이른 파레이라.
이전 세대 최고의 재능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5대 검술명가 가주들보다 대단한 강자라고 평가받는 검사, 조슈아 린제이.
둘의 대련은 정화단이 떠나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뜨겁고, 거칠었다.
콰아앙!
“크윽…….”
“고작 이 정도로 균형을 잃어서야 되겠나?”
아니, 오히려 더욱 격렬해졌다.
이유야 명확했다. 조슈아 린제이가 그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납게 아이른을 몰아치는 가주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몇 년 만에 자신을 직접 찾아오고,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사랑스러운 딸.
그런 일리아 린제이에게 그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해 조언을 해 줬다.
50년의 인생에서 쌓아 올린 경험과 연륜,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신이 생각해도 괜찮은 대답을 내놨고, 그날 이후 딸은 전보다 훨씬 밝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정말로 좋은 일이고, 뿌듯한 일이다. 지금처럼 화를 낼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얘기를 듣자마자 밖으로 달려간 이유가, 저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니!’
일리아는 자신의 사생활에 누군가가 참견하는 것을 싫어한다. 아버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에는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조용히 딸의 뒤를 미행했었고, 일리아가 도착한 곳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른 녀석이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자신에게 보여 줬던 것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건네는 딸의 모습이.
더 짜증 나는 건, 저 녀석은 그런 딸의 태도에 몹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네놈, 검이 그리도 좋더냐!’
물론 알고 있었다. 악마와 대적하고, 이그넷과 마주하고, 대륙의 최강자 중 하나인 율리우스 휼과 말을 섞었다.
또 다른 최강자인 쿤의 인정을 받으라는 숙제까지 생겼다.
그런 마당에 수련 따위는 내팽개치고 자기 딸과 화기애애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화가 치밀었을 터였다.
하지만.
하지만…….
‘딸을 완전히 뒷전으로 놓는 것도, 나는 용서 못 한다!’
콰득-!
생각을 마친 조슈아 린제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들끓는 감정과 함께 힘이 용솟음쳤다.
하늘검의 비전을 통해 다듬어진 오러 소드가 평범한 검날이 아닌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쭉 늘어났다.
순식간에 일곱 파편으로 갈라진 검풍(劍風)이 순차적으로 아이른을 향해 날아갔다.
터엉
터어엉-!
터엉!
“으윽!”
아이른이 신음을 흘렸다.
바람 하나하나의 느낌이 다 달랐다.
어떤 것은 둔중하게 자신을 압박했고, 다른 것은 오히려 헛헛한 느낌을 주어 잔뜩 긴장하던 자신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균형을 잃은 틈을 타고 동시에 날아온 바람이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막아 냈다.
허나 쉴 틈은 없었다. 어느새 후방을 점한 조슈아 린제이가 이번에는 직접 검을 들고 자신을 향해 짓쳐들었다.
아이른은 황급히 신형을 돌리며 우하단에서 좌상단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위력이 태풍마저 날려 버릴 듯했다.
스윽
허나, 가주의 검은 어느새 강철의 나비가 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바람을 베어 틈을 만든 후 여유롭게 움직였다. 어느새 아이른의 목에 검을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이것밖에 못 하나?”
“아닙니다!”
“아직 목소리는 나쁘지 않군. 더 험하게 굴려도 되겠어.”
“부탁드립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재차 자세를 갖췄다.
호흡이 거칠었다. 한계까지 혹사한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항상 충만해 있던 오러는 고갈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허나 감각만은 예리하게 빛났다.
조슈아 린제이의 검로와 오러, 자신을 향한 왠지 모르게 언짢은 감정까지도 아이른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가주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사실 바로잡을 수 없다는 쪽에 가깝긴 했다. 일리아 린제이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조슈아 린제이였으니까.
허나 그러한 감정 덕분에 아이른은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할 수 있었고, 더욱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영웅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을 때, 당돌하기 그지없었던 자신을 향해 카라쿰이 보여 준 것과 비슷할 정도의 사나움.
그 거친 압박감이 좋았다.
그 살벌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저 멀리 달아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따라잡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또다시 강하게 짓쳐들어오는 가주의 검을 느끼며, 아이른이 감각을 개화했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이성으로 최적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조슈아는 마냥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정도 이상으로 격렬할지언정, 지도 대련의 성격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만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내린다.
최적의 선택지를 골라야만 돌파할 수 있는 난관을 건네준다.
실패한다면 성공할 때까지 반복한다.
노골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 대신, 검을 통해 조금씩 힌트를 더해가며 스스로 고민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콰아아앙!
‘분위기 자체는 살벌하고 무자비하지만, 지도 방식 자체는 굉장히 상냥하면서도 배려심이 깊어.’
아이른 파레이라가 미소 지었다.
역시나 좋은 사람이었다. 당연하긴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일리아 린제이의 아버지 아니던가.
그는 바닥에 남아 있던 힘을 전부 긁어 반격에 나섰고, 그런 그의 모습에 조슈아 린제이가 눈을 빛냈다.
확실히 괜찮은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수는 없다!
합, 하고 기합을 외친 가주가 더욱 강한 일격을 날렸다. 지금까지의 아이른이라면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막아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못 받아내면 어쩔 수 없지. 치료받으면 금방 낫잖아.
대견함과 짜증, 두 상반된 감정의 사이에서 조슈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검을 휘둘러 갔다.
그때, 뒤편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부우우웅-!
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슈아가 검로를 틀었다. 스쳐 지나가는 검을 보며 아이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한 수는 절대로 못 막았을 거다. 가주의 등 너머로 밝은 미소를 건네는 일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허나 그러한 표정은 잠시일 뿐.
조슈아를 향해 인상을 찌푸린 일리아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이건…… 그래, 아이른이 이렇게 강하게 해 주길 바랐다.”
“정말요?”
“그렇다니까. 그렇지, 아이른?”
“……맞습니다.”
“약간 뜸 들인 것 같은데?”
“……아이른이 많이 지쳐서 바로바로 대답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참에 잠깐 쉬자꾸나.”
“알겠습니다.”
“흐응.”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아이른과 딸의 눈치를 보는 조슈아.
그리고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일리아.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이른의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일리아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
조슈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더 티를 내지는 않았다.
딸의 앞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상한 표정으로 있자.
재차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가주가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기 위해 분위기를 잡았다.
하지만 잠시 후에 튀어나온 딸의 말에, 그는 체면 불고하고 놀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른, 우리 가문으로 올래?”
“어?”
“뭐어!”
“…….”
“…….”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정도로 조슈아 린제이의 목소리가 컸다.
표정도 가관이었다. 평소의 근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턱이 빠질 듯 벌어진 입이 바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며, 일리아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 반응이 조슈아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을 박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아이른에게 말했다.
“아빠랑 나는 곧 가문으로 돌아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 그렇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리에 악마 토벌에 들어갈 예정이라고는 했지만, 대륙 전체를 소수의 정화단 인원만이 수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국 고위층의 지원은 필요하고, 조슈아 린제이 역시 그 고위층에 해당한다.
즉, 언제까지고 라바트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일리아도 이젠 수행하러 다닐 이유가 없었다.
며칠 전에 그녀가 말했다.
비로소 긴 방황을 끝낸 것 같다고. 자신의 길을 찾았으니, 이제 그 길을 나아가는 노력만 하면 되겠다고.
‘하긴, 이제부터는 가문에서 수련하는 게 더 낫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브랫, 주디스, 카라쿰과 헤어졌을 때도 그랬지만, 일리아와의 이별 역시 아이른에게는 진한 아쉬움을 선사했다.
가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아니 잠깐, 그런데 같이 가자고 했잖아?’
아이른이 일리아를 바라봤다.
일리아도 아이른을 바라봤다. 미소와 함께.
요즘 자주 웃네, 그가 생각했다.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허나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따로 있었다.
아이른이 대답을 바라는 듯 시선을 이어 갔고, 일리아가 대답했다.
“어차피 이그넷하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수련만 할 거잖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아빠하고 하는 대련은 어때? 도움 많이 되지?”
“……그렇지.”
“그러면 우리 가문에서 지내면서, 계속 수련을 이어 가면 되는 거잖아.”
“어…….”
“아니야?”
후우우웅-!
아이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자상한 표정과 다르게, 살기가 느껴지는 조슈아 린제이의 얼굴이 보였다. 등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그야말로 대륙의 10대 검사에 어울리는 기세.
허나 일리아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빠, 그만.”
“…….”
슈우욱
언제 그랬냐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주.
그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데, 이번엔 일리아 쪽에서 은은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을 배려하는 듯, 압박하는 듯 알 수 없는 느낌의 표정.
일리아가 재차 아이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같이 가는 거로?”
우우웅……
일리아 린제이의 기세가 조금씩 강해졌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분명한 압박이었다. 동행을 요구하는 친구의 시선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꿀꺽 침을 삼켰다.
잠시 말을 고른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안 돼요.”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자 고양이 요술사와 햇살을 뽑아 만든 듯 아름다운 금발을 지닌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루는 살짝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누구지?’
‘누구야?’
린제이 부녀의 눈에 동시에 의문의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놀란 목소리로,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