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천재들의 사이에서 (4)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3월 중순.
율리우스 휼을 비롯한 정화단 구성원들은 라바트를 떠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섰다.
배웅하는 이는 얼마 없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소수, 그들이 처리해야 할 일 역시 극비.
그렇기에 던전 탐사대의 고위 관계자 몇과 조슈아 린제이, 아이른 일행만이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마어마하구만.’
라바트의 궁정 마법사, 페리 마르티네스가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신성왕국의 전력이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허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를 비롯해, 대륙에 이름을 떨쳤던 전대의 강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렇기에 믿음이 갔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그 끔찍한 광대 악마라도 버텨 내지 못하리라.
다른 어떤 악마가 도사리고 있더라도 저들을 해하지 못하리라.
안도의 기색을 내비친 그가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악마토벌대의 가장 젊은 멤버이자,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존재인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리고 그녀의 앞에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 루루,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
페리 마르티네스의 가슴속에 더욱 진한 감정이 피어났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인재들이 한 세대에 몰렸어.’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자신의 악우 세비온 브룩스를 손쉽게 꺾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으니까.
심지어 지금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악마를 마주하기 전보다도 대단했다.
무언가 깨달음이 찾아왔음이 분명했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들이 던전에서 보여 줬던 활약과 용기, 그리고 침착함.
경험 많은 마법사인 자신조차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을 때, 저들은 마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의 판단과 행동을 보여 줬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더욱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터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바로 일리아 린제이였다.
물론 그녀 역시 던전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광대 악마의 2차 결계를 뚫어낸 셋 중 하나였고, 모두가 벅차한 영웅의 검조차 수월하게 익힐 정도였으니까.
허나 다른 이들에 비하면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무리하는 듯한 기색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그넷처럼 대놓고 기운을 드러내는 성향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마법사로서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성장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그넷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뭔가 여유가 느껴진단 말이지…… 뭘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린제이 가의 재녀는 증명의 땅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높은 곳으로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점이었다.
라바트에도 저런 인재들이 있다면 좋으련만.
나직이 중얼거린 페리 마르티네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옆을 돌아봤다.
왠지 모르게 불편한 표정으로 딸을 지켜보는 아버지, 조슈아 린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 양반은 왜 저래? 딸이 이그넷 앞에서도 쫄지 않고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아니, 딸이 아니라 아이른 쪽을 보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저 양반도 꽤 특이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갔다.
물론 아이른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아이른, 아이른.”
“응.”
“일리아네 아빠가 너 엄청 째려보고 있어.”
“알고 있어.”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몰래 뭐라도 훔쳐 먹고 그랬어?”
“……안 그랬어.”
후우, 아이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렴풋이 눈치는 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조슈아 린제이가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물론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온 이그넷이 입을 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말씀하시죠.”
“저번에도 말했듯이 3년이니라. 그 안에 기필코 실력을 끌어올리도록.”
“저번에 말했듯이, 1년 안에 무조건 합류하겠습니다.”
“자신감이 과하다. 쿤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라.”
“쿤을 만난 적 있습니까?”
“만나진 않았다. 허나 들은 건 많지.”
“…….”
“네게도 한 가지 알려 주마.”
순간, 이그넷이 훅 하고 거리를 좁혔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다가, 왼쪽 귓가로 꺾이는 고개.
아이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 그녀가 재빨리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농도 짙은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싱긋 미소를 지은 그녀가 살기의 주인, 일리아에게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
일리아 린제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 같기도, 할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한 모습.
그렇게 30초 정도가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볼 때는.”
“볼 때는?”
“대련이라도 한번 하죠.”
전과는 달리 존대를 쓰는 일리아.
허나 오히려 이쪽이 더 무시하기 힘들었다.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낸 것 같았던 예전에 비해, 지금의 모습에선 훨씬 여유가 느껴졌다.
잠시 당황한 이그넷이 픽 하고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알겠노라. 다음에 보자꾸나.”
“악수는 좀.”
“아, 그래.”
“그럼 나랑 하자.”
“너도 나를 싫어하던 것 아니었나?”
“이젠 조금 나아졌어. 악수할 정도는 돼.”
매몰차게 거절한 일리아를 대신해, 루루가 앞발을 뻗었다. 이그넷의 검지와 엄지가 이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말랑말랑하네.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몇몇 정화단의 노기사들이 부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봤다.
‘든든하군.’
율리우스 휼 역시 아이른과 일리아, 루루, 이그넷을 바라보았다.
물론 주책맞은 다른 노기사들과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지금 순간이 아닌, 찬란하고 밝은 미래였다.
‘부디 저들이 앞으로도 계속, 오랫동안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그를 통해, 더욱 강하고 올바른 존재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평생을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성기사가, 눈을 감고 신께 기도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대수림의 한가운데서, 악의로 점철된 기운이 젊은 영웅을 향해 쏘아져 갔다.
* * *
[외전 - 조슈아 린제이]
“엠마 경. 얼마나 남았지?”
“지금 속도라면, 일주일 정도는 더 걸립니다.”
“그렇군.”
“속도를 더 올릴까요?”
“아니야. 무리하지 말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말을 마친 조슈아 린제이가 눈을 감았다.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들인 칼 린제이의 실종 이후, 조슈아 린제이는 일리아 린제이의 안전에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엑스퍼트씩이나 되는 딸의 수행을 막아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타협의 결과가 바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요술 지도였다.
혈액으로 각인한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대상자가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당했을 시 강한 붉은빛을 발하는 물건.
웬만한 마력 간섭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물건으로, 마도구보다도 훨씬 값비싼 물건이었다.
헌데, 그 요술 지도에 이상이 생겼다.
평소라면 초록색을 발하고 있어야 할 지도 위의 점이, 붉은색도 아니고 검은색을 띠고 있었던 탓이다.
‘지도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상 가는 게 몇 가지 있지만…… 가장 높은 확률이라면, 마력보다 더욱 짙은 무언가…… 예를 들어 마기(魔氣)가 자욱한 공간에 들어섰을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 제작자의 말을 떠올린 조슈아 린제이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별일 없을 터였다. 2주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끔찍한 마인의 소굴이라 한들, 소드마스터에 오른 자신의 딸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심지어 호위기사 엠마 가르시아의 말로는, 동료인 나머지 셋도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고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중 하나가 내 딸을 꺾었다고 했지. 고양이지만 뛰어난 요술사도 있다 했고…….’
그만한 전력이라면, 제아무리 팔불출인 조슈아라 할지라도 걱정을 내려놓는 게 맞다.
허나 지도의 검은 점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초록색으로 회복되지 않자, 가주의 머릿속엔 또 다른 가능성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딸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는, 마인보다 더욱 끔찍한.
150년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진, 고대의 악마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팟-
“드, 들어왔습니다. 불빛이 들어왔어요?”
“뭣?”
조슈아 린제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쳐다봤다.
정말로 불이 들어왔다. 그것도 붉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다.
딸은 살아있다.
그것도 건강한 상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마차 안의 호위기사, 그리고 지도 제작자를 껴안았다.
강건한 엠마 가르시아는 괜찮았지만, 요술사인 지도 제작자는 대륙 10대 검사의 손길에 상당한 고통을 느꼈다.
“가, 가주님! 잠시…….”
“아, 그렇지! 지금 당장 딸의 상태를 확인해 주시오. 어서 빨리!”
“…….”
“왜 그러시오?”
“아니,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나이 지긋한 요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지중지하는 딸의 생사가 확인됐으니 정신이 없을 만했다. 자신의 아픔 따위는 신경 쓰지 못 할 만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살짝 상처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섭취할 시, 대상과 대상의 주변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
이를 위해 요술사가 일리아 린제이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입에 넣었다.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조슈아 린제이와 엠마 가르시아는 조용히 그의 능력이 발현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요술사의 입에서 여러 가지 정보가 흘러나왔다.
“일단…… 아가씨는 무사합니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후우, 그렇군! 또, 또 보이는 게 있소?”
조슈아가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딸이 괜찮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그는 요술사를 재촉했고, 요술사는 더듬더듬 눈에 보이는 것을 늘어놓았다.
황무지에 바글바글 몰려 있는 전투 병력들.
꼬질꼬질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는 노기사들.
그들의 뒤편에 보이는 무너져 내린 던전의 잔해.
“……아무래도 큰일이 나긴 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조슈아 린제이와 엠마 가르시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황상 마(魔)와 관련된 일이 확실해 보였다. 그것도 일개 마인이 아니라, 진짜 악마와 엮인 무언가가 터진 느낌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에 딸이 엮이다니!
조슈아의 주먹에 핏줄이 불거졌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그때, 요술사의 입에서 또 다른 정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따님의 주변에 가까워 보이는 존재가 둘 있습니다.”
“둘?”
“예. 하나는 고양이인데, 사람 말을 알아듣는 듯이 행동하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잠깐, 고양이를 포함해서 둘이라고?”
“예? 예.”
요술사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가주가 왜 사람 수에 집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조슈아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4명이 함께였던 파티가 찢어지고, 둘이서 여행을 다니고 있는 건가?’
가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처음 엠마 가르시아의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포함된 파티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허나 파티에 다른 여자도 있기도 하고, 이제 와서 걱정해 봤자 팔불출 소리밖에 들을 수 없기에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었다.
허나 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침을 꿀꺽 삼킨 조슈아 린제이가 요술사에게 물었다.
그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럼 다른 나머지 하나는 누구지? 여자인가? 붉은 머리의…….”
“아닌데요?”
“뭐?”
“금발의 남성입니다. 꽤나 잘생긴…….”
“마부! 속도 올려!”
“엣?”
“어?”
갑자기 폭주하는 조슈아 린제이를 보며 엠마 가르시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술사도 깜짝 놀라 능력이 끊겼다. 지끈거리는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황당한 눈빛으로 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더 빨리 가지 못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가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명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차를 멈춰 세운 그가 다른 가신에게 말 두 필을 건네 받아왔다. 그리고 엠마 가르시아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우리 둘이 먼저 가자. 그편이 더 빠르겠다.”
“…….”
“왜 그러나?”
“아닙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엠마 가르시아가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렇게 둘은 순식간에 라바트의 영지까지 말을 몰았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이틀이나 일정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딸은 녀석에게 넘어가 버린 모양이야.’
후우, 도착 전의 여정을 떠올리던 조슈아 린제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꽤 괜찮은 청년이다.
외모도 준수하고, 체격도 건장하다. 검술 실력은 더 대단하다.
이그넷을 제외하면 20대 검사 중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이니까. 자신의 젊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재였다.
심지어 인성도 좋았다.
재능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모습도 없었으며, 자기 실력에 취해 남을 무시하는 모습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딸에게도 친절했다.
문제는, 그 어떤 건실한 청년이 와도 아버지의 눈에 찰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안 되겠어. 내일 대련부터 더 강하게 몰아쳐야겠어.”
“…….”
엠마 가르시아는 침묵을 지켰다.
가주가 속이 너무 답답하다고, 술이라도 함께 마시자고 해서 상대해 주고 있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 역시 정말로 아가씨를 좋아하는 입장이지만, 이 팔불출의 딸 사랑은 너무 과했다.
물론 이를 지적할 정도로 엠마는 담이 세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그래, 그래. 한잔 더 하지.”
조슈아는 그 뒤로도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마셨고, 걱정 속에 잠자리에 들었다.
끝까지 가주를 보좌한 엠마 가르시아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고생하세요, 아이른 파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