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천재들의 사이에서 (3)
일리아 린제이는 지금껏 기나긴 방황의 길을 걸어왔다.
오빠인 칼 린제이의 패배, 그리고 실종은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살 기회를 앗아 갔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건 깨달았다.
허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잘못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답을 몰랐고, 자신의 길을 몰랐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정말로 좋은 친구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검을 찾았을 때도 일리아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아이른이 내민 손길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사람.
이그넷이 툭 던진 인정의 한마디에 감정의 둑이 무너져 버린 사람.
자신의 길을 걷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
대중의 이목에 휩쓸렸을 때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사람.
‘이게 맞는 걸까?’
그런 그녀였기에, 문을 두드리기까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당당히 나아갈 자신을 꿈꾸는 주제에,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긴 복도를 지나는 내내 끊이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일리아 린제이는 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똑같잖아.’
그렇다. 어차피 수없이 실수를 반복해 왔던 자신이다.
자신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한참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증명의 땅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이러한 점일 터였다.
인정하자.
지금의 나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편해졌다.
마음속의 찝찝함을 털어 버린 일리아는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딸로서 조슈아 린제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고민 상담을 하고 싶어요.”
곧바로 후회했다.
어째서 조금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든든해.’
안심이 됐다.
말을 하는 내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상냥함과 온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
타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가족이기에 보일 수 있는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일리아는 천천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무언가 착각하고 있구나.”
숙고 끝에 입을 연 조슈아 린제이의 말은, 시야가 좁아져 있던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을 짚어 주었다.
“자신의 길을 걸을 때, 어째서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예?”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원래 남과 교류하며 사는 존재다. 빈민가의 거지도, 고귀한 곳의 왕도, 남자도, 여자도, 귀족도, 평민도, 노인도, 아이도…… 모두가 그렇지.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어.”
“하지만…….”
일리아의 혼란이 더 거세졌다.
아이른이 그러지 않았는가. 타인의 말과 시선에 휘둘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무작정 이그넷의 뒤만 쫓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길이 맞느냐고.
헌데, 아버지는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은 타인과 교류하는 존재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일리아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타인과 교류를 이어 가는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부분이다.”
빙긋 웃음을 지은 조슈아 린제이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앞서도 그랬듯, 그는 사람이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강조했다.
감정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류하고, 재능을 나누고. 그렇듯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감으로써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부터 끝까지 타인에게 의존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야기는 페리 마르티네스에게서 들었다. 너를 험담하는 귀족들에게 쌍욕을 퍼부었다면서?”
“그건…….”
“혼내려는 게 아니란다. 오히려 칭찬하고 싶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
“그렇지 않으냐. 그들이 너를 위해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면, 그들의 지적을 통해서 네가 뭔가 배울 점이라도 있었을까?”
“……아니요.”
“그렇지. 결국 너에게 하등 쓸모없는 말일 뿐이었다. 그런 건 무시해 버리는 게 맞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조슈아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절대 무시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도 있는 법이지. 네 친구…… 아이른 녀석의 말이 그렇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라바트 귀족들과 아이른 파레이라는 달랐다.
그의 말은 자신을 위한 말이었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케 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처럼 아버지께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일리아가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결국…… 남과 어울리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군요.”
“그렇지.”
더욱 크게 미소 지은 조슈아가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도 수많은 이들의 말이, 시선이, 행동이 너를 스쳐 갈 것이다. 너를 흔들 거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두려워허묘 눈과 귀를 닫고 사는 건 옳지 않다. 그건 너의 길을 나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고립되어 혼자 웅크리는 것일 뿐이야.”
“…….”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흘려 버릴 것은 흘려 버려라. 네가 판단하기에 쓸데없는 것이라면 연회장에서처럼 욕 한 번 내뱉은 다음 털어 버리고, 너를 살찌우는 조언이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 그럼 다시 얘기해 볼까. 이런 판단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남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집중하는 것.”
“정확하다.”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아버지가 힘주어 말했다.
“남의 말에 하나하나 집중할 것 없다. 남이 아닌 너 자신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면,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단다.”
그 순간,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가. 어떤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어떤 것이 자신을 웅크리게 만드는 길인가.
그것이 명확하다면.
그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타인의 말과 행동에 무작정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 취사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는 타인의 시선에 겁낼 필요도 없었다.
타인의 말에 힘겨워할 일도 없었다.
‘이그넷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눈을 감은 일리아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떠올렸다.
그녀가 보였던 검술, 그녀가 보였던 용기, 그녀가 자신에게 건넸던 인정의 한마디.
그런 것은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녀를 미워했고, 싫어했지만…… 증오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지만 동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자신의 성장을 이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명확하게 구분하자.’
이그넷으로 인한 사건.
이그넷으로 인한 슬픔.
이그넷으로 인한 소문, 그리고 비교와 비아냥의 목소리.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 귀담아들을 필요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검사의 인정까지 무시하고 외면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일리아는 그녀의 칭찬을 순수히 기뻐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아빠.”
“그래, 딸.”
“말씀 정말 고마워요. 죄송하지만, 잠시 좀 다녀올게요.”
“응? 어딜…….”
자신의 마음에 집중한 순간.
그녀는 이그넷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아버지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께는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에게 집중한 순간, 그 무엇보다 커다란 존재감으로 다가온 그를 보기 위해서 일리아는 연무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거기 있는 줄 아는 걸까?
그냥 알았다.
인생에 있어서 아주 가끔 찾아온다는 요술사의 감이 그녀에게 내려왔다.
일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소중한 친구.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며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일리아?”
“…….”
“무슨 일이야?”
아이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로노 검술관에서도, 증명의 땅에서도, 이곳에서도 자신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던 그의 얼굴이 보인다.
약간의 걱정을 품은 눈동자도, 옅은 땀 냄새도 느껴진다.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몇 년 만에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일리아 린제이가 속에 담긴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
허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자신이 아닌 타인의 반응에, 시선에, 행동에 집중하고 살았던 그녀이기에, 지금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자신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이지?’
‘갑자기 뛰쳐 나와서, 이상하게 보는 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말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아이른은 나를 친구라고밖에 생각 안 할 텐데…….’
찰나의 순간에도 떠오르는 수십 가지 생각 중 긍정적인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때, 일리아는 또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것.
그것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또 있다는 사실을.
‘……나를 사랑하는 것.’
“일리아, 괜찮아?”
“…….”
“일리아? 일리아?”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가왔다. 검을 거둔 채,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일리아는 그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가 매 순간 어떤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는지를 알고 있기에, 그것을 멈추면서까지 자신을 염려해 주는 모습에 더욱 깊은 감정을 느꼈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
전보다 더 자신을 잘 알게 됐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지만, 일리아는 조금 더 참기로 했다.
‘조금 더 나를 아껴 주자.’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자신이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른이 자신을 좋아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될 때까지.
그전까지는, 이 감정을 숨기자. 조금만 더 숨기자.
대신…….
“아이른.”
“응?”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어?”
“말 그대로야. 요즘 마주친 적도 별로 없었잖아?”
“그, 그렇지.”
“그래서 왔어. 보고 싶어서.”
“…….”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할까?”
“음…… 그럴까?”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이른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평소보다 훨씬 밝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일리아로서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은 아이른을 좋아하고.
아이른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전자를 밝힐 자신은 없지만, 후자까지 감출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속이는 행동을 점차 줄여나갈 것이다.
감정을 감추는 일도 이제는 그만둘 것이다.
더 자신 있게 행동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자. 쓸데없는 이들의 반응을 두려워해 ‘나 자신’을 숨기지 말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마음을 표현할 정도로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아이른 파레이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리아 린제이가 더욱 밝게 미소 지었다.
분주히 검을 나누는 둘을 밤하늘의 달만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