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04화 (204/388)

◈ 69. 의외의 만남 (3)

악마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며 모조리 부수고, 찢고, 파괴하는 타입.

다른 하나는 인간을 농락하고 기만하는 쪽에 취미를 두며, 전자보다 자기 안위에 민감한 타입.

광대 악마는 당연히 뒤쪽이었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스러지지도, 마계로 도망가지도 않고 인간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지독한 보신주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남쪽 대수림에서 깨어난 광대 악마가 생각했다.

그는 인간계를 사랑했다. 너무나도 사랑했다.

인간들이 자신의 손짓 하나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며 그 무엇보다 기꺼워하는 참된 악마였다.

크나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마계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인간계에서 부상을 회복하고, 인간계에서의 나날을 이어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우연히 은신처에 들어온, 씹어먹어도 모자랄 영웅 녀석들 때문에 자신은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결국 본체를 버린 후 더미(Dummy)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상황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검은 머리 여자…… 분명 신성왕국의 녀석이었지.’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 여자의 검에서 쏘아졌던 오러와 신성력이 자신의 몸을 꿰뚫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가.

그만큼 대단한 녀석이라면, 어쩌면 자신의 공격에도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가 살아남지 못했더라도 다른 인간이 신성왕국에 소식을 알린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성기사 병력이 대륙을 뒤질 것이고, 자신이 곳곳에 뿌린 더미들을 하나씩 박살 낼 터였다.

‘최선은 성기사들이 움직이기 전에 더미들을 회수해서 힘을 회복하는 거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광대 악마가 자신의 꼴을 살펴보았다.

1,500년 전에 갖고 놀았던 동료 악마의 시체로 만든 몸뚱이다 보니 여기저기 상한 곳이 많았다.

이런 몸뚱이로 대륙을 순회하며 힘을 모을 수는 없었다. 그전에 발각되어 ‘진짜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더미들을 완전히 해방하여, 제멋대로 날뛰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한다면 대륙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 꽉 닫혀 있던 차원의 틈이 벌어질 터다.

‘그 틈을 통해 마계로 돌아간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마기(魔氣)를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광대 악마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성적으로는 힘을 포기하는 것이, 인간계를 떠나 마계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허나 이곳에서 맛봤던 각별했던 추억이, 악마로서의 본능이 그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환희의 순간을 위해서 천 년의 세월을 참아 왔는데, 이를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광대 악마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

그러던 차에, 갑작스레 인간이 등장했다.

그것도 그냥 인간이 아니었다.

순백의 사제복과 목에 걸려 있는 장신구는 인간들의 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러나 광대 악마는 이 의문의 사제를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사내를 주시했고, 관찰했다.

때로는 지독한 마기를 내뿜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고개를 들이밀기도 하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저글링(Juggling)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인 광대 악마가 터벅터벅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가 말했다.

“그렇군. 자네도 악마였군.”

“그렇습니다.”

“나 말고도 몇몇 더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응, 으응. 그것도 그렇고, 보다시피 내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아서 말이야.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가슴도 아파. 응? 당연히 머리도 아프지! 아마 내 감각이 이상해진 건 그래서일 거야. 웃기지 않아? 동족도 못 알아보는 악마라니. 히히, 후흐히…….”

“…….”

“안 웃긴가? 나는 웃기던데.”

“웃음이 많은 성격은 아니어서요.”

“뭐, 그런 것 같네. 그래도 좋아. 적어도 날 해치러 이곳으로 온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펄쩍 의자에서 튀어 오른 광대 악마가 동료 악마를 격렬히 포옹했다. 그런데도 사제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놈, 정말로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건가?

가면 뒤에서 생각한 광대 악마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뭘 도와 달라는 거냐.”

“마계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뭐?”

“당신이 발각된 탓에 처지가 곤란해졌습니다. 곧 신성왕국이 대륙을 들쑤셔 놓을 텐데, 거기에 휩쓸려 나도 피해를 보게 생겼습니다.”

“…….”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지 마십시오. 마인들을 뿌리든, 직접 나서든, 신성왕국의 시선을 좀 끌어 주십시오. 내가 하는 일이 완성되기 전까지.”

“하, 참, 나!”

광대 악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 그가 이마를 짚고 뒤로 쓰러졌다.

그러자 흙먼지 대신 별 모양 이펙트가 터져 나왔다. 콰당! 과장된 효과음은 덤이었다.

분노? 짜증?

그런 감정은 들지도 않았다.

상대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을 이어 가다 보니, 절로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덕분이었다.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광대가 몸을 일으켰다.

사제 악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질문을 던졌다.

“솔직하게 말할게. 시선을 끌어 줄 수는 있어. 어차피 네 말대로 크게 놀아 볼 생각이었거든. 틈틈이 계약한 마인들도 뿌리고, 곳곳에 심어 놓은 더미들도 뿌리고.”

“다행입니다.”

“그 틈에 차원의 틈이 열리면, 나는 마계로 도망치고.”

“그건 별로군요. 사실 도움을 청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또 있다고? 그것도 네가 하는 일과 관련된 거야?”

“맞습니다. 인간을 하나 키우는 중입니다.”

“하…….”

광대 악마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사람 조련하는 일을 그보다 잘하는 악마는 없다. 천 년 전의 사내, 카렌 윈커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헛웃음을 터뜨린 건 사제 악마의 포부가 생각보다 훨씬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게 끝은 아닙니다.”

“음?”

“당신의 도움으로 피워 낸 꽃을 통해, 나는 이곳을 당신의 고향과 같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

이어지는 사제 악마의 말을 들은 뒤, 광대 악마는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네, 인간도 아닌데 망상증을 앓고 있구만.”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 옆쪽을 가리킨 채 빙빙 돌렸다.

인간 사회에 신화와 영웅 설화가 있듯, 악마들 사이에서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계를 혼란케 하는 건 가능하지만, 결코 멸망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이것은 전설처럼 떠도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엄연한 진실이다.

인간이 대륙을 망하게 할 수는 있어도, 악마가 대륙을 망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었다.

‘운명을 거부한 놈들은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

자신이 은신처에 들어가기 전에도 몇 있었고, 후에도 몇 있던 거로 기억한다. 대표적으로 마룡왕 녀석이 있었다.

과한 욕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하늘은 영웅을 내렸고, 악마는 야욕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리고 광대 악마는 그런 꼴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마 녀석 또한 이를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적당히 왕국 두어 개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인간들 사이를 이간질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는 수준이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계를 마계화(魔界化)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흥미가 사라진 광대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사제의 몸에서 검은 선 하나가 흘러나와서 광대의 가면으로 들어갔다.

“…….”

많은 것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자신만큼이나 속이 검은지, 사제 악마는 모든 것을 꼭꼭 숨긴 채 단 하나의 사실만을 알려 주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빙긋 미소를 지은 광대 악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서 그런 거였어. 내 감각이 망가진 게 아니라, 자네가 특별한 거였어. 당신의 고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알아차려야 했는데…….”

“…….”

“마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악마라……. 이거 아주 귀한 손님을 몰라봤구만! 으흐히히.”

광대 악마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모기처럼 손을 비비며 발을 동동 구르는 그에게서 어린아이와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미소를 지은 그가 인간처럼 악수를 청했다.

“히히히.”

덥석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린 광대 악마도 마주 손을 뻗었다.

* * *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자그마치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가 매일 같이 자신과 지도 대련을 해 주고 있다.

사실, 지도 대련이라기에는 굉장히 험하고 사나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어찌 됐건 아이른은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러니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라…….’

조슈아 린제이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의 검을 떠올렸다.

하늘검은 정말로 독특했다. 그야말로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검술이었다.

친구인 일리아 린제이의 검술이 폭풍처럼 사납고 매섭긴 했지만, 조슈아처럼 제대로 바람을 다루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를 이겨 먹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싸우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서 되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조슈아의 검은 그 정도로 강했다.

근거리에선 집요한 바람으로 자세와 타격점을 흐트러뜨리고, 원거리에선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검풍(劍風)으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종일이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아이른이었지만, 조슈아와 대련을 하다 보면 30분도 되지 않아 지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오늘은 그럴 생각 없었다.

‘이번에는 한 시간 이상 버텨 보자!’

후, 하고 숨을 뱉은 아이른이 고개를 들어 앞을 살폈다.

고민을 이어 가다 보니, 어느새 약속한 장소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연무장의 중앙에 서 있을 조슈아 린제이를 생각하며, 그가 대검을 소환했다.

허나 그것이 전부였다. 차마 그를 향해 다가갈 수는 없었다.

“…….”

선객이 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어느새 부상에서 회복한 그녀가.

칼 린제이를 좌절에 빠뜨렸던 대륙 최고의 천재가.

전 세대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던 조슈아 린제이를 향해 사나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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