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너로는 무리다 (3)
“……?”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의 말을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물론 지금의 자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격을 준비했다.
실전이라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무한대의 준비 시간이 갖춰졌기에 가능한 200%의 힘을 끌어낸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패배를 언급할 정도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검술로만 따지면 카라쿰보다도 강한 느낌이야.’
마주 서니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오러의 총량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정신과 세월이 흐른 가운데도 극한으로 단련된 육신, 경험과 연륜에 따라 완벽하게 운용되고 있는 오러.
거기에 더해 신성력으로 추측되는 미증유의 힘이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 정도로 항복을 선언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른의 눈빛을 읽었음인가.
검을 내려놓은 퀸시 마이어스가 이유를 설명했다.
“혹시라도 부상을 입을까 해서다.”
“……저 말입니까?”
“아니, 당연히 나지.”
“……?”
“네 공격, 받아 내지 못할 거야 없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 아무리 방어에 치중한다 해도 몸이 상하는 건 피할 수 없을 거야. 물론 막아 내기만 하면 내가 이기겠지만…….”
잠시 뜸을 들인 퀸시 마이어스가 말을 이었다.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신의 명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생기지 않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이지만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자신은 개인의 욕심에 휩쓸려 뒷일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에 비해, 퀸시 마이어스는 악마 토벌과 대륙의 평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비로소 깨달았다.
한 가지 길만 걸을 필요는 없다.
영웅의 길을 걸으며, 동시에 검사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거다.
오히려 그런 욕심이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거라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물론 퀸시 마이어스는 그런 그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다.
뒤를 돌아본 그가 다른 소드마스터들, 율리우스 휼과 정화단의 멤버들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이 정도면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괜찮은데.”
“괜찮은 수준이 아니지.”
“23살이랬나? 이건 뭐…… 나는 그 나이에 뭐 하고 있었지?”
“기억도 안 나. 거의 100년 전인걸.”
“제가 나이를 먹긴 했어도 선배님만큼은 아닙니다. 기억은 나요.”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섭섭한 말을…….”
“아니, 이 영감들은 꼭 쓸데없는 이야기로 새네.”
순식간에 저잣거리처럼 시끄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좋게 말하면 정겨운 느낌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책맞아 보였다.
위엄 있는 성기사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아이른과 루루, 일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정화단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허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보다 수십 살, 혹은 100살 가까이 젊으면서도 모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자.
현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조용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기엔 이르지 않습니까?”
“음? 그게 무슨…….”
“이 자리를 찾은 이는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아닙니다.”
이그넷의 한 곳을 주시했다.
그에 따라 정화단의 시선 역시 같은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잊고 있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 린제이.
조용히 서 있던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 흑기사단장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격을 갖췄다면, 일리아 린제이 역시 자격을 갖췄다고 봐야 마땅합니다.”
“…….”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후욱!
강렬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아이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님에도 강풍이 스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로 성기사들의 눈빛은 진하고, 매서웠다.
생각지도 못한 이그넷의 추천.
예상치도 못한 분위기의 변화.
그 속에서도 일리아 린제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아니,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허나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봐 온 아이른과 루루는 알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 내부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일리아 린제이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표정은 끝내 무너지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몇몇은 그녀의 눈을 통해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뭐지? 왜 저래?”
“우리가 뭐 실수했나?”
“너무 빤히 쳐다봐서 그런가…….”
“아, 알겠구만. 저 처자, 그…….”
“어? 아아, 그렇군.”
또다시 소란스러워진 정화단.
허나 이번에는 금방 결론을 찾았다. 이그넷과 린제이 가문 사이에 얽힌 일을 뒤늦게나마 떠올린 덕분이었다.
어찌 보면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자.
그의 인정과 호의를 받았을 때, 과연 어떠한 감정이 피어날 것인가?
“복잡하구만, 복잡해.”
“그러게 말이야.”
하나둘씩 고개를 젓는 성기사들.
아이른 파레이라와 루루는 그런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저 멀리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일리아의 뒷모습만 계속해서 바라봤다.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요술사였지만,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근의 일리아는 그들조차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단단한 모습이었지.’
라바트에 당도하기 전의 고민과 불안, 걱정을 전부 날려 버린 듯 당당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에도 당찬 태도를 보이고, 이그넷의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할 말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른과 루루는 생각했다.
일리아에 대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툭툭 떨치고 일어났다고.
……이제야 알았다.
일리아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것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가 자리를 뜨기 전에 보인 무너지기 직전의 표정처럼, 속에서 휘몰아치는 파도를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론으로 돌아가지.”
아이른 파레이라의 상념이 끊겼다. 정화단 노인들의 수다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도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신성왕국의 최강자, 율리우스 휼의 짧은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든 살 노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강건한 기세에 아이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벌대의 참여는 불허한다. 이유는 실력 부족이다.”
“…….”
“가능성은 충분하다. 허나, 토벌대는 가능성만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율리우스 휼은 짧은 말로 아이른을 돌려세우는 대신, 비교적 정성을 들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그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판단은 이러했다.
악마의 발호가 대륙에 퍼지는 것 자체가 거대한 혼란을 불러오고, 그로 인해 마계의 틈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적은 인원으로 토벌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소수의 인원에 포함되기에, 아이른의 실력은 한참 손색이 있다는 점.
여기까지 설명한 율리우스 휼을 대신해 퀸시 마이어스가 말을 이어받았다.
“맞는 말이지. 혹 인원을 늘리거나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네 차례까지 돌아갈 일은 없다. 북서부의 카라쿰, 서부의 5대 검술명가, 룬텔 왕국의 3가주…… 그런 이들을 포섭하는 게 이치에 맞지.”
“…….”
“어떠냐. 납득할 수 있겠느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강했다.
세상에 100명밖에 없는 소드마스터의 일원이었고, 오행신공을 비롯한 수많은 능력을 각성했다.
더욱 강해질 자신도, 절대 꺾이지 않을 의지도 있었다.
아마 마인이나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이었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대 악마를 상대로도 그럴 수 있냐 묻는다면.
자신보다 더 적합한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면, 결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더 강해진다면.”
“…….”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면. 광대 악마의, 혹은 다른 악마의 사악한 힘에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기른다면…….”
후우, 한 번 숨을 가다듬은 아이른이 힘주어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때는, 토벌대의 일원으로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네가 그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후우욱-!
율리우스 휼이 말했다. 그와 함께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빈틈없는 기도가 아이른의 몸을 옥죄었다.
곁에 있는 루루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젊은 영웅은 물러서지 않았다.
강렬한 시선으로, 천 마디의 말보다 무거운 눈빛으로 신성왕국 최강의 검사를 바라보는 아이른을 보며 정화단이 침묵을 지켰고, 이그넷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를 1분.
잠깐 사이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땀에 절은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율리우스 휼이 말했다.
“쿤.”
“…….”
“쿤을 찾아라. 그의 인정을 받아 온다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
* * *
빠르게. 더 빠르게.
급기야는 걷는 것이 아니라 달리면서, 점점 더 멀어지던 일리아 린제이가 낯선 공터에 멈춰 섰다.
이유?
말할 것도 없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말을 떠올린 그녀가 그보다 더 이전, 연회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지.’
아직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황금색 포탈에서 나온, 여전히 태양처럼 뜨거운 기운을 뿌려대는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아이른 파레이라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의 옆에 있는 아이른만이 유일한 대적자인 것처럼.
그것을 보며 느꼈다.
자신이 품어 왔던 분노와 불안, 질시와 집착은 일방적인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일리아 린제이는, 평생토록 마음에 품었던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가슴에서 지우기로 했다.
‘할 수 있어. 오히려 훨씬 편할 거야. 이게 맞아.’
연회장의 다른 귀족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던 때를 떠올렸다.
걱정하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참고 참았던 감정이 배출되며, 시원하고 개운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 찾아온 자유로움, 그 해방감.
이그넷에 대한 모든 감정을 내려놓는 순간, 그 짜릿함이 또 한 번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러지 못했어.’
하아, 하아.
숨이 거칠어졌다.
왠지 모르게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주변을 살핀 일리아가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웅!
알고 있었다.
이그넷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 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후우웅!
던전의 첫 시련을 돌파한 것도, 두 번째로 찾아온 결계를 뚫어 낸 것도.
전부 이그넷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더는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도록 최선의 최선을 다했다.
잠시간 찾아왔던,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불꽃이 평소 이상의 힘을 이끌었다.
후우우웅-!
그러면서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자신에게 있어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없앴고, 목소리의 떨림을 없앴다.
존중도, 시선도, 이그넷에게 향하는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랬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감정을 지워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우우우웅-!
잊자. 모두 잊자. 잊어버려야만 한다.
세차게 고개를 흔든 일리아가 심검을 뿜어냈다. 이그넷에게 배운 능력이라는 생각은 애써 무시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녀를 의식하는 셈이니까. 자신은 그저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아니, 사실 이그넷의 도움으로 얻은 능력이라 보기도 힘들었다.
그녀가 품은 마음의 검은 어디까지나 아이른 파레이라로 인한 검이었으니까.
세상을 지켜 내겠다는 거창한 마음은 없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지켜 내겠다는 마음만으로도 능력을 각성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이것은 이그넷이 아닌 아이른의 도움으로 만들어 낸 검이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 역시 일리아의 번뇌를 완전히 지워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여전히 이그넷을 의식하고 있잖아. 여전히 아이른에게 도움만 받고 있잖아.’
‘나 스스로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걸까? 그런 걸까? 과거처럼, 지금처럼, 나중에도 누군가에 종속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인 걸까?’
후우우웅-!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더욱 사나워졌다. 검에서 흘러나온 상념이 바람을 일으켰고, 폭풍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오러에 녹아들었던 마음의 검 역시 이리저리 흔들렸다.
검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 주변을 좀먹어 갔다.
오랫동안 참아온 것의 반동인 양,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이 허공을 찢어발기고 대지를 할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멈추게 한 건, 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일리아.”
오랫동안 듣지 못한.
허나 그 무엇보다 낯익고, 따스하고, 포근한 목소리.
일리아의 감정이 가라앉았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그래, 내 딸.”
사납고 차가운 인상.
허나 이를 덮어 버릴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중년의 사내.
아단 왕국 최고의 검사, 조슈아 린제이가 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