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00화 (200/388)

◈ 68. 너로는 무리다 (2)

회의장에서 벗어나 연무장으로 향하는 일단의 무리.

가장 앞에는 제안을 건넸던 대머리 노인이, 그 뒤에는 아이른 일행이, 마지막으로 율리우스 휼과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비롯한 나머지가 뒤따랐다.

기분이 묘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대륙에 나온 이후, 이런 일을 꽤나 많이 겪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실력 증명이라…….’

그가 옛 일을 떠올렸다.

용병패를 받기 위해 마도구 측정을 했을 때.

파르티잔에 방문해 하이람 관주, 그리고 제트 프로스트와 대련을 했을 때.

아이젠마르크트 증명의 땅에서 숱한 검투를 치렀을 때.

그 외에도 자잘한 일들이 많았다. 아닌 적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 대부분은 사람들의 무시로 시작되었다.

자신은 겉으로 실력이 티가 덜 나는 유형이었으니까. 아마 비교적 어린 외모도 한몫했을 터다.

‘이 사람들은 달라.’

허나 지금 연무장으로 향하는 신성왕국의 인물들은 달랐다.

뒤의 인물들, 자신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허나 무시의 눈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전에 무슨 말을 들었든,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모조리 배제하고 직접 실력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이 엿보였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대머리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어린애 객기를 꺾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느낌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능력을 판가름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하겠다는 태도.

아이른은 눈앞의 노인이 정말로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지?’

“저 할아버지, 아는 사람이야?”

“……잘 몰라.”

그러한 의문은 루루도, 일리아 린제이도 똑같이 갖고 있었다.

검을 뽑은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풍기는 기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사람, 아버지와 비슷한 실력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대륙 10대 검사와 맞먹는 강자라니!

순간 적기사단장 리고베르토 클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리아가 알기로 그는 대머리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뒤에 따라오고 있는, 최소 소드마스터로 추측되는 인물들 역시 그녀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아들아, 신성왕국의 저력은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

문득, 과거에 아버지와 오빠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났다.

신성왕국의 대륙 전체에 대한 개입이 점차 강해지자 여러 사람이 불만을 쏟아내던 분위기였다.

오빠인 칼 린제이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빌리우스가 최강국이라 한들, 그 정도로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소드마스터의 수만 봐도 그랬다. 서부 5왕국의 소드마스터 수는 평균 5명. 반면 아빌리우스는 10명이 채 안 됐다.

물론 사제를 비롯한 다른 전력들도 대단하지만, 기사만 비교하자면 5왕국 연합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힘.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듯 반응하던 아버지 조슈아 린제이를 떠올리며, 일리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었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신성왕국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 이그넷 크레센시아조차 특출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쯤에서 할까?”

연무장의 가운데에 선 대머리 노인이 말했다. 사람을 물린 탓인지 그들을 제외하곤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물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존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대머리 노인이 뒤를 쳐다봤다. 율리우스 휼의 동의를 구하는 느낌이었다.

백기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금 고개를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퀸시 마이어스다.”

“…….”

“입이 무거울 거로 생각해서 알려 주는 것이니, 다른 데 발설하지는 마라.”

“……예.”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일리아 린제이도 마찬가지였다.

루루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를 바라보다가 옆에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적기사단의 전대 단장이야.”

“그래? 근데 그게 왜?”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거든…… 이제 알겠어.”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열 명의 소드마스터들이 누구인지. 어찌하여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들 전부가 이미 세상을 등졌다고 알려진, 전대의 성기사들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아이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힘내, 아이른.’

물론 지금의 아이른은 친구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 루루의 육성 응원조차 듣지 못했다.

그 정도로 집중했다. 전대 적기사단장인 퀸시 마이어스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신성왕국 인원들 전부를 눈에 담고 있었다.

‘대단해.’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나아짐에 따라 안목도 높아졌고, 오러를 보는 눈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예전에는 오러의 총량만을 볼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집중력을 최고조로 높였을 때는 상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오러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마음만 먹으면 해일처럼 강력한 힘이 몰아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는 깨달았다.

자신의 실력은, 신성왕국이 생각하는 토벌대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선공 한 번은 양보하마.”

퀸시 마이어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이른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검. 건장한 체격만큼이나 묵직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땀 한 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예, 짧게 대답한 아이른이 대검을 소환했다.

“흐음.”

“오오.”

“저것이…….”

손잡이부터 검 날까지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는 검.

범상치 않음을 느꼈음인가, 성기사들 사이에서 옅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지금의 아이른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인 퀸시 마이어스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여전히 태양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강력하고 위대한 성기사들 사이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이른은 자신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놈…….”

우우우우웅-!

퀸시 마이어스가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아이른의 검에서 불쑥 오러 소드가 솟아났다.

검과 똑같은 황금색의 오러.

그 영롱한 모습에,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던 것을 타박하려던 전대 적기사단장이 입을 다물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신을 모시는 몸이지만, 검에 바친 세월도 적지 않다.

검을 통해 전해질 의지를 느끼기 위해, 퀸시 마이어스가 단단하게 중단세를 취했다.

“후우.”

그런 그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이른이 숨을 골랐다.

선공을 양보받은 건 큰 이득이었다.

실전에서 다루기 힘든 기술도 충분한 준비 시간이 있다면 발휘할 수 있다.

101번째 검사, 제트 프로스트와의 첫 대련을 떠올린 그가 정신을 집중했다.

육체.

오러.

전생의 마음.

현생의 마음.

그로 인한 강철과 불꽃.

그리고 불꽃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 줄 또 하나의 불꽃.

그 모든 것을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비로소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 * *

우우우우웅-!

“으음.”

“대단하긴 하군.”

“이제 23살이라고 했나?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 만하긴 해.”

금발 청년의 검에서 오러 소드가 피어오른 순간, 10명의 정화단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직에서 은퇴한 이들은 대부분 기도를 하며 여생을 보내거나, 신의 뜻을 전파하기 위한 여행길에 나선다.

허나 몇몇 기사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속세를 떠나 조용히 검을 수련하거나, 정체를 감춘 채 대륙을 떠돌며 악을 멸한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성왕(聖王)의 명령조차 듣지 않고 제2의 삶을 이어 나간다.

그런 그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사건.

악마의 발호.

그것이 바로 10명의 소드마스터, 신성왕국 ‘정화단’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재능에 비교적 덜 놀라는 이유였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연륜과 경험이 그들을 평정케 만들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단련된 몸.

그런 육체보다도 더욱 인상적인,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한 오러.

정화단 멤버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저 청년이 단순히 명예나 사리사욕을 위해 토벌대에 지원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대륙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착실히 성장한다면 대륙에 큰 힘이 되겠어.’

‘훌륭하다. 왕국으로 포섭하고 싶을 정도야.’

‘저런 아이가 신의 검으로서 활약하며 이그넷의 뒤를 받쳐 준다면, 안심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입뿐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물론 집중을 흩트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아이른을 지켜보며, 곧 터져 나올 검격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이 갖춰진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이었다.

퍼어어엉-!

“……!”

“……!”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기운이 피어났다.

평범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묘한 힘이 황금의 오러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것이 영웅의 검이라는 것을 알아챈 정화단 한 명이 이그넷을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가르친 바 있다고 말한 적이 있나이다.”

“……3주 동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런…….”

지이이잉-!

대화가 끊어졌다. 질문을 던지던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더욱 크게 눈을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몇은 인상은 잔뜩 쓴 채, 오러 소드와 영웅의 검 위에 또다시 덮인 기운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이 입을 열었다.

“오행신공.”

“오행신공? 아…….”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정령의 기운…… 그중에서도 철의 기운, 불의 기운이 깃들고 있군요. 금기(金氣)는 이미 완성된 상태입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율리우스 휼은 입을 다물었다.

금발의 청년을 주시하는 그의 눈 역시, 다른 이들처럼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정화단의 멤버도, 자신 앞의 퀸시 마이어스도,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도.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시야에서 지워 버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여전히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생의 수련을 통해 강철의 의지를 세웠고.

현생의 여정을 통해 불꽃의 신념을 품었다. 세상을 향한 수호 의지와 선의, 그것은 지금의 아이른을 나아가게 만드는 근원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길만이, 나라는 인간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어!’

화르르륵-!

아이른의 마음속에 또 다른 불꽃이 피어났다.

아니, 새로이 피어난 건 아니었다. 원래부터 존재했을 조그마한 불씨가 그의 마음을 먹고 점차 크기를 불려 갔다.

영웅의 길을 걷는 데 남과의 비교는 필요 없다.

맞는 말이었다. 누구든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누구든 세상을 위해 움직일 수 있었다.

옳은 길을 걷는 데 있어서 타인과의 경쟁은 하등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른은 영웅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

예전과 달리 그는 진심으로 검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의지로 가득 차 있는…….

그야말로 ‘진짜 검사’가 되어 있었다.

화르르르륵-!

그 검사의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뒤처지고 싶지 않다.

같은 위치에 서고 싶다. 이그넷이 합류한 토벌대에 자신 역시 참여하고 싶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녀조차 놀랄 정도의 경지를 이뤄, 제대로 된 싸움 끝에 승리를 따내고 싶다.

검사로서의 승부욕.

그야말로 영웅의 신념에 필적할 정도로 뜨거운 마음이, 아이른의 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퍼어어어엉-!

폭발이 일었다. 퀸시 마이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후욱 밀려오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허나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눈앞의 청년이 들고 있는 검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완성된 강철.

완성된 불꽃.

아니, 완성 이상의 불꽃을 검에 두른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을 보며, 전대 적기사단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어도 공격이 시작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가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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