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알 것 같구나 (2)
악마는 끔찍한 존재다.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악의를 품고 있으며, 소드마스터조차 상회하는 무시무시한 힘 또한 갖추고 있다.
몬스터와 달리 지능이 높고 교활하기까지 한 녀석들이라 몰아세우기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죽이고 나서도 끝이 아니다.
사후 저주.
과거 수많은 이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육신을 갉아먹었던, 고위 악마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추악하고 역겨운 능력.
탐사대가 던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광대 악마가 죽으면서 남긴 결계가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고, 끊임없이 마기를 뿜어냈다.
공략 초기에 밀어닥쳤던 의심, 불안, 미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았다.
‘넓고, 진하고, 지독하구나.’
휘익, 손을 휘둘러 정신 공격을 흩어 버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고 한들, 대 아빌리우스의 기사단장에 오른 자신이다.
그런 자신조차 짜증이 날 정도로 진한 마기라면, 평범한 탐사대원들은 순식간에 미쳐 버리거나 마음이 타락해야 정상이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간이 침상에 누운 그녀가 몸에 힘을 줬다. 신음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참았다.
옆에 대기하던 아냐가 허리춤에 양손을 얹으며 말했다.
“대장!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괜찮다. 이 정도는.”
“어휴, 고집쟁이!”
“몰랐느냐. 나는 원래 고집이 세다.”
짧게 대꾸한 이그넷이 결국 완전히 상체를 세웠다.
비로소 넓어진 시야 속에서, 그녀가 던전의 풍경을 이곳저곳 바라보았다.
“뭐야, 아미라! 잘하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나?”
“아니,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왜? 이만한 실력이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게 맞지 않나? 으음, 그런데 검술보다 십자수 실력이 더 뛰어난 건 직무유기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십자수에 매진하는 아미라 쉘튼, 그런 그녀를 놀려 대는 그레고리 그리핀.
“우와! 또 해 줘! 또 해 줘!”
“아니, 이거 은근히 체력 소모가 심한 거라 계속하기에는…….”
“그럼 이거 줄게. 한 번만 더 보여 줘.”
“크흠, 하지만 이 정도로 지친다면 중부 최고의 마법사라는 칭호는 떼야겠지.”
거절할 수 없는 액수를 건네는 고양이 루루, 자본에 패배해 또다시 환영 마법을 선보이는 페리 마르티네스.
그 밖에도 곳곳에 퍼져 있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주에 저항하고 있었다.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든, 검을 휘두르든, 간단한 취미 활동을 하든.
어떻게든 심연으로 가라앉으려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방향이야 올바르지만, 고작 이 정도의 대처로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악마의 저주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당장 그보다 훨씬 약한 함정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게 탐사대의 수준 아니었던가.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존재가 결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으니.
‘……아이른 파레이라.’
황금의 기운을 뿌리고 있는 젊은 소드마스터.
그를 바라보는 이그넷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사실, 이제 와서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이제는 알았다. 왜 자신이 악마의 자폭 공격에 몸을 날렸는지.
전부 저놈을 믿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이라면 충분히 이 상황을 이끌 수 있다고, 악마의 저주로부터 탐사대를 지켜 낼 능력이 있다고 직감했기에 그랬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른은 깐깐한 자신조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러의 발현. 그리고 의지의 확산…… 놀랍구나. 동시에 황당하구나.’
이그넷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과거의 아이른 파레이라를 떠올렸다.
분명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고작 1년 반 전에 만났던 녀석은 제대로 된 주관조차 없이, 알 수 없는 존재의 강철 같은 의지에 휩쓸려 이리저리 헤매는 중이었다.
그렇다.
마스터가 된 것은 하나도 놀랍지 않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거야 검술을 겪어 본 순간 알았으니까.
하지만 드세기 그지없던 쇳덩이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진하고 깊은 뜻을……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키워 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회상을 끝낸 이그넷이 다시금 아이른을 쳐다봤다.
아이른만 주시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고양이도, 그 옆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일리아 린제이의 얼굴도 함께 눈에 담았다.
생각해 보면 저 녀석들도 언제부턴가 눈에 밟혔다.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던 능력 때문에?
물론 그 이유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그넷이 집중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두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고양이를 자세히 살폈다.
각각 떨어뜨려서가 아니라 셋을 함께 놓고 파악했다.
여러 가지 것이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
믿음에서 비롯된 긍정적인 에너지.
그로 인해 시작되고 뻗어 가는, 안목이 좋은 이그넷으로서도 전부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놀라운 변화.
이 시대 최고의 재능이 끊임없이 그들을 주시했다. 파헤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습관이야말로 이그넷을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가장 큰 장점이었다.
크로노의 주인도, 왕국의 백기사단장도, 그 밖의 다른 강자들도 그녀에게 도둑맞은 것들이 꽤 많았다.
“…….”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에 따라 날카롭던 이그넷의 눈매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원하는 바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상의 고통이 정신력을 흩트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득 과거가 떠올랐다.
원대한 꿈도, 단단한 검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
이제는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옛 친구들과 함께 빈민가를 쏘다니던 때가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꽤 즐거워 보였다.
……당시의 추억이 즐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저들 셋이 서로를 향해 웃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덧 20대의 끝자락이 된 흑발의 검사는 하염없이, 오랫동안 아이른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게오르그! 게오르그!”
“왜!”
“대장 좀 말려!”
“내가 말린다고 되겠냐. 그리고 언제까지 대장이라고 부를래. 이제 단장님이야.”
“몰라! 대장은 대장이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아냐를 바라보며 게오르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단장의 상태가 최악이라는 것.
단순한 외상이라면 사제의 힘으로 곧바로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대 악마의 마기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에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가 힘들었다.
‘단장이니까 목숨줄 잡고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루도 못 버텼어.’
여기까지 생각한 게오르그가 슬쩍 이그넷 쪽을 쳐다봤다.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녀가 제대로 쉴 생각을 안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무리해서 침상에서 일어난다거나, 검을 휘두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바르게 앉은 자세로 탐사대를, 그중에서도 주로 아이른 일행을 구경하고 있는 정도였다.
허나 그것 역시 염려되는 행동인 건 맞았다.
24시간 내내 잠을 자도 모자란 마당에 자꾸만 깨어 있으려고 하니, 아냐의 걱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그였다.
하지만…….
‘이럴 때의 단장은 절대로 방해하면 안 된단 말이지.’
게오르그가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의 이그넷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모습으로 며칠을 보낸 뒤, 자신의 방에 칩거한다. 혹은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르고, 새로이 나타나는 단장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여 주곤 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터였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뭘 보고 영감을 얻는 건지 범재인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게오르그는 이그넷을 믿었다.
단장은 자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자신은 단장을 믿었다.
그녀는 이겨 낼 것이다.
사제의 신성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부상?
상관없었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보란 듯이 부상을 떨치고 일어나, 기적처럼 결계를 박살 내 버릴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대 악마들만큼이나 무지막지한 녀석이었지만, 그런 존재의 사후 저주조차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게오르그 포이베가 다시금 단장을 바라봤다.
어느새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그넷이 말했다.
“왜 웃느냐.”
“그냥요.”
“야한 생각이라도 한 것이냐?”
“무슨 그런 말씀을. 단장 생각을 했습니다.”
“날 상대로 추잡한 생각을 했다는 뜻인가?”
“아니, 그건 받아주기 힘든 농담인데요…….”
“나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냐? 포부가 크구나.”
“……많이 회복하셨군요.”
게오르그 포이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골골대는 모습이긴 했지만, 적어도 목소리에서만큼은 여유가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안색 역시 이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훨씬 빠른 회복이었다.
‘그리고 뭔가…….’
조금이지만, 눈빛이 따뜻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단장이 무뚝뚝한 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용병 시절의 영향으로 실없는 농담도 종종 던지고, 수하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의 분위기를 위해서일 뿐.
10년 넘게 함께한 자신조차 쉽게 넘어서기 힘든 벽이, 선이 언제나 존재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래, 꽤 나아졌노라.”
“아,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상념이 끊어졌다. 단장의 말을 들은 게오르그가 진심 어린 미소를 보였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도 아냐가 열심히 허드렛일을 해서 번 요술 저금통으로 충당하고 있었고, 가득 들어찬 마기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타락하지 않았다.
아이른도 아이른이지만, 놀랍게도 아미라 쉘튼의 십자수가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던전 구석에는 수십 명의 남정네가 찍어낸 화려한 작업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아니, 조금은 아닌가? 하여튼 버텨 내다 보면, 단장이 어떻게든 몸을 회복해 내고, 그러면 탈출도 가능할 거야. 충분히 가능해.’
게오르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남들이 보기엔 나른해 보이는 눈망울에도 이그넷에 대한 적지 않은 신뢰가 담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장이 타인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은 단장을 믿었다.
헌데, 그녀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탈출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겠다고요?”
“그래. 지금 내 상태로는 조금 벅차구나. 도움이 필요하다.”
게오르그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함께 있던 아냐 마르타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심히 십자수에 매진하던 흑기사단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장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가, 누군가를 신뢰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자신이 모든 일에 앞장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그런 단장이…….’
‘탈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어떻게?’
‘단장 말고 이 결계를 뚫어 낼 자가 있긴 한가?’
흑기사단원들의 눈빛에 의문이 서렸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탐사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2번째로 강력한 성기사인 게오르그 포이베조차 역부족인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광대 악마의 사후 저주를 뚫어 낼 수 있는가?
세비온 브룩스?
페리 마르티네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누구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악마의 저주를 깨뜨리는 데 있어서 신성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점은 엄청난 마이너스였으니까.
“신성력이 없어도 괜찮다. 애초에 함부로 외인에게 가르칠 수도 없지.”
“…….”
“하지만 온전히 나의 것을 전하는 거라면 문제없을 터.”
그런 좌중의 생각을 읽었음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나직이 읊조렸다.
후우, 한 차례 숨을 내쉰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후우웅-!
정상 컨디션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동작.
허나 강자들은 느꼈다. 이그넷의 검에 무언가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음을.
그리고 동시에 떠올렸다.
최연소 소드마스터라고는 하나, 비천하기 그지없던 출신의 그녀가 단번에 아빌리우스의 백작위를 받아 낼 수 있었던 이유.
후우웅!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 전에도, 나의 검은 능히 어둠을 베었다.”
한 번 더 검을 휘두른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를 쳐다봤다.
못 박힌 듯 굳은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둘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나머지 강자들에게도 한 번씩 시선을 던진 뒤 이어 말했다.
“나의 검술, 원한다면 알려 주도록 하지.”
“…….”
악을 멸하는 근원을 품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비전 검술.
뜻밖의 제안을 들은 검사들의 눈에 뜨거운 불꽃이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