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95화 (195/388)

◈ 66. 알 것 같구나 (1)

앞이 보이지 않는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후각도, 그 밖의 다른 감각들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예상보다 충격이 훨씬 컸던 모양이다.

하긴, 그 기분 나쁜 녀석은 신성왕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대 악마들만큼이나 끔찍한 녀석이었으니까.

‘하사받은 흉갑이 없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 고통조차 맛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자신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됐다. 왕국을 세우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그렇고 말고. 여기서 끝나 버리기엔 나라는 사람이 너무 아깝노라.’

차라리 잘됐다.

30년에 가까운 인생을 한시도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왔던 자신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양껏 즐기기로 작정하고 모든 생각을 비웠다.

눈을 감으려는 노력도, 웃음을 지으려는 생각도 모두 비워 버렸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無)의 공간 속에서, 이그넷은 모든 불안과 걱정을 날려 버린 채 조용히 존재하기만 했다.

허나 그러한 여유는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찾아온 낯익은 풍경에, 이그넷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마등인가?’

유령처럼 둥둥 떠 있는 자신을 확인한 그녀가 앞을 바라봤다.

어렸을 적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곁에 없는 친구들도 보였다.

다 쓰러져 가는 빈민가의 폐가에서, 10살짜리 이그넷이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좋아! 잭 할아버지한테도 일감을 따 왔고, 루크 아저씨네 대장간에서도 이것저것 말해 놨어. 앞으로는 벌이가 훨씬 더 괜찮아질 거야.’

‘그럼 이제 하루에 두 끼 먹어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세 끼도 먹을 수 있도록 해 줄게.’

‘와아! 이그넷 최고!’

‘언니 좋아! 나도 조금만 더 크면 도와줄게!’

자신의 호언장담에 기쁜 얼굴로 반응하는 다섯 아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때에 은은한 그리움이 느껴졌지만, 이그넷은 웃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과거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풍경이 바뀌었다.

이제는 열 명이 넘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가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도 보였다.

허나 13살의 이그넷은 울지 않았다.

단호한 표정의 자신이 입을 열었다.

‘1년만 기다려. 순식간에 강해져서 돌아올 테니까. 아껴 쓰면 그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안 가면 안 돼?’

‘안 돼. 금방 돌아올게.’

‘…….’

작별인사와 함께 몸을 돌렸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어린 이그넷의 품에는 무명의 검사에게서 받은 크로노 검술관 추천장이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친구들, 동생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계속된 내전 속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감은 점점 떨어져 갔다.

구걸하러 내보낼 수도 없었다. 삭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쿠퍼 몇 닢도 아닌 발길질뿐.

일머리가 있는 자신이야 여전히 벌이를 할 수 있었지만, 혼자서 모두를 챙기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그것이 이그넷이 크로노 검술관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정식 수련생까지는 필요 없어. 1년 만에 강해져서 돌아온다.’

혼란스러운 마칸 왕국의 틈바구니, 그 속에서 아이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유능한 검사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 모두를 먹여 살릴 만큼 큰돈을 벌 수 있다.

이그넷이 마지막으로 폐가를 돌아봤다. 여전히 울상인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을 거야. 1년 버틸 정도의 돈은 있으니까.’

모은 돈 전부를 놓고 가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3살의 이그넷은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이그넷은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다.

온전히 14살의 이그넷이 된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찾았다.

예전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정도의 재능은 이그넷을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로 이끌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열 명이 아니라 스무 명, 서른 명의 아이들도 책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1년 만에 돌아온 폐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좋지 않은 생각도, 그보다 더 좋지 않은 생각도 계속해서 피어나 이그넷을 괴롭혔다.

물론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소식을 수소문했고, 늦게나마 아이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굳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살아 있었다.

허나 살아 있는 아이들도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구걸을 할지언정 도둑질은 하지 않았던 누군가는 도둑 길드의 새 식구가 되어 있었고.

얻어맞더라도 남을 때리지는 않았던 누군가는 예전의 동생들을 걷어차며 코 묻은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동생들에게서도 예전의 순수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이그넷은, 결국 옛 인연을 만나는 걸 포기하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크로노 검술관에서 만났던, 허나 재능이 부족해 탈락해 버린 평민 친구들에게 새로이 손을 내밀었다.

‘용병대를 만들 거야.’

옛 친구들이 마냥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더 괜찮은 터전에서 시작했더라면, 조금 더 평범한 환경에서 살아갔더라면 비뚤어지지 않았을 녀석들이다.

그렇다. 감당하기 힘든 괴로운 삶이 그들을 나락으로 내몬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면 된다.

탐욕스러운 녀석들을 벌하고, 쓰레기 같은 녀석들을 치운다.

그리하여 살 만한 세상을 만들면, 더는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만들 용병대는 이를 위한 용병대였다.

‘좋아.’

‘이그넷, 네 실력이라면 당연히 함께해야지.’

‘하하, 벌써 기대되는데? 우리 엄청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대부분의 동기들이 합류했다. 그들 외에도 괜찮은 녀석들이 모여들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옛 친구들보다 훨씬 유능한 이들이었다. 14살 이그넷의 가슴에 기대감이 들어찼다.

이들과 함께라면, 더 괜찮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 때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였다.

* * *

‘안 가.’

‘…….’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잔뜩인 곳을 뭐 하러 가? 명예? 그런 거 필요 없어.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대장, 축하해. 하지만 우리는 그냥 용병대에 남을게. 우리 깜냥으로 기사단, 그것도 신성왕국의 기사단원이 되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뭐 대장이 빠지면 옛날만큼 벌이가 좋진 않겠지만, 이미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까.’

24살, 대륙에서 100명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가 된 이그넷의 부탁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담담한 거절이었다.

허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대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이그넷이 이렇게 대답했다.

‘잘 먹고 잘살아라.’

언제부턴가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의뢰의 성격보다는 돈의 액수가 더 중요했다. 용병대의 초기 목표보다는 실리와 안전에 훨씬 민감했다.

태생부터 용병인 듯 수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 이그넷의 신념과 뜻은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이 만든 용병대를 나온 이그넷이 조용히 생각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어린 시절의 인연들이 비뚤어진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함께했던 동료들이 현생에 안주한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젊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린 나이지만 이미 깨달았다.

큰 이상을 품은 사람도,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사람도 생각보다 세상에 많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우웅, 적색으로 뻗어 나온 오러 소드의 강렬한 빛을 보며, 그녀가 다짐했다.

‘나만 잘하면 돼.’

다른 이들에게 기댈 필요는 없었다.

자신 혼자서도 능히 세상을 바꿀 힘이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 혼자서만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충분하니까.

필요한 건 동료로서의 신뢰와 설득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명령과 지시였으니까.

‘같이 가시죠, 대장.’

‘나도, 아냐도!’

‘음?’

‘왜요, 같이 가면 안 됩니까?’

‘그러든가. 마음대로 해.’

‘아니, 기껏 대장 생각해서 따라가는 건데…… 왜 그렇게 쌀쌀맞은…….’

‘쌀쌀맞은 대장도 좋아! 야호!’

게오르그의 말에 크게 기뻐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아냐의 웃음에 마주 웃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지금이야 자신과 함께였지만, 나중 일은 모르는 거니까.

언제 지쳐 나가떨어질지 모르는 존재에게 집중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으니까.

24세의 이그넷, 아니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망설이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지독한 어둠이 번지며 불쾌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서 남는 게 뭐지?’

‘…….’

‘그렇지 않아? 인정해, 네가 대단하단 거. 불필요한 내전도, 탐욕스러운 횡포도, 말도 안 되는 핍박도 없이 누구나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니! 심지어 그걸 이룰 만한 실력까지 지니고 있으니, 이미 죽은 나조차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어.’

이그넷이 무표정한 얼굴로 광대 악마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그렇기에 더욱 서늘한 눈빛이었지만, 시체가 된 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네게 남는 게 뭐지? 고독? 외로움? 허어! 이 친구야, 내 장담하지. 자네의 곁에는 평생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자네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 녀석들이 마차로 수십 대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안 그래?’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도, 용병대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자신의 이상에 공감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자기 깜냥에는 쫓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며 저 멀리 뒤처져 버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아마 흑기사단원들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게오르그도, 아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정신 차려보면 험난하기 그지없는 길을 또다시 낯선 이, 혹은 혼자서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허나 이그넷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녀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어느새 손에 들린 검이 광대 악마를 베었다.

‘끄르륵…….’

활활 타오르는 악마의 시체를 보며 이그넷이 생각했다.

‘여유 부릴 시간이 없도다.’

자신이야 괜찮았다.

악마의 사후 저주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를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은 나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광대의 마지막 악의를 떠올린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이미 절반 이상이 어둠에 물들었을지도…….’

신속히 일어나야 한다.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몸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욱 짙게 몰려왔을 어둠을 걷어내고 던전에서 탈출해야 한다.

신성왕국의 기사단장인 자신의 힘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그넷은 억지로 자신을 깨우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자신이야말로 탐사대를 구출할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나는 그 녀석들을 대신해서 앞으로 나선 거지?’

그래서는 안 됐다.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어야 했다. 둘을 방패막이 삼더라도 자신의 체력을 보존해야 했는데. 그래야만 했는데…….

“……!”

시야가 돌아왔다.

좌우를 훑은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다시금 상체에 힘을 주었다.

그런 그녀를 아냐 마르타와 게오르그 포이베가 말렸다.

“안 돼, 대장! 더 쉬어!”

“지금 움직이면 안 됩니다. 단장, 조금 더 누워 있으세요.”

“안 되느니라…….”

“안 되긴 무슨! 가만히 있어, 대장!”

“일어나야…… 내가 아니면, 악마의 저주가 다른 이들을 범할…….”

“무슨 생각하고 계시는지 압니다. 근데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잠깐 진정하시고…… 주변부터 좀 살피시죠.”

“무슨…….”

“염려하시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

이그넷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원래 찌푸리고 있었나?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렇다면 게오르그의 말대로 휴식에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탐사대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왕으로서의 책임감이 이그넷의 감각을 일깨웠다.

예민해진 그녀의 귀와 눈이 던전 안, 여기저기 퍼져 있는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

놀랍게도,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누군가는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누군가는 검을 휘두르며 번민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에 매진하는 탐사대원들, 그들의 얼굴은 이그넷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둡지 않았다.

아니,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던전 자체가 어둡지 않았다. 빛 덕분이었다.

강렬하면서도 쓰라리지는 않은, 주변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황금색의 기운.

아이른 파레이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오러를 느끼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생각했다.

‘……알 것 같구나.’

자신이 몸을 던진 이유.

이를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온기와 함께 잠에 빠져든 단장을 보며, 게오르그와 아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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