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과거와 대적하다 (3)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비단 평범한 검사나 엑스퍼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소드마스터들조차 검에 오러를 입힐 때면 안간힘을 써야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축기, 강화, 경화, 개화, 집중, 발현을 동시에 신경 쓰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으니까.
당장 아이른 파레이라만 해도 일리아와의 챔피언 결정전 이후,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낸 채로 검술을 펼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쉬웠다.
물론 현재의 아이른은 오러 소드를 힘겨워할 수준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이를 구현하고 유지하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러 운용의 6가지를 전부 신경 쓰고 있음에도 훨씬 편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검이, 도구가 아니라…….’
마치 자기 몸의 일부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른이 휘릭 검을 휘둘렀다.
휘이익!
휘익-!
정말로 그랬다.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 손가락으로 턱을 긁을 때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고, 익숙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른의 검이 그러했다. 아이른의 검술도 그러했다.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던 그가 전생의 이름을 읊었다.
“카렌 윈커.”
우우우웅-!
부름에 응답하듯 검명이 울려 퍼졌다.
아이른이 웃었다.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유대감이 강해졌구나.’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이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아이른이 자신의 전생을 이해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반대로 전생의 자신 역시 현재의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쓸쓸히 검을 휘둘렀던 사내의 유지가 현재에 닿았다.
악마의 농간에서 벗어난 자신의 전생이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을 인정했다.
‘나는, 지금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적어도 지금 눈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존재, 광대 악마에게는 절대로 패배할 자신이 없다는 것.
생각을 마친 그가 전투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시작해도 되겠지.”
“……그렇군.”
악마가 중얼거렸다.
표정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하나 전생의 사내가 찾아왔을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가 비교적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초조함이 가득 들어찼던 목소리 역시 안정을 찾았다.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인 광대가 제안했다.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봐, 이봐이봐이봐! 말을 끝까지 들어. 지금 너는 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너도 손해 보지 않는 이야기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어? 너그러운 자세로 나의 말을 들어 주면 안 될까?”
“수작질을…….”
“6대 4.”
광대 악마가 손가락으로 여섯, 넷을 순서대로 만들며 말했다.
“나와 네가 싸울 경우의 승산이야. 나의 진명인 ‘게이시’를 걸겠어. 이건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물론 6은 나야. 어허! 정말이라니까!”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아이른을 보며 광대가 펄쩍 뒤로 물러났다.
무척 과장된 동작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선지 녀석의 원래 성정 때문인지 아이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자세를 풀지 않은 그가 지그시 상대를 노려봤다.
대화의 의지를 느낀 광대가 히죽 웃다가, 강하게 자신의 뺨을 때리며 변명했다.
찰싹!
“이런, 미안해. 방금 전은 널 비웃은 게 아니었어. 나는 때때로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이 있거든.”
“…….”
“이해해 줄 수 있겠나?”
“본론만 말해.”
“그래, 그래! 본론! 나도 본론 좋아해. 그러니까, 어, 어디까지 말했더라? 맞아! 우리가 서로 전력으로 싸울 경우 내가 이길 확률이 6, 네가 이길 확률이 4라고까지 말했어. 이건 진실이야. 비록 그 씹어먹어도 모자랄 쓰레기 자식의 기습에 걸레짝이 되긴 했지만, 가면이 부서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몸은 강하거든. 흡, 흡, 흡!”
연속으로 세 번 빠르게 근육을 자랑한 광대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에 비교해, 네 녀석은 그 빌어먹을 카렌 윈커보다 훨씬 나약해. 오오! 오해하면 안 돼! 네가 형편없다는 말을 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그 말도 안 되게 끔찍한 녀석과 비교해서 약하다는 뜻이었어. 오해하지 말라고!”
광대를 바라보는 아이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의 자신은 전생보다 터무니없이 약한 상태였다.
물론 카렌 윈커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검에 온전히 스며든 그는 여전히 상당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이고, 그런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광대는 바로 그 점을 짚고 있었다.
“어때? 응? 무승부로 하자. 무승부로 하자! 진명을 걸고 약속하지! 이대로 날 조용히 보내 주면 네 친구들, 지금 결계에 갇혀 있는 네 친구들 전부 살려 줄게! 아니아니! 이번에도 오해하면 안 돼! 목숨만 붙여 놓은 상태가 아니라, 털끝 하나 건들지 않은 상태로 건강하게 풀어 줄게! 나는 40%나 되는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
“잘 생각해봐! 결코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너, 엄청 어리지? 끽해야 30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어. 응?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나중에 나이를 먹고, 더 강해져서, 더 많은 동료들과 함께 나를 잡으러 오면 되는 거잖아. 그편이 훨씬 더 수지에 맞는 장사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응? 응? 응?”
광대 악마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때로는 인정에 호소하며, 때로는 악마처럼 몰아치며, 때로는 횡설수설하며 끊임없이 설득을 이어 가는 녀석의 모습에 아이른이 한숨을 쉬었다.
더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상상 이상이었다.
천년간 인간들을 기만하며 살아온 악마의 속삭임은 귀가 괴로운 것을 넘어 오감 전부를 역하게 만들었다.
거짓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곤두선 육감이 진실과 거짓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악마와의 대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이른 파레이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
“엉?”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아. 하지만 진실을 전부 말하고 있지도 않지. 네가 시간을 끄는 이유, 잘 알고 있어.”
“…….”
“버티면 버틸수록 네 쪽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지?”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던 광대가 침묵했다.
정답이었다.
이그넷에 당해 만신창이가 된 것은 맞았다.
아이른이 위협적인 것도 맞았고, 40퍼센트나 되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가면을 희생해 만들어 놓은 암흑 결계.
그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탐사대원들의 절망과 분노, 증오와 두려움이, 그에게 끊임없이 힘을 전해 주고 있었다.
계속해서 승산을 높여 주고 있었다.
광대가 시간을 끄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천 년 전처럼 우환거리를 남겨 놓는 짓 따위, 그는 절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걸 알면서 왜?’
광대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척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마저 들여다보는 듯한 저 날카로운 시선이 견딜 수 없이 짜증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안구를 뽑아내 잘근잘근 씹고, 뱉고, 발로 짓이기고 싶었다.
한데, 그처럼 예리한 녀석이 어째서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지이이잉-!
“……!”
끊임없이 확장되던 광대의 사고가 멈췄다.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시뻘건 상처가 들어왔다. 어둠을 불사르는 광포한 불꽃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아아악-
“아니!”
암흑을 가르고 새어 나오는 은색의 빛.
밤하늘의 달처럼 찬란한 빛이 광대의 왼쪽 얼굴을 따끔따끔하게 만들었다.
질끈 눈을 감은 그는 비틀거리는 상태로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빛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억지로 눈을 떠 새로이 등장한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
린제이 가문의 최고 기재, 일리아 린제이.
둘의 당당한 자태를 마주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결계를 믿었듯이, 저 젊은 녀석은 자신의 동료들이 결계를 돌파할 것을 믿었구나.
광대 악마의 잇새에서 악에 받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이익…….”
“어떻게 이 자리에 섰지?”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넷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일리아 쪽을 바라봤다.
믿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다시 한번 상대를 채근했다.
“다시 묻노라. 기사단의 부단장인 게오르그조차 뚫지 못한 어둠을, 어찌 헤치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냐?”
화르륵-!
이그넷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른도 아이른이지만, 일리아는 정말이지 지금껏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존재였다.
과거의 일은 잊은 지 오래였으며, 현재의 상대는 흥미롭지 않았다.
더 위를 바라보는 이그넷으로서는 아이른에게 시선을 분산하는 것조차도 신경 거슬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아이른을 힐끗 쳐다본 이그넷이 다시 일리아를 쳐다봤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무엇이 이 녀석을 성장시킨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이 애송이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일까.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웃기네.”
“뭐라?”
“너는 당연히 되고, 나는 당연히 안 되고?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
이그넷이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욕을 들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저 녀석이 욕을 뱉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른이 웃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왜 웃어?”
“아니, 미안. 그런데 네 말이 맞아. 이그넷, 당신의 질문은 틀렸어요.”
“…….”
“어떻게 이 자리에 왔냐니, 일리아는 충분히 여기 설 수 있는 친구입니다.”
말을 마친 아이른이 일리아를 바라봤다. 일리아 역시 아이른을 바라봤다.
신뢰를 교환한 둘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그넷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기분이 나쁘면서도 나쁘지 않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
결국 생각을 포기한 그녀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말했다.
“궁금한 것들은 나중에 묻겠노라. 우선…….”
“네, 일단은…….”
“저 역겨운 녀석을 끝내야겠지.”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염화를 품고 앞으로 나섰다.
잔뜩 지쳤음에도 검에서 풍겨 나오는 위압감은 일국의 왕을 상기시킬 정도로 대단했다.
일리아 린제이 역시 자세를 취했다. 밤하늘을 밝게 물들이는 달빛이 조용히 어둠을 걷어냈다.
“후우.”
이윽고, 가볍게 숨을 고른 아이른 파레이라마저도 검을 들었다.
끝끝내 부러지지 않은 전생의 검을 들고.
기어코 바로 세운 현생의 불꽃을 두른 채.
황금의 오러 소드로 광대를 겨냥한 그가 나직이 말했다.
“간다.”
“……으, 으히, 으히히히히.”
세 검사의 기세를 마주한 광대 악마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당했다.
부상을 위해 꼭꼭 숨어 있던 안식처를 찾아온 것이 평범한 소드마스터들도 아니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시대의 영웅들이라니.
심지어 지금이 전성기도 아니었다. 광대가 지그시 눈을 감고 그들의 찬란한 미래를 떠올렸다.
‘아마 더, 훨씬 더 강해지겠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함을 품고.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나는 모습으로.
지금처럼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오래도록 살아가겠지. 분명 그렇겠지.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을 앗아 가는 것이야말로, 악마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푸욱-
“……!”
“……!”
“무슨!”
광대 악마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우측 안면에 박았다. 깜짝 놀란 셋이 당혹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경 쓰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불쾌한 소리와 함께 남아 있던 절반의 가면이 얼굴에서 뜯어져 나왔다.
피와 살점, 뼛조각이 함께 딸려 나와 엉망이 된 모습의 악마가 웃으면서 울었다.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이른이 깨달은 순간, 그가 가면을 부쉈고.
콰득-
폭발이 일어났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양쪽 귀에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피가 흐르는 탓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런 감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여유롭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일리아 역시 비슷한 모습이라는 것.
하지만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물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있었다.
악마가 자폭하는 순간,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대부분의 충격을 몸으로 막아 낸 것이다.
“왜, 대체…….”
일리아 린제이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에서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가까스로 눈을 뜬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녀가 말했다.
“몰라, 새끼들아.”
오랜만에 용병대 시절의 말투로 돌아간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