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과거와 대적하다 (2)
투둑.
투두둑.
피어오른 흙먼지가 어둠 사이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가려진 시야 사이로 불쾌한 조각들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악마의 살점, 닿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공황으로 몰고 가는 끔찍한 잔해물이었다.
다행히 이에 직접 노출된 이는 없었다. 후폭풍에 휘말린 이도 없었다.
변신한 루루가 철통같이 탐사대원들을 지키고 있던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파괴력이 광대 악마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놀라운 검술과 아냐의 3년 치 요술 적금이 만든 기적이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군.’
세비온 브룩스와 페리 마르티네스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대단한 것을 너무 많이 봐 버렸다.
당장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강자인 자신들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젊은이가 있었고, 그의 황금빛 오러 소드에 수차례 두들겨 맞았음에도 멀쩡했던 악마가 있었다.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마인과는 수준이 다른 강함이었다.
한데, 그런 강력한 악마를 일격에 박살 내 버린 검사가 나타났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자가…….’
‘이런 위력의 검술을 펼치다니!’
하아, 한숨을 내쉰 세비온 브룩스가 눈을 감았다.
직전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이그넷의 검술을 간파할 수 없었다.
간파는커녕 편린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여기에 있는 모두가 그와 비슷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
여전히 황금의 오러를 거두지 않은 그의 눈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검을 계속해서 좇고 있었다.
‘굉장해.’
악마, 그것도 평범한 악마가 아닌 대악마다.
악마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마룡왕보다도 더 오래전에 출몰했던 강력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바로 광대 악마였다.
하나 그런 괴물을 앞에 두고도 아이른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려 이그넷의 검을, 이그넷의 몸을, 이그넷의 오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몸을 움직이기 위해 수십, 수백 가지의 근육이 작용하듯.
대륙 최고의 천재가 만들어 낸 붉은 구체 역시 수많은 오러의 작용으로 만들어졌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오러를 보는 눈을 가진 아이른조차도 곧바로 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한 과정이 그와 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심지어…….
‘눈으로 본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은 아이른이 이그넷의 검을 떠올렸다.
단순히 떠올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길게 잡아 늘인 듯 천천히 되새겼다.
그런데도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해’가 아니라 ‘관찰’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경지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오행신공처럼 오러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결합된 힘인 걸까?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뜨거운 열망을 담은 그의 시선이 이그넷을 향해 꽂히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먼저 악마에게 닿을 수 있었지?”
“…….”
“말하라. 나를 포함한 흑기사단원 전원과 사제들……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마(魔)의 근원에 닿지 못했다.”
말을 하는 이그넷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바닥까지 긁어다 썼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난 그녀라 할지라도 악마를 상대로는 여력을 남겨 둘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녀석.
불과 1년 반 만에 몰라보게 달라진, 그야말로 불가해한 성장을 거둔 괴물의 앞에서, 이그넷은 참으로 오랜만에 고양감 이상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기이하다.’
검술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애송이 녀석의 성장은 분명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평정을 깨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른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자신이 지나온 길을 뒤쫓고 있을 뿐.
그렇다면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하면, 아이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이 간질거리는 기분은.
끊임없이 시선을 잡아끄는 놈의 이질적인 분위기는,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음인가.
‘……이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150년만에 출현한 악마를 토벌하는 것만큼이나.
그러한 생각 때문일까.
이그넷의 어조는 평소보다 더욱 고압적이었고, 급했다.
연회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더욱 날카로운 기세로 아이른을 압박했다.
“…….”
아이른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그넷과 달리 그는 지금의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듯,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리라.
여러 가지 근거보다 더욱 믿음직한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이그넷의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꿈속 사내의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전생에 얽혔던 광대 악마 이야기는?
그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더 필요한 이야기는 없나?
아니, 그 전에 던전 안에 가득 들어찬 이 마기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과 이그넷을 비롯한 강자들이야 괜찮지만, 저기서 콜록대고 있는 칼벤의 기사단장과 부상자들의 경우는…….
“…….”
상념이 채 끊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와 얼마 차이나지 않게 이그넷의 시선이 돌아갔고, 그 뒤를 일리아, 루루, 아냐, 게오르그, 세비온, 페리가 뒤따랐다.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 번져 있던 핏물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만들어진 웅덩이는 이윽고 사람의 모습으로, 광대의 모습으로 변해 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온전한 형상을 이루었다.
아니,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금이 가 있던 광대 가면이 떨어져 나와, 얼굴의 절반이 외부로 노출된 것이다.
“으. 아, 어.”
“아아, 아아아.”
“으, 그? 거극…….”
“모두 고개 돌려!”
이그넷이 빠르게 외쳤고, 루루가 다시 요술을 부려 마기를 차단했다. 부족했다.
겉으로 노출된 광대 악마의 얼굴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눈빛에선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증오와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팔을 들었다.
손에 들려 있는 반쪽의 가면을 확인한 아이른과 이그넷이 재빨리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하나 닿을 수 없었다.
콰직-
가면이 부서지고 암흑이 내려앉았다.
던전을 처음 들어올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한 어둠.
그 속에서.
“…….”
아이른은 자신의 속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 *
“…….”
온통 암흑이다.
눈을 떴음에도 감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눈뿐만이 아니라 귀로도, 코로도 어둠이 밀려드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이해한 것은, 깨어난 뒤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기억났어. 나는 녀석을 쫓고 있었어.”
그렇다.
자신은 광대 악마를 멸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분노와 증오가 아닌 희망과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이 아닌, 소녀가 건네준 들꽃을 가슴에 품고 녀석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그 어떤 수하들로도 날 막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자 의지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낡은 철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걸었다.
감각을 어지럽히는 어둠은 여전했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그것을 이겨 낼 힘이 분명히 존재했다.
더는 쏟아지는 증오에 상처 입지 않는다.
더는 가슴 아픈 배신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내가 보호해야 할 것.
그것들이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꺾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너를 뒤쫓을 것이다.
“영원히.”
* * *
‘그래. 그렇게 열심히 방황해라.’
사내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광대 악마가 히죽 웃었다.
천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사내를 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끔찍한 은회색의 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수 있을까.
다행히도 방법은 있었다.
사내의 검을 약하게 만드는 것.
즉, 사내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난과 증오, 조롱과 기만으로는 안 돼.’
대부분은 저것 중 하나만으로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가뿐히 망가뜨릴 수 있다.
그러나 저 사내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어떤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 어떤 억울한 환경에서도 그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끝내 자신을 찾아내 검을 내리쳤다.
그때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걸 느낀 광대가 으흐흐,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보여 주면 돼.”
그렇다. 그것만이 정답이었다.
녀석이 건네받았던 꽃을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녀석의 마음을 일깨웠던 소녀도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그 소녀를 말렸던 어머니도.
녀석이 몸담았던 마을도, 영지도.
심지어 녀석을 손가락질했던 기사와 주민들조차도.
그야말로 지켜 내야 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하고 허무하기 그지없는 세상만을 보여 준다.
그것이야말로 사내의 강철 같은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괜찮아. 이건 정말 괜찮아. 으음, 정말로 괜찮다고요.”
전신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광대 악마는 여유를 부렸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에게 당해 상태가 영 별로였지만, 괜찮았다.
가면의 반쪽을 희생하면서까지 만든 결계다. 방심했던 그때와 달리 사내가 자신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흥겹게 중얼거린 광대가 다시금 사내의 방황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강철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
하나 영원한 건 없다. 아무리 대단한 명검이라도 공허한 세월 앞에서는 녹이 슬기 마련이다.
악마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던 그가 리듬 타는 것을 멈춘 것은, 어둠 속을 사방팔방 헤치고 다니는 사내 때문이 아니었다.
치지지지직…….
“…….”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기껏해야 그릇일 뿐인, 사내를 품고 있었을 뿐인 애송이 녀석이 자신의 결계를 깨고 이곳까지 닿을 거라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게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단순히 그릇이 아니었다.
꼭두각시도 아니었다.
그랬던 시절도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짧지 않은 경험과 고뇌 속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품어 냈다.
자신의 검을 바로 세웠다.
비록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 낸 것은 아니나,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오롯이 서기 위해 꼭 홀로일 필요는 없는 법인데.
“이익…….”
광대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전과는 달리 이를 가려 줄 가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둠을 불사르며 새어 나오는 빛을 막아 줄 수도 없었다.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사내.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카렌 윈커.”
악마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아이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느새 꿈속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세상을 떠돌던 와중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니, 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가 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냥, 마주 보니 알 수 있었네요.”
“신기한 청년이군.”
“칭찬인가요?”
“칭찬이네.”
“감사합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아 하나 더 묻겠네.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세상을 배회했는데 말이야, 보이는 게 없더군. 내가 지내던 마을도, 오가며 봤던 성도, 도시도,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랐던 나의 영지, 가스코도.”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아이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광대가 공격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지금 나설 수 없다. 사내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으니까.
겁이 많고 약삭빠른 녀석은 절대로 불리한 상황에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덕분에 그는 마음 편히 자신이 할 말을 고를 수 있었고, 맑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영지는 더는 세상에 없습니다. 수백 년 전에 사라졌죠. 당신의 가족도, 영지민들도, 후손들도……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는.”
“…….”
“하지만, 지켜야 할 이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화아아악-!
아이른 파레이라가 마음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내에게로 전이되었다.
찰나의 시간, 전생의 사내는 현생의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하려는 건지를 완벽하게 이해하였다.
“그렇군. 나는 죽었군.”
“…….”
“하지만 괜찮겠어. 같은 뜻을 품은 이가, 이렇게 훌륭한 청년이라니.”
“…….”
“조금 쉬고 싶군. 뒤를 부탁하네.”
그것이 사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바닥에 검을 내리꽂은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내의 얼굴에는, 전과 달리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사라락,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고운 입자로 변한 사내의 몸은 허무하게 날아가는 대신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에 스며들었다.
빈자리에 들어찬 입자가 대검을 더욱 단단하게,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살폈다.
손잡이뿐만이 아니라 검날까지 금빛으로 물든 것을 확인한 그가, 전력을 다해 오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