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과거와 대적하다 (1)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가이른 영지의 남부 동굴.
그곳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토벌대의 주요 인물들을 납치한 마인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곧바로 참격을 날려, 그 어떠한 피해도 없이 토벌에 성공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몇몇은 악마의 협박과 무시무시한 기세에 넘어가 손뼉을 치는 추태까지 보였다.
심지어 마스터인 세비온 브룩스와 페리 마르티네스마저 몸이 굳고 머리가 굳어 있을 때, 오직 그만이 빠른 판단으로 광대 악마에 맞서기 위해 뛰어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남부 토벌 때와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같은 생각으로 적을 향해 몸을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지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게 최선이다!’
2년 전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인질의 목숨?
관심 없었다.
마인을 놔줬을 때 벌어지게 될 더 큰 피해?
이 역시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전생의 사내에 휩쓸려 꼭두각시처럼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둘렀을 뿐.
아무런 고뇌도 없는 당시의 검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탐사대원들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라는 것을.
이 경솔할 수도 있는 행동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 지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분노와 증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책임질 각오를,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가지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런 피해도 없는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다가 더 큰 수렁에 빠질 수는 없다. 악마와의 거래는 그런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파멸적인 미래가 찾아올 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질이 있는 상황에서 멋대로 돌격하는 것 역시 상책이라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쪽도 최선일 수 없는 선택의 순간.
아이른은 온전히 스스로 생각으로 판단을 내려 움직였다.
선택의 괴로움에 망설이지도, 겁먹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무거움을 능히 감당한 영웅의 검이,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며 광대 악마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아아?”
검에 얻어맞은 악마가 저 멀리 날아갔다. 베어지진 않았다. 산맥을 발로 걷어찬 것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광대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먼지구름을 헤치며 나타났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가 황당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재차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정수리를 향해 3번 연속으로 떨어지는 강타!
광대는 맨손으로 이를 막아 냈다. 이번에는 여유롭지 않았다.
첫 번째 공격에 왼손이 부러지고, 두 번째 공격에 오른손이 부러졌다.
양팔을 교차해 막은 세 번째에는 보기 끔찍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도 광대는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형편없이 꺾이고 부서진 양 손바닥을 펼치며, 악마가 진정하라는 듯이 말했다.
“이봐, 이봐! 잠깐만 기다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
쒜에엑-!
“우힉!”
쒜에에엑-!
“우히익-! 아닌가? 잘못 봤나? 그런데 왜 이렇게 친숙하지? 아, 잠깐…….”
퍼억-!
콰아아아앙!
속임수에 넘어간 광대의 몸통을 발로 푹 찍은 뒤, 풀 스윙으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번에도 광대는 베어지지 않았다. 다만 ‘우지직!’ 하는 감각은 느껴졌다.
표정을 굳힌 아이른이 재차 상대를 향해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
“보자 보자 하니까…….”
어둠이 피어났다. 그에 따라 여기저기 망가져 있던 광대의 몸이 멀쩡해졌다.
원래부터 금이 가 있던 가면 빼고는 100퍼센트 컨디션이 된 느낌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인질들의 머리 위에 형성되는 검은 구름을 보는 순간, 아이른은 늦을 걸 알면서도 그들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허나 제아무리 마스터인 그라고 할지라도 광대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터어엉-!
“으잉?”
하지만 광대 역시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었다.
“아이른!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싸워!”
앙증맞은 요술봉을 든 채 두 팔을 쭉 펼친 루루, 그녀의 힘이 붙잡힌 탐사대원들을 단단하게 감쌌다.
충격이 상당한 듯 안색이 좋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푸른색의 보호막은 광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인질들을 지켜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놀란 광대가 무어라 말을 쏟아내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우우웅-!
꿀꺽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크기.
지금까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밝기.
10년 차 소드마스터인 세비온 브룩스의 것보다도 거대한 오러 소드가 불꽃처럼 피어났다.
그야말로 전설 속의 성검을 쥐고 내려온 신의 사자와도 같았다.
허나 그와 마주하고 있는 광대 악마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전설이나 신화 따위가 아니었다.
신의 졸개도 아니었다. 그런 녀석의 도움 따위와 전혀 상관없었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의 힘은…….’
저 녀석의 검은.
인간으로서 감당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서 만든.
수십 년간 쏟아진 자신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신념은 지켜 낸, 믿을 수 없는 존재로부터 잉태된.
수천 년을 살아온 자신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바로 그때의…….
우우우우우우우웅-!
광대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의 몸을 덮어 버릴 정도로 자라난 황금의 오러.
검인지 불꽃인지 모를 것을 든 젊은 녀석의 눈에서도 황금빛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하핫.”
왜일까?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웃음을 터뜨린 순간, 젊은 영웅의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들었다.
푸욱
그것이 명치에 꽂히는 것을 느낀 순간, 광대 악마가 생각했다.
‘드디어 찾았다!’
* * *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검을 소환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러 소드를 뽑아낸 채 사나운 기세로 악마에게 달려든다.
그렇다. 분명 ‘악마’였다.
세비온 브룩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광대 모습의 악마를 보며, 잠깐 사이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군.’
가장 처음 느낀 것은 허탈함이었다.
가끔 하곤 했던 생각이 있다.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세비온 브룩스는 지금 시대에도 악마가 조금은 남아 있기를 바랐다.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데몬 슬레이어들의 활약과 업적!
자신이라고 해서 불가능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대륙의 정점에 위치한 대 검사였으니까.
마인 나부랭이들로는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니까.
‘이제 알겠어.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세비온 브룩스가 몇몇 기사들을 쳐다봤다. 광대의 지시에 따라 손뼉을 친 녀석들이었다.
허나 그들을 꾸짖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장 자신조차 광대 악마의 어둠에 짓눌려 몸이 온통 굳어 버린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놀라웠다.
자신의 밑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소드마스터가, 단독으로 악마의 앞에 나서는 모습이 말이다.
콰앙!
쾅!
콰아아앙!
‘대단하다!’
검술의 대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맹하면서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흐름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자신의 검술 역시 그에 부족하지 않다.
오러의 대단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나, 그 역시 자신이 밀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비온 브룩스가 놀란 점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허나 마(魔)의 앞에 서면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보이는 것.
‘마음과 의지!’
자신이, 페리 마르티네스가, 그 밖의 다른 이들이 광대의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게 무엇인가.
인질이 잡혀 있어서?
그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니다.
악마를 토벌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희생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렇다. 그런 변명 따위는 댈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자신은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역겹고 지독한 어둠이 자욱한 광대의 근처로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저 청년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자신과 똑같이 두렵고, 괴롭고, 싫을 터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고, 나아간다.
끝끝내 악의 근원에 닿아 몸을 맞부딪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케 하는 마음과 의지를 쌓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경험을, 생각을 쌓아 왔을 것인가?
‘한참 젊은 후배를 견제하고 질시했던 나와는…… 근본 자체가 다르겠지.’
콰앙!
콰아앙!
터엉!
아이른 파레이라와 악마 간의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비온 브룩스의 상념은 끊어지지 않았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 아이른에 대한 감탄,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그 밖의 부정적인 생각들.
창피하게도, 젊은 청년이 혼자서 악마를 상대하는 내내 세비온 브룩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저 금발의 소드마스터가 자신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오러 소드로 광대 악마를 무찔렀을 때, 팔랑케의 최고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끝났어요.”
“…….”
어두운 와중에도 밝은 느낌이 드는 은발을 흩뿌리며 일리아 린제이가 다가왔다.
암흑의 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몸이 뻑뻑한 상태인 그가 놀란 눈을 치켜떴다.
‘아이른도 아이른이지만, 일리아까지?’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마(魔)를 극복했는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물론 일리아는 세비온의 이러한 생각을 전혀 몰랐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만을 말할 뿐이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저희가 함께 도와야…….”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고 이 빌어먹을 개자시이이이이익-!”
퍼어어어엉-!
일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이른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들의 눈에 가면 밑으로 피 한 줄기를 흘리고 있는 광대 악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wnrdlsek, wnrdlsek, wnrduqjflsek, Wlwrh, Tlqrh, wltdlrlrh, rkfdkqjflrh, wkfrmswkfrms, wkfrmswkfrms Tlqdjtj, rm snrneh dkfdkqhwl ahtgkrp, wnrdlsek…….”
인간으로선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이한 언어.
하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탐사대 전원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몇몇 심지가 약한 이들은 피거품을 물며 혼절했고, 엑스퍼트에 오른 그레고리 그리핀조차 격한 기침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도 그렇지 않았다. 친구의 곁에 나란히 선 그의 검에서도 은빛의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젠장!”
“후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비온 브룩스. 페리 마르티네스가 그들의 옆에 섰다.
그들의 뒤에서는 루루가 안간힘을 쓰며 어둠으로부터 탐사대를 지켜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아주 작은 계기만 있더라도 곧바로 터져 버릴 듯한 긴장감이 던전을 가득 메우고, 세 소드마스터와 하나의 전투 마법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광대 악마를 바라봤다.
아니,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일리아 린제이가 옆을 돌아봤다.
“…….”
어떻게 아직까지 들키지 않았을까?
알 수 없었다.
허나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우우우우웅……
검극에 붉게 맺힌 구슬과도 같은 저 오러가.
키이이이잉……!
그 위에 한 번 더 덧씌워지는 아냐 마르타의 요술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는 사실.
“아냐, 3년간 모았던 거 다 써 버렸어…….”
“야! 조용히 해!”
“?”
아냐의 목소리를 들은 광대 악마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금이 가긴 했지만, 가면은 여전히 가면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아이른은 알 수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던 저 녀석이, 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거라.”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끝에 걸려 있던 적색의 구체가 쏘아졌다.
마스터 급을 제외한 누구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광대 악마조차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푹-
또다시 명치에 공격이 박힌 광대 악마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불꽃과 뼛조각, 살덩이가 폭죽처럼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