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91화 (191/388)

◈ 64. 던전의 시련 (2)

“예, 처음에는 그…… 환상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의심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칼벤의 기사단장, 그레고리 그리핀 앞에 선 기사 하나가 열심히 직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함께 돌아온, 까딱 잘못했으면 신의 시련에 갇혀 있을 뻔한 인물이었다.

“그렇군, 알겠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기사단장이 다른 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마음속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피어났다.

3국 중에서 인원수는 제일 적은 마당에, 낙오할 뻔했던 이는 가장 많다니.

칼벤의 미약한 국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니 자연스레 표정이 굳어졌다.

허나 그러한 감정보다 더욱 강렬한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신의 시련에 개입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라니.’

칼벤의 기사 전부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좌절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점점 밀려오는 어둠에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이 차오를 때 저 멀리서 불꽃을 발견했다고.

아주 따스하고도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고.

덕분에 낙오할 뻔했던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무사히 신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아이른의 황금빛 오러 소드가 등대의 역할을 한 셈이다.

‘……등대만이 아니라, 모닥불의 역할도 하는 것 같군.’

그레고리 그리핀이 젊은 검사의 대검을 바라봤다.

눈에 담는 순간 편안하다는 감정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빛.

그 어떤 소드마스터의 오러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운이 자신을 북돋우는 게 느껴졌다.

아미라 쉘튼의 경우 체면을 지키지도 않고 가까이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와, 우와아!”

반응하는 모습이 철부지 소녀 같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기사단장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주책맞은 녀석아, 네 나이와 직급을 생각해라.”

“아? 아! 이런…….”

부끄러움을 느낀 아미라가 호다닥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표정을 굳히고 부단장으로서의 위엄을 뽐내려 했으나, 붉은 얼굴 때문에 여전히 철부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혀를 쯧쯧 찬 그레고리가 제1 탐사대의 장, 페리 마르티네스 쪽을 쳐다봤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걸.’

그럴 만도 했다.

90퍼센트 이상 마력 결계 던전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고대의 신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청년이 엄청난 활약으로 스물에 가까운 인원들을 구해냈다.

덕분에 지금 탐사대의 중심은 완전히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로 넘어간 상황.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직전의 시련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

그레고리 그리핀이 생각했다.

고대의 신전에서 얻을 수 있는 ‘신의 은총’은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하사해 준다고 알려졌다.

그런데도 많은 정보가 없는 건, 그것을 얻는 데 겪을 난관이 무척 험난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휘자의 심사가 뒤틀리고, 탐사대의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상념을 마친 그레고리가 페리 마르티네스에게 다가갔다.

“마르티네스 공.”

“……불렀소?”

“우리 칼벤 쪽도 슬슬 수습하겠소. 탐사대장의 명이 떨어지면 곧바로 따르겠소.”

“으음.”

총지휘자로서의 면을 세워 주는 칼벤 기사단장의 발언에 페리 마르티네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잠시 고심하던 그가 말했다.

“우리 마법사들이 탐지마법을 사용하며 먼저 나아가겠소. 세비온 자네는 날랜 이 몇을 뽑아 호위를 부탁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시련에 깊이 매몰되었던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른으로 인해 일었던 소란도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페리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갑시다.”

“알았다.”

“마르티네스 공만 믿소.”

라바트와 팔랑케, 칼벤 대표의 지도 아래에 재차 공략에 나서는 탐사대원들.

길게 뻗은 복도를 걸어가는 그들의 뒤로 진한 어둠이 따라붙었다.

* * *

던전에는 던전을 지키는 가디언이 존재한다.

마력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가 나타나기도 하고, 영웅의 유지로 인해 잉태된 신비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신전 역시 마찬가지다.

삿된 자와 자격 없는 자가 힘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스러운 피조물들이 던전을 지키는 것이다.

허나 대단한 신의 가디언들조차 페리가 지휘하는 탐사대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콰아아앙-!

콰아앙!

주문과 함께 허공에 피어난 투사체들이 마도구로 인해 더욱 크기를 불린다.

대마법사의 손짓에 따라 쏘아진 회색의 구체들이 정체불명의 광물로 만들어진 골렘들을 때려눕혔다.

“하아압!”

스캉-!

솜씨 좋게 그 틈을 노린 세비온 브룩스가 골렘 하나의 핵을 파괴했다.

마법사들의 탐지 마법 덕분이었다.

곧바로 신형을 돌린 그가 다른 골렘의 몸뚱이에 표시된 붉은 점을 향해 쏘아져 나갔고, 다른 기사들 역시 골렘이 몸을 재구성하지 못하도록 핵을 해체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하여 던전 내에서의 다섯 번째 전투도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짧은 기간을 두고 벌어진,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와의 싸움이었음에도 중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던전 공략, 순항 중!’이라는 말을 해도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탐사대의 분위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쯧.”

“쯧? 설마 나한테 그랬냐?”

“아니. 신경 꺼라.”

“신경을 끄라니, 지금 분명히 나한테 그랬잖아. 아니야?”

“하, 그러면 발목 잡지 말고 똑바로 움직이든가.”

“이 자식이…….”

원래라면 적당히 넘어갔을 만한 실수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평소라면 순순히 사과했을 만한 말에도 크게 성을 낸다.

“안 돼…… 지금 내 실력으로는 탐사대에 민폐만 끼치게 될 거야.”

“차라리 시련 속에 갇혀 있었더라면 짐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다음에는 분명 실수할 거야. 분명 실수할 거야. 이렇게 계속 운이 좋지는 않을 거야…….”

사소한 일에도 크게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는다.

계속해서 커지는 불안 속에서 다른 이들 역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상황을 지켜보던 페리 마르티네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신전을 지키는 가디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련, 그것이야말로 탐사대가 매듭 짓고 나아가야 할 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방법이 있겠소, 마르티네스 공?”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세비온 브룩스, 그레고리 그리핀이 탐사대장을 찾았다.

허나 경험 많은 노장 셋이 모였음에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아.’

통제로 인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을 보며, 페리 마르티네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탐사대 전원이 시련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첫 번째 시련에서 낙오될 뻔한 존재들로, 그들을 제외한 대원들은 여전히 사기 충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불안과 의혹에 잠긴 인원들이 건강한 정신의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준다는 점이었다.

주변의 누군가가 끊임없이 불만과 짜증을 표출하고, 무기력하고 좌절에 빠진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이에 노출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마 멀쩡했던 사람도 점차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지금 탐사대의 상황이 그러했다.

파티 전체에 해를 끼치는 짐 덩어리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늘어난 부담은 남은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테고, 이를 버텨내지 못한 이들이 하나씩 무너져 또 다른 짐 덩어리로 변모할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는…… 나와 세비온, 칼벤의 세 용병이 모두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악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버리고 가야 해.’

문제는 물건도 아닌 사람을 그렇게 냉정하게 내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페리 마르티네스가 옛이야기를 꺼냈다.

“1명의 외눈박이와 99명의 장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세비온 브룩스와 그레고리 그리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아는 일화였다.

전쟁 중 포로로 잡은 100명을 죽이는 대신, 99명의 눈을 멀게 만들고 한 명의 한쪽 눈을 앗아간다.

그 상태로 풀려난 병사들이 돌아가면, 적국은 짐 덩어리가 된 장님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 상당한 자원과 심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악마로부터 이 방법을 전해 들은 고대의 폭군이 한창 이런 방식을 즐겨 썼다고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악마의 방식과 자비로운 신께서 내려주신 시련이 흡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니.

‘신이시여, 어째서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낙오자들을 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마냥 품고 갈 수도 없다. 믿음과 신뢰만으로 보듬어 주기엔,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불안과 의혹이 너무 강력했다.

그때였다.

지금껏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금발의 청년,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예의 황금빛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오오…….”

확연히 밝아지는 탐사대원들의 표정.

페리 마르티네스는 언짢으면서도 다행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하며 아이른의 오러를 바라봤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저 청년의 기운은 확실히 좋지 않은 분위기를 풀어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른이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낸 것은 그러한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페리 마르티네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말했다.

“1명의 외눈박이와 99명의 장님 이야기, 저도 알고 있습니다.”

“…….”

“고대의 폭군을 부추긴 악마의 정체도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세비온 브룩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아이른은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아무리 시련이라 한들, 이러한 방식은 너무 잔혹했다.

최소한의 자비도 없이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사람을 끌어내리는 이 기운은 신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음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역겹고 소름 끼치기 그지없는 악기(惡氣)를 어찌 이렇게 잘 감출 수 있었는지.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를 악물었다.

‘평생 가면 속에 숨어 살던 녀석이니, 당연하겠지.’

우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외형도 변하였다. 매끄러운 검날의 형태였던 오러 소드가 불꽃처럼 일렁이고, 공간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어둠이 베어진다.

거짓과 기만, 위선으로 점철된 그림자가 갈라지고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깨달았다. 지금껏 자신들이 거닐고 있던 던전 전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신의 시련이라고 굳게 믿었던 모든 것들이 마인의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마인이 아니다!’

페리 마르티네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인간의 뼈와 살덩이로 만들어진 무대 위, 화려한 복장의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소한 몸집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광대들이나 쓸 법한 금이 간 가면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직감했다.

마인 따위가 이러한 공포를 불러올 수는 없다고.

전신에 소름이 돋은 그가 탐사대를 향해 경고하려는 순간이었다.

사라락-!

광대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유독 상태가 좋지 않았던 열다섯의 대원들이 무대 위로 전이되었다.

뒤늦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어느새 솟아난 덩굴이 몸을 옥죄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웃던 광대 악마가 나머지 인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히히, 흐히, 후후히, 자, 박수!”

짝짝짝짝짝짝-!

거대한 공동에 악마의 박수 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동료가 납치된 상황에서 따라 손뼉을 칠 정신 나간 인물은 탐사대원 중 아무도 없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눈빛이 무대 위의 악마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유쾌한 동작으로 호응을 이끌어내던 광대의 웃음이 뚝 그쳤다.

시간이 멈춘 듯, 잠시 관객석을 내려다보던 그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서걱, 소리와 함께 포로 하나의 머리가 날카롭게 베였다.

“자, 박수!”

짝짝짝짝짝짝-!

탐사대가 분노를 토하기도 전에 재차 박수를 요구하는 광대 악마.

사람들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허나 달려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광대의 후속 행동을 두려워한 몇몇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공동은 아까보다 훨씬 다채로운 소리로 가득 찼다.

어느새 요술 소녀의 모습으로 변신한 루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친구를 쳐다봤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누구보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잘 이해하고 있는 루루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가장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순간.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는 순간.

악마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보다도, 그가 보유하고 있을 끔찍하게 거대한 힘보다도 이런 쪽을 더 괴로워할 아이른이었다.

누구보다 강하지만,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품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힘든 상황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파앙-!

탐사대의 대장인 페리 마르티네스도.

팔랑케의 최고기사인 세비온 브룩스도.

심지어 광대 악마조차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짓쳐든 아이른 파레이라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전생의 분노에 잠식되어 멋대로 달려들었던 남부 토벌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검을 휘두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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