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던전의 시련 (1)
라바트, 팔랑케, 칼벤 사이의 황무지에 있는 던전은 두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양쪽을 동시에 공략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 기이한 특징을 보였다.
물론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고대의 던전은 행동 하나하나가 변수로 이어질 수 있었으므로 누구도 이 의견을 반기지 않았다.
‘아마도 마력 결계일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제1 탐사대의 총지휘를 맡은 페리 마르티네스가 조용히 생각했다.
고대의 던전은 보통 세 종류다.
영웅의 무덤.
신의 유적.
그리고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생겨난 마력 결계.
그중 마지막 마력 결계 형태의 던전에서 이와 같은 특징이 자주 일어난다.
영웅의 유지나 신의 뜻은 이처럼 배배 꼬인 느낌이 없다.
마법 전력이 월등한 라바트가 이번 탐사를 자신 있어 하는 이유였다.
‘……아빌리우스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오로지 신성왕국의 인원으로만 편성된 제2 탐사대를 떠올리며, 페리 마르티네스가 인상을 썼다.
보상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당연히 던전 내에서의 활약상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쪽 입구를 온전히 신성왕국이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라바트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페리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나흘 전에 벌어졌던 세비온 브룩스와 이그넷 크레센시아 간의 대련.
거기에서 보여 줬던 흑기사단장의 무력을 떠올린 그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인정하자. 신성왕국과의 경쟁은 무리야.’
그렇다. 괜히 이그넷이 이끄는 흑기사단과 동행했다가는 나설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신성왕국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손가락을 쪽쪽 빠느니, 비교적 만만한 팔랑케와 칼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이는 편이 나을 터였다.
“후아, 후아, 하아…….”
“아미라, 진정해. 부단장이나 돼서 그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페리 마르티네스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훑고 지나갔다.
검은 쓸 만하나 경험은 한참 부족한 칼벤의 애송이와 나이 먹어 힘이 빠진 그레고리 그리핀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세비온 브룩스도 괜찮았다.
원래라면 까다로운 늙은이지만, 지금의 녀석은 흑기사단장과 펼쳤던 대련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마스터가 된 이후 최초로 겪은 일방적인 패배는 그에게 상당한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걱정해야 할 존재는 누구인가.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루루.’
노마법사의 시선이 금발의 청년과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고양이를 향했다.
저 둘만큼은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다.
특히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랬다.
종잡을 수 없는 고양이 요술사 녀석이야 말 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한 수준이었지만, 저 젊은 소드마스터는 확실히 위험했다.
이그넷이 뿜어내는 기세 앞에서 한 치도 위축되지 않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지만, 어쩌면 이미 세비온 브룩스보다 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대로 잘 풀렸으면 좋겠구만.’
둘에게서 시선을 거둔 페리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대편 입구 쪽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제1 탐사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하자.”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라바트의 마법사들이 능력을 발휘했다.
마력과 맞닿은 던전의 입구가 그그그극, 돌 갈리는 소리를 내며 개방되었다.
퍼엉
페리 마르티네스가 확인 차 불빛 한줄기를 쏘아 보냈다.
허나 깊은 바닷속에 조약돌 하나를 떨어뜨린 듯 어둠은 밝혀질 기미가 없었다.
“뭐, 당연한 거겠지. 진입합시다.”
세비온 브룩스를 향해 말한 페리 마르티네스가 앞장서서 던전 안으로 향했다.
방호 마법이 걸린 로브와 북부 자이로 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무장한 노마법사의 몸에서 숨길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본 탐사대원들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던전에 진입했다.
‘우리는 라바트 최고의 마법사와 함께한다.’
‘페리 마르티네스 님께서, 중부 최고의 마법사께서 우리를 인도한다!’
‘고대의 던전이라고는 하나 위험할 일은 없어! 페리 마르티네스 님만 믿는다!’
휘하 마법사들의 시선을 등으로 느끼며, 페리 마르티네스 역시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그렇다. 자신은 대륙 중부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 마법사이며, 던전 탐사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룬텔 왕국의 3가주를 제외하면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자신이 팔랑케의 기사 놈들과, 칼벤의 젊은 용병 따위에게 밀릴 리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던전을 휘젓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
없다.
아무도 없었다. 상념에 빠진 지 고작 몇 초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일행 전부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력의 변화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자신의 능력 밖에서 벌어진 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페리 마르티네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마력 결계가 아니라, 고대 신전이었을 줄이야.’
그가 고서적을 통해 얻은 지식을 떠올렸다.
마법사도, 요술사도, 아니 그 어떤 인간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찾아오는 고독한 시련.
그야말로 ‘신이 내린 시련’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 취해야 할 행동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의심과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페리 마르티네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곤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자신 정도 되는 마법사가 이 정도 시련에 무릎 꿇을 일은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그는 방향을 정한 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다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력 결계가 아닌 고대의 신전이라면,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줄어든다.
물론 바보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성기사와 고위 사제들로 이루어진 신성왕국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팔랑케, 칼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해가 큰 것도 우환거리였다.
그렇듯, 여러 가지 고민에 빠져 있던 페리 마르티네스의 머릿속으로 몇몇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필코 넘어서야만 하는 벽.
허나 여전히 넘어서지 못한, 아니 다다르지조차 못한 윗세계에 존재하는 인물들.
‘……룬텔의 가주들이라면, 신의 시험 아래에서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은은히 퍼지는 안개처럼 다가온 의혹이, 노마법사의 마음을 젖어 들게 만들었다.
그는 이를 애써 외면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든 그가 조금씩 커지는 불편함을 안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 * *
‘……신의 시련인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세비온 브룩스가 곧바로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자신 역시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인간 기름으로 뻑뻑해진 검을 쥐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이것이 현실이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과거에 사로잡힐 뻔했어. 정신 똑바로 차리자.’
잠시 호흡을 고른 소드마스터가 앞으로 나아갔다.
내전은 이미 30년 전에 끝났다. 자신도, 자신의 고국도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강하게 마음을 다잡은 그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적군들이 하찮은 미혹처럼 동강 나 사라졌다.
그렇게 수십 개의 시련을 이겨 내고.
마침내 저 멀리 빛나는 점을 발견한 세비온 브룩스가 걸어가며 생각했다.
‘꽤 곤란한 상황이겠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신조차 순간 움찔했을 정도로 진한 환상이다.
몇몇 믿음직한 수하들이야 괜찮겠지만,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상당할 것 같았다.
물론 최악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자비로운 신께서는 자격이 없는 자를 밀어 내거나 잡아 둘 뿐, 해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다만 던전을 무사히 공략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전력의 손실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페리, 그 녀석이 도착하면 물어봐야겠어.’
그가 더욱 걸음을 빠르게 하며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먼저 시련을 통과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그넷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인물들과 비교한다면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비온 브룩스였다.
그런 그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다른 사람 왔다.”
“…….”
자신이 본 빛이 고양이 요술사가 갖고 놀던 불꽃이었다니.
심지어 먼저 도착한 것은 루루만이 아니었다.
린제이 가의 천재, 일리아 린제이마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객들이 많구만.”
한 발짝 늦게 도착한 페리 마르티네스 역시 비슷한 충격을 받았는지, 곧바로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일리아 린제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믿기 힘들다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연회장에서의 일 때문에 한창 괴로워하지 않았었나?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시련을 돌파했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보다도, 세비온 브룩스보다도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것은 팔랑케의 최고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자존심 강한 둘은 침묵을 지켰고, 한동안 고요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후, 끝인가?”
“마르티네스 님!”
“브룩스 님, 역시 먼저 와 계셨군요.”
이후에도 시련을 통과한 이들이 속속들이 공동에 합류했다. 대부분이 라바트와 팔랑케 소속이었다.
물론 칼벤 측에서도 아미라 쉘튼과 그레고리 그리핀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무사히 어둠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고, 그러니까 마지막 통과자가 나오고 한 시간이 더 흘러도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탐사대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더 기다리는 건 힘들 것 같군.”
“그럼 제단을 찾아야 하는 거냐?”
“아마도…… 하지만 찾아낸다고 해서 다시 전력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하네.”
페리 마르티네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비로운 신께서 내린 시련이니만큼, 어둠 속에 방황하는 이들이 큰 해를 입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마 던전 내부에 있을 제단을 찾아 기도와 함께 간단한 공물을 바치면 그들과 조우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렇게 되찾은 탐사대원들이 여전히 전력감인지를 생각해 보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만…….’
쯧 하고 혀를 찬 노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발랄하게 불꽃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모습,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이어 가는 일리아 린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유로운 분위기가 못마땅했던 그가 질문을 던졌다.
“요술사 양반께선, 그리고 위대한 린제이 가의 아가씨께선 의견이 없으신가?”
딱히 해결책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용병이라고 해서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은 듯한 모습에 심술이 났을 뿐이다.
조금이지만 뛰어난 요술사와 소드마스터를 견제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헌데, 의외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슬며시 눈을 뜬 일리아 린제이가 페리 마르티네스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믿죠.”
“뭐?”
“신뢰를 갖고 기다리자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온갖 의혹과 불안, 불신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믿음과 신뢰를 갖추는 것이 이번 시련의 포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믿음 역시 필요하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린제이 양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료분을 믿고 있는 모양이구려.”
페리 마르티네스의 말대로였다.
사전에 예측했던 대부분이 시련을 통과한 가운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아이른 파레이라만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의외이긴 했으나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검의 경지가 높다고 해서 마음까지 강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혹은 강한 사람이더라도 때때로 약해질 경우가 있는 거니까.
그 외에는 솔직히 기대조차 안 갔다.
아직도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에 대한 수양이 모자란 이들이라고, 라바트의 궁정마법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왔습니다.”
그때였다.
일리아 린제이와 루루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에 따라 세비온 브룩스와 페리 마르티네스가,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의 고개 역시 한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3국의 모든 인원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
“…….”
벽난로 속 장작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밝은 빛에 휘감긴 대검을 든 채.
낙오할 뻔했던 이들의 등불이 되어, 은은한 미소와 함께 앞장서서 걸어오는 존재.
성스럽고 고결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걸어온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리아 린제이, 루루에게 눈웃음을 보인 뒤 페리 마르티네스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조금 늦어졌습니다.”
“…….”
일행의 믿음에 100퍼센트 보답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영웅처럼 당당한 자태로 노마법사의 앞에 바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