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무슨 일이 있었지 (2)
대륙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랫동안 변치 않았다.
크로노 검술관주 이안, 그의 라이벌 쿤, 신성왕국의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이 30년 가까이 드높은 영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륙에서 가장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명예가 이그넷에서 일리아 린제이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검으로 유명한 다섯 왕국을 비롯해서 대륙 서부 출신, 그리고 몇몇 성질 급한 사람들은 린제이 가의 아가씨야말로 역대 최고의 잠재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물론 모두의 의견은 아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여론이 바뀌기에는, 지금까지 이그넷이라는 걸물이 쌓아 왔던 업적은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명문가에서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던 이와 고아 출신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주장 역시 이그넷 쪽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게다가 작년 말.
대륙의 모든 이들이 존경에 마지않는 성기사, 율리우스 휼이 이러한 논쟁에 또 한 번 불을 지폈다.
‘이그넷은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20세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에게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지금 그녀가 보여 주는 성장이 그걸 가능케 만든다.’
이그넷의 재능은 과거가 아닌, 지금에서야 제대로 꽃피고 있다는 말.
이 충격적인 발언 이후로 이그넷 vs 일리아에 대한 논쟁은 대륙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술안주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대단한 팔랑케의 세비온 브룩스를 무시하고 연회장의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모든 이들은 그녀가 일리아 린제이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움직인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금발의 청년.
그런 그를 타는 시선으로 주시하는 흑발의 검귀.
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느낀 좌중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일리아 린제이가 아니라,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서로 아는 사이인가? 많이 달라졌다니…….’
‘어떻게 된 일이야?’
아이른 파레이라.
증명의 땅이 배출한 최고의 검사 중 하나로, 그 역시 최근 대륙을 뜨겁게 달구는 인물 중 하나였다.
22세의 나이로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말은, 그 대단한 크로노의 주인보다도 페이스가 빠르다는 뜻이었으니까.
허나 아무리 대단한 그라고 한들, 앞선 두 인물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부족했다.
당장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시점부터가 둘에 비해 늦었으며, 일리아를 꺾었다는 문제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아티팩트급 무기와 요술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다.
강렬한 열기를 흩뿌리는 이그넷과 서늘한 한기를 자아내는 일리아에 비해 인상이 흐릿한 것도 아이른을 저평가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지금.
후우욱-!
안 그래도 뜨거웠던 이그넷의 기세가 한층 더 열기를 더하고.
“…….”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결코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런 금발의 청년을 보는 순간.
좌중은 깨닫게 되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일리아 린제이를 꺾은 것이 요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말하지 않을 셈이더냐.”
더욱 무거운 압박 속에서, 이그넷이 다시 한번 상대를 다그쳤다.
삼백안(三白眼)에서 날아드는 시선이 쓰라렸다. 아이른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자신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버틸 만해.’
확실히 그랬다.
적어도 장인도시 데린쿠에서 이그넷을 만났을 때, 그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에는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말이다.
‘쓰러지지 않을 거야.’
무너지지 않을 거다.
이것은 이기고 싶다는 마음과는 달랐다.
상대의 눈빛이 자신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전신의 혈액을 용암으로 뒤바꿔 놓을 정도로 자극적이었지만, 지금의 아이른은 의식적으로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투쟁심을 억눌렀다.
이는 검사에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었으나, 이 자리에서는 다른 것을 보여 줘야만 했다.
자신을 향한 신뢰.
자신의 길을 향한 믿음.
자신의 검을 향한 확신과 그로 인해 피어나는 뜻과 신념.
오랜 방황을 통해 피어난 아이른 파레이라의 불꽃이, 전생과 현생을 이어오며 완성한 철검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퍼어엉-!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 정광이 번뜩였다.
그와 함께 밋밋하게만 보였던 그의 기도가 180도 변했다. 몇몇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최소 엑스퍼트, 아니 그중에서도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들만이 금발 청년의 의지를 알아보았다. 그의 일면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른의 기세를, 눈빛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고 있는 존재.
이그넷 크레센시아야말로 상대의 의지를 가장 진하게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 년 반 전에 겪었던 애송이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하고도 거대한 마음이었다.
“…….”
후우욱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른을 노려보던 이그넷이 일순 기세를 거두었다.
아이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간접적으로나마 흑기사단장의 기세에 노출되어 있었던 칼벤의 기사단장, 그레고리 그리핀이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아미라 쉘튼이 그를 부축했다. 그녀의 안색 역시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그넷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친애하는 칼벤의 기사단장 그레고리 그리핀 경, 본인의 무례로 심기를 어지럽힌바,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쿨럭, 쿠흡, 후…… 허허, 다음부턴 말이라도 먼저 해 주시오. 물러날 시간은 필요하지 않소?”
“지금의 실수는 추후에 따로 찾아뵈어 사과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허허, 괘념치 마시오. 명성이 자자한 흑기사단장의 기도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소.”
칼벤 기사단장의 너그러운 대처에 이그넷이 재차 예를 표한 뒤, 신형을 돌려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걸음이 끝난 곳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팔랑케의 최고기사, 세비온 브룩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있어, 장소를 생각지 못하고 추태를 부렸습니다.”
“……괜찮소.”
“라바트의 궁정 마법사께도 사과드립니다. 이 멍청한 녀석이 포탈의 좌표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이처럼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아니, 그, 그 정도야 뭐…….”
페리 마르티네스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예전에 한번 이그넷을 본 적이 있었다.
기사단장의 직위에 막 올랐던 그녀는 지금처럼 기품 있고 고상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말투부터가 시정잡배를 연상케 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지금의 흑기사단장은…… 빈틈이 없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가 위축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못 본 사이 많이 달라진 건 이쪽인데?’
정중함이라는 갑옷과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강렬하면서도 사나운 기세.
그야말로 전장의 한 가운데서 등장한 듯한 이그넷의 분위기에, 페리 마르티네스는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외람되지만, 임무가 끝나자마자 곧장 이동한 터라 기사단 전원이 고단한 상태입니다. 주최자께서 괜찮으시다면, 먼저 돌아가 휴식을 취해도 폐가 아닐는지…….”
“……그렇게 일정이 빡빡한 줄은 미처 몰랐소. 여봐라, 신성왕국의 귀빈들을 거처로 모셔라.”
“예, 나리.”
잠시 뜸을 들인 페리 마르티네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멀리서 대기 중이던 하인들이 빠르게, 그러나 상대를 자극하지 않을 몸짓으로 흑기사단원들을 모실 준비를 했다.
이그넷뿐만이 아니라 기사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잉, 아냐 파티 음식 먹을 생각에 기대했는데!”
그들 사이에 있는 이질적인 소녀의 존재 역시 하인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행인 것은, 그녀를 관리할 존재가 따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숙소에서도 말만 하면 맛있는 거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니까, 창피하게 하지 말고 떼 그만 써라.”
“싫어.”
“싫어도 좀 참아.”
“안 돼. 애는 참는 거 못해.”
“이걸 그냥…….”
부단장 게오르그 포이베가 고집불통 아냐를 전담하고, 다른 흑기사단원들은 하인의 안내를 따라 하나둘씩 거처로 이동했다.
허나 이그넷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연회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하고 있었다.
“…….”
전보다 옅어진 불길.
허나 여전히 열기를 잃지 않은, 은은하게 타오르는 숯불 같은 시선을 보내던 이그넷이 조용히 속삭였다.
엘프가 아니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허나 입모양만으로 충분했다. 아이른은 그녀가 전한 말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지켜보겠노라.’
여전히 꺼지지 않은 이그넷의 관심.
이를 확인한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움직였다.
‘얼마든지.’
소리 없는 대화.
잠깐의 교류를 마친 이그넷이 이윽고 신형을 돌렸다.
진한 존재감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바라봤다.
물론 그러한 시선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떠나고 없는 그녀를 대신해 좌중의 관심이 흑기사단의 부단장, 그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드레스의 소녀를 향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딱 한 사람.
이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했던 인물, 일리아 린제이만큼은 이그넷이 사라진 방향을 언제까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한마디의 말도.
아주 잠깐의 시선도.
견제도, 동정도, 비웃음도, 분노도 보이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그녀.
그에 대해 자신이 어떤 감정을 쏟아내야 할지, 일리아는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굳은 마음을 먹고 쓰라린 고통과 두려움을 감내하며 이곳까지 도달한 은발의 검사는, 자신조차 파악하기 힘든 마음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벌떡
그때였다.
지금껏 아무 말도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작은 존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제지할 새도 없이, 연회장의 중앙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성큼성큼이었지만 보폭이 좁은 탓에 꽤 오래 걸렸다.
“음?”
“누구지? 아냐한테 오는 건가?”
허나 그 덕분에 관심을 끌 시간은 충분했다.
소녀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게오르그, 아냐의 관심마저 완전히 사로잡은 와중이었다.
“너.”
그녀, 루루가 요술봉을 들고 아냐를 가리켰다.
“나?”
“그래, 아냐 너!”
“아냐를 알아? 난 너 모르는데?”
“날 왜 몰라! 너 바보야?”
아냐, 아니 작위를 받아 아냐 마르타가 된 요술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또래를, 그것도 이렇게 귀여운 자신의 또래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잊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뿔과 날개 달린 소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3초 후.
“아!”
“이제 알겠어?”
“아아아아아아! 보고 싶었어!”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루루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휙
냉정한 표정으로 날렵하게 허그를 피한 루루.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냐에게 말했다.
“너, 이그넷이랑 같이 나랑 아이른 괴롭혔잖아.”
“어?”
“나랑 친구 하기로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그때 왜 그랬어?”
“어어? 그, 그건 대장의 명령이라…….”
잔뜩 쏟아지는 추궁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냐.
그런 그녀를 루루가 어딘가로 데려갔다. 손이 잡힌 아냐는 순순히 끌려갔고, 연회장의 중앙에는 게오르그만이 남게 되었다.
“…….”
“저기, 안내해 드릴까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가 하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을 떠나는 부단장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