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87화 (187/388)

◈ 63. 무슨 일이 있었지 (1)

일리아 린제이는 평생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았다.

린제이 가문이라는 배경이, 검에 대한 재능이, 어린 시절부터 피어난 아름다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으나, 오빠인 칼 린제이의 마음이 꺾인 이후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재기하지 못했군.’

‘장차 대륙을 떠받칠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일리아 린제이? 대단한 재능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나…….’

‘마음도 여려 보이던데.’

좋은 이야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호적인 시선도 더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빠를 잃은 후, 일리아의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가문과 자신에 대해 제멋대로 떠드는 말들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매사에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려던 이유는, 하이에나처럼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대중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리아에게, 오랜만에 만난 주디스가 던진 말은 담담한 욕설이었다.

‘병신이야?’

‘뭐?’

‘병신 같다고.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어? 안 답답해? 언제까지 그 사람들 눈치 보면서 살 건데?’

‘하지만…….’

‘아니, 들어 봐.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네가 뭔 짓거리를 해도 똑같다니까? 네가 대륙 최고가 아니라 우주 최고 검사가 돼서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갈라도 뒷말은 나와. 아닐 거 같아?’

‘…….’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주디스가 욕설을 가르쳐 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행동하든 자신을 물어뜯을 놈들이라면, 구태여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자.

대신 욕이나 퍼붓자. 마음이라도 개운하게.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얼어붙은 연회장의 분위기 속, 당시의 일을 떠올린 일리아가 생각했다.

주디스의 특훈 덕분에 예전보다 입이 많이 험해지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욕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브랫이나 주디스처럼 격 없는 친구에게라면 모를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시원하게 속마음을 쏟아내기엔 아직 마음의 빗장이 너무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당황스럽고, 낯뜨거웠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에 뜨악한 사람들의 눈빛이, 표정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몸속에 뜨끈한 수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한 줄기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쁘지만은 않은데.’

일리아가 한 차례 더 욕을 내뱉은 것은 그래서였다.

“****.”

움찔.

또다시 반응이 온다.

격하진 않지만, 충분히 티가 난다.

자신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거나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모습이 견딜 수 없는 압박으로만 다가왔을 터.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싱긋 웃으며 아이른 파레이라와 루루를 쳐다본 일리아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른, 앉을까?”

“어? 어어…….”

“루루, 요술봉 주워 줄게. 공들여 만든 건데 떨어뜨리면 안 되지.”

“응, 으응…….”

당황한 것은 라바트와 팔랑케의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 편인 칼벤 측의 인사들, 심지어 아이른과 루루마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기사단장인 아미라 쉘튼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기사단장은 그저 허허 웃었다.

물론 마냥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아서 티는 나지 않지만, 칼벤 기사단장 그레고리 그리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난감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보단 저쪽이 느끼는 부담이 더 클 것이다.’

일리아가 욕을 한 이유야 뻔했다.

당장 자신의 귀에도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는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이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마 라바트와 팔랑케 측도 이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과연 저쪽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시비 없이 넘어갈 것인가?

나쁘지 않다. 아무 탈 없이, 밀리기만 하던 기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셈이니까.

따지고 들 것인가?

귀찮긴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감히 소드마스터, 그것도 린제이 가의 금지옥엽을 상대로 보여 왔던 무례를 전부 모른 척하지 않는 이상, 우리 쪽에서도 할 말은 있으니까.

오히려 이를 잘 대처해 일리아 린제이의 기분을 풀어주면, 린제이 가문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침착하고 어른스럽다고 알려진 처자가 저렇게 험한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군.’

생각을 마친 칼벤 기사단장이 다시금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착석한 일리아 린제이를 향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옆자리, 아이른 파레이라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은발의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불편한 고요함 속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헛기침 소리.

잠시 후, 그 소리에 떠밀려 나온 것 같은 표정의 페리 마르티네스가 일리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와중에도 강렬한 눈빛이 그녀에게 꽂혔다.

린제이 가의 재녀도 지지 않았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그녀가 시선을 맞받았는데, 분명 이전과 같은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한층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옆을 보며 말했다.

“아미라, 긴장 풀어라.”

“예! 어? 아니, 제가 뭘…….”

“이런 건 내가 한다고 했잖느냐? 신경 쓰지 말거라. 식사는 조금 이따 하고. 지금 먹다가 체할라.”

“그, 저…… 예. 알겠습니다.”

몇 마디 말로 아미라 쉘튼을 진정시킨 그가 빠르게 일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더 큰 실수가 나오는 것은 칼벤 입장에서 좋지 않았다.

어떤 말로 상대해야 저 마법사 녀석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그레고리 그리핀이 빠르게 머리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기 그지없던 연회장의 중심부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우우우우우웅-!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진동음.

그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세로로 쫙 갈라졌다.

그러자 어두운 천막을 검으로 가른 듯 찬란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이 놀라운 광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한 차례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뒷일을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그들의 예상대로 타원형으로 확장된 황금색 포탈이 사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제 부츠가 대리석과 맞닿아 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개전을 앞둔 이들처럼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내는 소리였다.

검은색의 망토와 심장 부근의 마크가 말해 주었다. 그들이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흑기사단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제야 걱정을 놓은 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들을 향한 관심이 옅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륙 최강국이라 알려진 아빌리우스의 삼대 무력단체.

그 수장이 곧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고아에서 용병대장으로, 용병대장에서 초강대국의 기사단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녀의 모습을 기대하며, 연회장에 모인 모두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황금색의 포탈을 계속해서 주시하였다.

후우웅

후웅

그러는 사이에도 흑기사단원들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열, 열다섯, 스물.

꽤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삼국의 기사들이 침음을 흘렸다.

겉으로 풍기는 만만치 않은 기도가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허나 곧이어 나온 인물은 그런 갑갑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릴 만큼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진한 화장과 검은색 드레스의 소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할 말을 내뱉었다.

“어? 실수했다. 연회장 밖에다 포탈 만들려고 했는데.”

“요술 금화를 아끼니까 실수가 생기는 거 아니야. 앞으로는 아까워도 제대로 지불해.”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말을 말자.”

그런 소녀의 뒤를 따라 나온 잿빛 머리의 기사.

그의 나른한 얼굴을 본 삼국의 검사들이 표정을 굳혔다.

드레스 소녀와 달리 이 자는 아는 인물이었다. 이그넷과 마찬가지로 실력을 인정받아 부단장의 지위에 오른 자였다.

‘게오르그 포이베…… 마스터라고 했던가.’

대륙에 100명밖에 없는 거물의 출현에 페리 마르티네스가 가늘게 눈을 좁혔고, 그 밖의 강자들 역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쩔 수 없었다. 성국의 전력은 협력자이기에 앞서 전리품을 나눌 경쟁자다.

그들의 힘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후우웅-

스팟

그러한 무의미한 전력 비교는, 포탈이 마지막 사람을 뱉어내고 사라짐과 동시에 완전히 끝이 났다.

신성왕국의 무력 서열 3위.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

좌중을 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에, 대부분이 옆이나 밑으로 고개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화아아악-!

강자는 어떠한 분위기를 보이는가.

저마다 다르겠지만,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눠질 터였다.

웬만한 수준은 알아차리지조차 못할 정도로 평범한 쪽과, 보는 순간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기도를 풍기는 쪽.

이그넷은 절대적으로 후자였다.

기가 약한 사람들은 강렬한 빛을 마주한 듯,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조차 못했다.

“…….”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자 중의 강자.

그중에서도 검에 일평생을 바쳐온 존재, 예를 들어 팔랑케의 최고기사 세비온 브룩스의 경우는 범인들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떨리는군.’

심장이 두근거렸다. 뜨겁게 몸을 휘도는 피가 자신의 기분을, 흥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약한 사람은 다가갈 수조차 없지만, 자신과 같은 강자의 마음에는 사정없이 불을 지피는, 그런 사람.

‘한판 붙고 싶다.’

저벅

세비온 브룩스,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는 것은 알고 있다. 상관없다.

자국보다 훨씬 강대국의 인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관없다.

그런 것 따위, 검사와 검사 사이에선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못한다.

적어도 지금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나…….

“…….”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비온 브룩스 쪽이 아니었다.

걸음도 마찬가지였다. 팔랑케의 최고기사를 공기 대하듯 지나친 그녀가 연회장의 구석진 곳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이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번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못 본 사이 달라졌구나, 많이.”

“…….”

”말하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태양처럼 뜨거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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