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당혹스럽다 (2)
팔랑케의 최고 기사, 세비온 브룩스는 늦은 저녁 연무장으로 나와서 검을 빼 들었다.
라바트의 영지에 도착한 게 당일 오전이기도 하고, 다른 할 일도 많았기에 수련을 하루 거를까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후에 만났던 범상치 않은 젊은이 때문이었다.
‘그처럼 자신의 속을 깊게 들여다보는 청년은 처음이었지.’
명상 수련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예전에야 육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가다듬는 것에만 집중했던 검사들이지만, 신성왕국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오크족과 교류한 이후부터는 달라졌다.
뭣도 모르고 가부좌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시골 무관에도 여럿 있을 정도였으니까.
허나 금발 청년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일정하게 호흡을 유지하고, 올곧은 자세를 유지한다.
그 상태에서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이는 웬만한 집중력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집중력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시야도…… 감각도 훌륭했다.’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헌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년은 일정 부분 여력을 남겨 두었고, 이를 주변을 경계하는 데 사용했다.
자신이 다가온 것을 20분 만에 파악한 것이 그 증거였는데, 이는 그의 젊은 외모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저 나이일 때는 어땠지?’
피식, 세비온 브룩스가 웃음을 흘렸다.
말할 것도 없었다. 둘 다 엉망이었다.
명상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날카롭게 감각을 벼려 놓고 있던 젊은이와는 절대로 견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탐이 났다.
무려 20대 후반의 나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던 자신이다.
그 말은 오후에 만났던 청년 역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대륙에 몇 안 되는 재능이었다.
‘안 되겠어. 도덕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이번 던전 탐사 기간에 잘 구슬려서 우리 쪽으로 포섭해야겠어.’
페리 마르티네스의 말을 들어 보면 라바트의 인사는 아니다. 그렇다면 칼벤 출신일 터였다.
아마 비밀리에 육성하고 있다가, 여러 강자가 모이는 이번 탐사를 통해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놔둘 생각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저만한 인재를 칼벤 같은 곳에, 탈탈 털어 봤자 엑스퍼트 셋밖에 없는 소국에 내버려 두는 것은 개인의 손해를 넘어 대륙의 손해이기도 했다.
‘적어도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지.’
암, 그렇고말고.
속으로 중얼거린 세비온 브룩스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본인 얼굴에 금칠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이게 맞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은 가르치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다.
네 명의 엑스퍼트를 길러낸 자신이라면 조금 더 당당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룩스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신 것 조사해 왔습니다.”
“으음! 들어와라.”
때마침 지시했던 일도 마무리가 되었다.
금발 청년의 출신을 알 겸, 칼벤 측 탐사대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라고 말해 놓은 차였다.
세비온 브룩스의 말을 들은 부하가 공손히 문서 꾸러미를 넘긴 뒤 방을 나섰다.
다시 혼자가 된 그는 익숙한 인물들을 제쳐 놓고 문제의 젊은이부터 찾아내기 위해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이가 나오게 전에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칼벤 측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믿을 수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중부도 아니고 서부의 소드마스터가, 그것도 대륙을 진동시킨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러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신성왕국 아빌리우스 측의 책임자가 누군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대륙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사건.
린제이 가와 흑기사단장 사이에 있었던 악연을 생각하니 비로소 퍼즐이 맞춰졌다.
일리아가 어째서 여기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말이다.
‘골치 아프구만.’
세비온 브룩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린제이 가의 아가씨가 칼벤에 합류한 것은 독단적인 결정이었을 터였다.
린제이의 가주인 조슈아 린제이가 정치적으로 복잡해질 만한 일을 딸에게 허락했을 리는 없으니까.
허나 중요한 건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자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철저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 참, 마스터라고 해서 철부지가 아닌 건 아니군. 너무 어려.”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한 행동을 보이다니.
증명의 땅에서 겪은 패배가 그녀의 마음에 영향을 줬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식을 들은 자신도 놀랐던 일이니, 당사자인 일리아 린제이는 충격이 더욱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라면 홧김에 이그넷을 만나러 오는 대신, 부족함을 느끼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을 테지만 말이야…… 잠깐.’
여기까지 생각하던 세비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일리아, 그리고 이그넷에만 멈춰 있던 사고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증명의 땅에서 일리아를 꺾은 대륙의 신성(新星) 쪽으로 말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그의 나이, 외모, 분위기, 그 밖의 모든 것을 떠올린 그가 빠르게 문서를 뒤적였다.
그리고 특정 페이지에서 손을 멈추고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금발 청년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은 세비온 브룩스가 조용히 눈을 감고 오후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미치겠군.’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야 보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자만.
그것을 걷어내고 객관적인 눈으로 당시를 상기하자, 애초 판단보다도 더욱 대단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이 그림처럼 명료하게 그려졌다.
자신의 기척을 파악했음에도 깨어지지 않았던 평정심.
그저 규칙적인 것을 넘어 소름이 끼치도록 절제되어 있던 호흡.
떠나갈 때 보였던 발걸음, 밸런스, 그리고 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까지도.
어느 것 하나 엑스퍼트가 가지기 힘든 수준의 것이었다.
“……불쾌하다.”
조용히 눈을 뜬 팔랑케의 최고 기사, 세비온 브룩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혹스러웠다. 조금이지만 기분도 나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기만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던 탓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강하게 피어난 감정은 따로 있었다.
‘부끄럽군.’
그렇다. 지금의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마스터씩이나 되었으면서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당한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청년의 정체를 알아챈 지금조차도 모른다. 그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는지를 말이다.
‘정말로 소드마스터가 맞을까?’
‘아마 그건 사실이겠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그렇다면 어느 정도일까. 이제 갓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상태일까?’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세비온 브룩스가 재차 눈을 감았다.
일리아의 참여로 인한 정치적 변수?
그런 건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팔랑케의 고위 귀족이기에 앞서, 그는 엄연한 기사이자 검사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
두 천재 검사들의 실력을 예상하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 * *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라바트가 자랑하는 전투 마법사, 페리 마르티네스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종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견제조차 필요 없다고 여겼던 칼벤 측에서 소드마스터를 무려 둘이나 대동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둘 중 하나는 그 대단한 린제이 가문의 재녀로, 역대 최연소 소드마스터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이제 스물이 될까 말까 하는 어린 나이지만, 절대로 자신보다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린제이 가문, 아단 왕국 역시 던전에 한 스푼 걸치려는 걸지도 몰라!’
아니, 페리 마스티네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린제이 가와 이그넷 간의 악연은 그저 명분일 뿐, 진짜 목적은 이쪽이라고 확신했다.
‘허허, 오해올시다. 일리아 린제이 양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당연히 권리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녀,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어디까지나 용병의 신분으로서 탐사에 참여하고, 사전에 협의된 보수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당연히 우리 칼벤 측에서 부담할 테지요.’
‘하지만…….’
‘그만. 설마 우리 칼벤이 일개 가문에 휘둘릴 정도로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합시다.’
물론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탐사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기도 했고, 칼벤의 기사단장 그레고리 그리핀이 녹록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력만 따지면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퇴물이지만, 언변만은 자신보다 나은 양반이었으니까.
“에휴. 생각대로 되는 게 없구만.”
결국 라바트 측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칼벤이 더 큰 헛짓거리를 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하는 것, 그리고 던전 탐사에서 큰 활약을 보여 더 많은 보물을 요구하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라바트가 다른 3국에 비해 마법 전력에 있어서만큼은 독보적이라는 점이었다.
‘던전 탐사에 있어서 마법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검 한 자루면 어느 상황에서든 안정적으로 무력을 뽐낼 수 있는 검사와 다르게, 마법사에게는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번거롭고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과정이, 도구가 줄줄이 필요하다.
허나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불편하고 귀찮은 준비 작업이 끝나기만 한다면 마법의 효율을 두 배, 세 배 이상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야말로 던전이라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가장 적합한 전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 여전히 나쁘지 않아.’
페리 마르티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던전을 위해 대륙 동부의 던전 전문가를 초빙했고, 수많은 탐사 도구를 만들어 냈다.
여전히 상황은 괜찮았다.
애써 자신을 위로한 그가 후우, 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돌렸다. 밤공기가 차니 산책은 이쯤 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우우우웅-!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파동!
그것을 느낀 순간, 페리 마르티네스는 전력을 다해 마법을 사용하여 힘의 진원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슉
슈슉
그의 신형이 끊임없이 점멸했다.
1~20m의 거리를 지워 버리듯 순식간에 이동하는 그의 모습은 마법사가 보기에도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동부의 수준 높은 마법사들도 이만큼 빠르게, 연달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아이러니한 일은, 그 대단한 페리 마스티네스조차 놀랄 정도로 진한 마력의 움직임이 영지 내에서 느껴졌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팔랑케인가? 세비온, 그 작자가 마법사를 구한 건가?’
‘하지만 어떻게? 이만큼 거대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라니…….’
‘룬텔 왕국 3가문의 가주는 되어야 가능한 일을?’
수많은 질문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페리는 쉴 새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
부담이 갈 정도로 빠른 시전에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호기심에 잠긴 마법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늦지 않게 의문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일을 벌인 존재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대한 마력을 다룬 존재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드래곤?”
“응? 나?”
중년 마법사의 목소리를 들은 이가 고개를 돌렸다.
앙증맞은 뿔과 날개를 달고 있는 전투 마법사 복장의 소녀, 루루.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페리 마르티네스를 바라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나 드래곤 아닌데? 고양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