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84화 (184/388)

◈ 62. 당혹스럽다 (1)

팔랑케와 라바트는 중부대륙에서 나름 알아주는 왕국들이다.

거베라 왕국처럼 대단한 국력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국가인 칼벤과 비교하면 충분히 강대국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각각이 자랑하는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으니.

‘팔랑케의 소드마스터 세비온 브룩스, 그리고 라바트의 페리 마르티네스.’

그렇다.

바로 이 둘이, 아미라 쉘튼이 그토록 고급 전력을 구하려는 이유였다.

세비온 브룩스야 말할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검사라면 누구라도 바라마지 않을 경지에 올라선 지 10년째인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라바트의 페리 마르티네스가 그에 비해 만만한 인물이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아니었다.

오히려 던전 탐사 분야에서는 소드마스터보다 뛰어날 수도 있는 것이 고위 마법사라는 존재였으니까.

‘전투력만 따지면, 마법왕국 룬텔의 3가주와 비견될 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말은,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히 중부 최고의 마법사 소리를 듣는 게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미라 쉘튼이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전력이라고는 한 줌밖에 없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칼벤 역시 부족하지 않을 전력을 갖추었다.

아직 20대 중반도 안 된 어린 검사들이라고는 하나 무려 소드마스터가 두 명이다.

아마 그들의 실력을 보는 순간 팔랑케와 라바트, 심지어 아빌리우스까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경 쓰이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리아 린제이…… 이그넷 크레센시아 때문에 던전 탐사에 참가한 거겠지?’

린제이 가와 이그넷 크레센시아 간의 악연은 유명하다.

딱히 누군가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끝이 워낙 좋지 않게 끝났기 때문이다.

일리아 린제이가 이그넷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일리아 린제이는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끌어오지 않겠다고, 자신은 린제이 가의 인물로서가 아니라 일개 용병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못을 박았지만…… 그래도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허허,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말거라. 이런 일은 늙은이한테 맡기고, 너는 던전 탐사에만 온전히 집중해도 된다. 팔랑케와 라바트로부터 있을 항의도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그래도 다행인 건, 제1 기사단의 단장인 그레고리 그리핀이 복잡한 일들을 전담하겠다고 말해 줬다는 점이다.

나이가 지긋해 은퇴 직전의 몸 상태인 탓에 직접 현장에 참여할 순 없지만, 그는 정치와 외교적인 능력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염려하지 말라고 했으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속으로 중얼거린 아미라 쉘튼이 또다시 한숨을 내쉰 뒤, 바늘과 천을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십자수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이거만 한 게 없단 말이지.’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십자수를 무척 좋아했다.

한 땀, 한 땀 쌓아 가며 원하는 결과물을 완성했을 때의 재미는 시원하게 검을 휘두를 때와 다른 쾌감을 선사하였다.

물론 부하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위엄있고 강인해야 할 부단장이 투박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바늘을 움직이다니.

그런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물론 들킬 염려는 없었다. 방문을 꼭 잠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요술 고양이마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뾰로롱-!

“아미라, 뭐해?”

“…….”

“아, 나 그거 알아! 십자수? 십자수 맞지?”

나도 그거 하고 싶은데. 그런데 손이 이래서 못 해…….

자신의 앞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루루.

그런 그를 보며 아미라 쉘튼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루, 아무 때나 막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 왜 안 된다고 했지?”

“나는 사생활이 있는 사람이라고. 밖에서는 부단장으로서 멋있고 기품 있는 모습을 유지하지만, 사적인 장소에서는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취미도 즐기고, 편한 차림도 하고…… 그러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나는 고양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루루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아미라 쉘튼의 표정에 망설임이 피어났다.

저 말에 설득력이 있고 없고는 둘째치고, 그녀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다만 업무가 워낙 바쁘다 보니 애완동물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미혼인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도 하고 대소변도 가리는 고양이가 이렇게 놀러 오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생각으로 최근 루루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아미라였다.

이 요술 고양이는 왠지 모르게 자신을 좋아했으니까.

“아미라, 있어도 되지? 아미라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조금 닮아서 마음에 들어. 그래서 같이 있고 싶어.”

“……많이 닮았니?”

“많이 까지는 아니고, 조금? 화낼 때와 비슷해.”

“그 사람도 검사야? 나이가 어떻게 돼?”

“검사 맞아. 그리고 아미라보다 어려. 이제 20살 됐나? 아직 안 됐나? 근데 엄청나게 잘 싸워!”

“오…….”

마치 자신의 일처럼 뽐내는 루루를 보며 아미라 쉘튼이 팔짱을 꼈다.

고양이 요술사라는 신비로운 존재가 인정하는 젊은 유망주라니,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혹시, 그 사람 소개시켜 줄 수 있어?”

“응? 왜?”

“아니. 검사면 내가 검도 알려 주고, 나랑 닮았다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친해지면 좋잖아.”

“그래. 나중에 소개시켜 줄게!”

“진짜?”

“응. 그런데 걔가 아미라보다 셀 거야.”

“…….”

“왜?”

“아니야.”

아미라 쉘튼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십자수에 열중하는 그를, 루루가 꼬리를 흔들며 지켜봤다.

* * *

칼벤의 던전 탐사대에 합류하고 열흘 후.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아미라 쉘튼을 비롯한 인원들과 함께 라바트로 이동했다.

특별히 귀찮은 일은 없었다.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전까지는 편하게 지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편하게 지내라고 해서 마냥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일리아는 일리아 나름대로, 루루는 루루 나름대로.

그리고 아이른 역시 자기 나름대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

연무장의 구석,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그가 명상에 빠져들었다.

“후우…….”

느리게 이어지는 심호흡, 하늘을 향해 손과 발이 드러나는 가부좌 자세.

세상에 퍼진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기에 적합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아이른은 오행신공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그넷을 만나기 전,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대륙 북서부에서 중부까지 오는 동안,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이 이그넷을 만나러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했던 제안 때문에?

그녀에 대한 투쟁심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의 이그넷은 아이른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고, 분함을 안겨 주었다.

자기 자신의 미숙함과 나태함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이그넷이 견딜 수 없이 짜증 났고, 또 부러웠다.

그렇기에 그토록 지기 싫다는 감정이 컸는지도 몰랐다.

허나 그러한 마음이 모든 불꽃을 아우르는 중심이냐고 물어본다면, 아이른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든 것은.

꿈속 사내로부터, 젊었던 시절 사내의 분노에서 벗어나 자신의 검을 세울 수 있게 하여준 것은, 투쟁심이 아닌 세상을 향한 선의였기 때문이다.

‘생각하자. 전생의 내가 마지막에 깨달은 것을.’

‘마지막의 마지막에, 아쉬움과 후회로 떠나보낸 유지를.’

‘그것을 사내의 방식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이어 나가자.’

‘카라쿰의 조언으로, 타라칸의 가르침으로 갈고닦아, 나의 뜻을 세워나가자.’

화르륵-!

마음속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거센 열기는 이내 전생의 사내가 남긴 강철을 뒤덮어 더욱 날카롭게, 더욱 뜨겁게 변모시켰다.

아이른이 이를 쥐었다.

사내의 의지를 휘두르긴커녕 그에 끌려다니기 바빴던, 때문에 이그넷의 훈계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랐다.

지금의 그는 온전히 자신의 검을 세운 상태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의 앞에 서려는 이유는, 그녀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온전히 졸업하기 위함이었다.

‘이그넷 역시, 어떤 의미로는 내 스승이라고 할 만한 존재니까.’

아이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정리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에 따라 잠시 불안정했던 기도도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가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50대의 사내가 자신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른이 물었다.

“언제까지 지켜보실 생각입니까?”

“알고 있었나?”

“…….”

“나름 기척을 감춘다고 노력했는데 말이지.”

“…….”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높낮이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표정도 그리 역동적이지 않다.

허나 중년인의 놀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아이른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는 지금의 명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상대의 흥미가 더 강해질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은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20분쯤 됐습니다.”

“감각이 좋군. 나는 눈을 뜨기 전까지 모를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

아예 모르는 척을 해야 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어렵게 대할 필요 없다는 판단이 섰다.

상대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미라 쉘튼에게서 들은 정보도 있고, 상대의 기도가 심상치 않은 부분도 있고.

그렇다면 아마 지위와 영향력 역시 대단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 전에, 그는 한 명의 검사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사가 검사의 수련을 빤히 지켜보고, 방해하는 게 무례라는 건 이 사람도 알고 있을 테니…….’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이를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온건한 말투로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

허나 그의 입꼬리는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하다. 재능 있는 젊은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리는 걸 주체하기 힘들어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라.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중년인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른이 살짝 숨을 내쉰 뒤, 다시 눈을 감았다.

허나 그는 집중을 이어갈 수 없었다.

훌쩍 떠나 버릴 것 같던 중년의 검사가, 다시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직전처럼 자신의 앞에 마주 앉은 것은 아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로 앞에서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정도는 아니니까.

사실 방으로 들어가서 이어 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동하는 사이에 몰입이 깨지는 게 더 별로일 것 같았기에 아이른은 자리를 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우우우우웅-!

또 다른 불청객.

중년의 검사와는 달리 강렬한 기세가 드러났다.

검사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 역시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일까?

라는 고민은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른의 귓가에 두 중년인의 말소리가 들어왔다.

“페리. 애꿎은 젊은이 괴롭히지 말고 썩 꺼져라.”

“무슨 소리야? 구경만 하고 있는데. 오히려 자네가 내게 말을 걸어서 방해가 된 것 아닌가?”

“이 청년은 내가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는 것도 알아챌 정도로 감이 예민하다. 너처럼 마법사티를 풀풀 내고 다니면 당연히 집중이 깨질 수밖에 없지.”

“아, 그런가? 이거 미안하군. 그럴 의도는 없었네.”

“……괜찮습니다.”

아이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물론 그가 괜찮다고 한 것은 앞으로도 계속 떠들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이 등장한 마법사, 페리 마르티네스는 소드마스터 세비온 브룩스만큼 진중한 사내가 아니었다.

“확실히 비범한 청년 같기는 하군. 내 이름을 듣고도 평정을 유지하고 명상을 이어 가다니. 탐나는데?”

“헛소리하지 마라. 마법사가 검사에게 눈독을 들인다고?”

“안 될 거 있나? 골방에서 마도구나 연구하는 녀석들하고 다르게, 전투 마법사는 심신이 고루 발달한 편이 좋아. 저처럼 신체 건장하고, 집중력도 뛰어나 보이는 이를 보면 탐이 나는 게 당연하지. 혹시 자네, 저 청년을 제자로 받고 싶은 건가?”

“…….”

“이거, 내가 정곡을 찔렀구만. 안 될 말이지, 자네가 가르치는 방식은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요즘 젊은이들하고는 영 맞지 않아.”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와 저 젊은이, 둘 사이의 문제일 뿐. 그리고 저 청년의 재능이면 충분히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나보다 빨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지도 몰라.”

“아니, 둘 사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죄송하지만, 수련이 끝나서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반대편으로 사라졌고, 중년의 소드마스터와 고위 마법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영원히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말수가 많은 페리 마르티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도망갔잖나.”

“……네 녀석이 시끄럽게 굴어서 떠난 거다.”

“뭐, 그럼 그렇다고 치지. 아무튼, 궁금하군. 우리 왕국 젊은이는 아닌 것 같고…….”

“우리도 아니다.”

“그럼 칼벤 쪽이라는 건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내일부턴 방에서 해야겠어.’

연무장은 검술을 수련할 때만 사용하자.

울려 퍼지는 두 중년인의 대화를 들으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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