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각자의 길을 향해 (4)
아이른 파레이라와 일리아 린제이, 루루가 두르칼리를 떠나기 전, 조촐한 송별회가 열렸다.
사실 조촐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참가하는 이는 고작 여섯밖에 되지 않지만, 그 면면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쿠바르는 당연한 거지만, 타라칸과 카라쿰, 구르가르 님까지 전부 참여할 줄은 몰랐는데…….’
주디스와 브랫이 떠났을 때는 끼지 않았던 셋이었기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르가르야 워낙 넉살이 좋은 유령이고, 타라칸과 카라쿰 역시 지난 2달간 상당히 친해졌다.
일리아는 낯을 가리는 편이니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터억-!
“역시 송별회는 술이지.”
“…….”
“…….”
“이거 다 마실 거야?”
테이블에 쌓인 엄청난 술병들을 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랫이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한 병씩 하지. 아, 자네들은 잔 필요하지? 잠깐만…….”
심지어 세 부자와 구르가르는 잔에 따르지도 않고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는데, 그러면서도 맛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세심함마저 보여 주었다.
“음, 역시 좋군. 스파이시한 향과 체리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어.”
“피트한 향도 살짝 나는 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아버지 한 병 더 드릴까요?”
“당연한 소리를. 그리고 이런 거 있으면 자주 좀 꺼내라.”
“부족장이라도 이런 걸 자주 마실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쿠바르, 이 스승도 한 병 다오. 생전엔 건강 생각해서 조절했는데, 죽으니 이럴 때는 좋구만.”
“……그런 식의 농담은 참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뭐야! 설명 들으니까 나도 마시고 싶어!”
한 번 마실 때마다 온갖 전문적인 미사여구를 쏟아내는 오크들.
그에 혹한 고양이 요술사가 공중에 뛰어올라 변신하였고, 이를 기껍게 지켜보던 쿠바르가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의외로 루루는 꺼리는 기색 없이 연거푸 세 잔을 받아마셨다.
“아, 돈다 돌아.”
슈루룩-
물론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곧바로 고양이로 돌아온 그가 아이른의 품에 안겨 고롱고롱 잠에 빠져들었다.
“저도…… 여기까지만…….”
“허허, 벌써 끝인가? 저번에 봤을 땐 꽤 마시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약한 모습…….”
“****.”
“?”
다음으로 취한 사람은 일리아 린제이였다.
주디스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주량이 받쳐 주는 그녀였지만, 그렇다 해도 괴물 같은 주량을 지닌 네 오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언제 욕을 했냐는 듯, 얌전한 인사와 함께 숙소로 향하는 일리아.
다행히 비틀거리는 모습은 없었다. 웃는 얼굴로 친구의 빈틈을 구경하던 아이른이 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살짝 취한 눈으로, 쿠바르를 쳐다보았다.
‘쿠바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쿠바르는 그야말로 스승을 넘어선,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장 마음의 불꽃을 키워내라는 말을 해준 것도 쿠바르였고, 여러 불씨를 지필 수 있도록 적절한 조언해준 것도 쿠바르였다.
심지어 평생의 수수께끼였던 전생의 기억 역시 두르칼리에 와서 해결했으니,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은 이 돌팔이 점술사 덕이 8할 이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듯 그와의 여정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살짝 복받치는 기분이 들었다.
술보다도 감정에 취한 느낌에 어떻게든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른을 응시하고 있던 쿠바르가, 나직이 말했다.
“고맙네.”
“…….”
“처음 자네에게 다가갔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 그저 오지랖일 뿐이었어.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타지를 떠돌며 쌓인 외로움이, 남들보다 조금 특이한 자네 기운이 나를 충동질했을 뿐이지. 보다 어른으로서 젊은 청년을 이끌어줘야겠다는 자만도, 조금은 있었고.”
“자만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쿠바르의 말대로예요. 쿠바르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까지도 내 길이 뭔지 모르고 방황하며 지냈을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해 준 거라고 해 봤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을 적당히 던져 줬을 뿐이지. 조언은 특별한 게 아니야. 그걸 자네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진짜로 대단한 점이거든.”
“…….”
“도움받고, 위안받고, 따끔하게 채찍질을 당한 것은…… 우습게도 자네가 아닌 나였어.”
잠시 눈을 감은 쿠바르가 지난 여정을 하나씩 떠올렸다.
가장 처음 아이른의 비범함을 느낀 것은 알하드 산채에서였다.
선한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을 단순히 혼자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에 퍼뜨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모습.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는 질문을 이것저것 던지며 최선의 방향을 추구하던 그의 눈빛.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른은 단단해졌고, 뜨거워졌다.
이 젊은 인간은 이그넷이라는 괴물을 만났을 때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증명의 땅의 챔피언을 앞에 두고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자기 뜻을 관철해 나갔다.
할 수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올곧은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손에 쥐고…… 끝끝내 기적을 이뤄낸다.
힘들다고 도망치지 않고, 괴롭다고 외면하지 않고 말이다.
“17년간 이어져 오던 나의 방황을, 도망을 끝내준 것은…… 자네 덕분이었어.”
“…….”
“사내의 전생을 확인하기 전부터, 자네가 뜨거운 신념을 세우기 전부터…… 자네는 나에게 있어서 이미 영웅이었다는 말이네.”
후우, 말을 끝낸 쿠바르가 살짝 숨을 뱉었다. 아이른의 코끝에 알코올 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는 취하지 않았다.
여전히 또렷한 정신으로, 여전히 진중한 눈빛으로.
자세를 고쳐앉은 그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아, 아니…….”
당황한 아이른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쿠바르를 바라봤다.
헌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점술사 구르가르가 제자를 따라 절을 올리고.
“형님의 마음을 돌려줘서 감사하네.”
두르칼리의 부족장인 타라칸이 따라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송별회 내내 술만 들이켜던 오크족 대전사, 카라쿰마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한 태도를 보인 그가 말했다.
“고맙다, 젊은 영웅.”
“…….”
“평생의 짐을 덜어낼 수 있게 해 줘서, 아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숙인 고개 아래로 찔끔 흐르는 눈물.
그것은 전대 족장의 눈물도, 대전사의 눈물도 아닌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감정이 들끓은 것을 느낀 아이른 역시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오크의 방식대로 마주 절을 올린 그가 말했다.
“쿠바르만의 영웅이 아니라, 모두에게 영웅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이른 점심을 먹고 두르칼리 성채를 떠났다.
루루와 일리아가 약간의 숙취를 겪었지만 괜찮았다. 오크 전사 하나가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저는 여기까지군요. 살펴 가시길.”
물론 그런 서비스를 언제까지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적당한 도시에 일행을 내려준 오크 전사는 마차를 끌고 두르칼리로 돌아갔고, 그들은 다시 셋이 되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아이고, 반갑습니다! 귀하신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곧바로 새로운 마부를 고용한 일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일행의 살림은 오로지 쿠바르에 의해서만 돌아갔다.
즉, 아이른과 일리아, 루루만으로는 제대로 된 여정을 이어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자네끼리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사람 하나 고용하게. 그게 훨씬 나을 거야.’
아이른도, 일리아도, 루루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숙이 낀 일정을 자신들만으로 이어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리하여 인원은 다시 네 명이 되었고, 아이른 일행은 훌륭한 마부의 솜씨를 만끽하며 여정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그들은 몰랐다.
귀티가 흐르는 분위기에, 젊다 못해 어린 느낌이 나는 외모, 거기에 팁까지 넉넉하게 주는 고용인이 얼마나 만만하게 보이는지.
또 그런 만만한 사람들을 노리는 악당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말이다.
‘이거 대박이구만.’
마부 겸 도적단의 수장인 존슨이 횡재한 표정으로 마차를 몰았다.
딱히 볼거리도 없는 북서부 도시에 세상 물정 모르는 외지인, 그것도 돈 많아 보이는 젊은이들이 나타날 줄은 아침까지만 해도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 녀석들이 자신의 표적이 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그 모든 행운은 자신에게 떨어졌고,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 아지트 근처에 노숙 준비를 하다가 약속된 시간에 수하들이 오면 끝이다.
자신은 자비로운 사람이니, 돌아갈 노잣돈 정도는 남겨 줄 생각이었다.
‘뒷일을 생각하면 처리하는 게 낫지만, 그러기엔 너무 어리니까…….’
제아무리 냉혈한인 존슨이라 할지라도, 자라나는 새싹들을 밟을 정도로 무자비하진 않았다.
이번에는 적당히 ‘세상이 무섭다’라는 교훈만 주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잘 모르고 있는 건 오히려 존슨 쪽이었다.
이변은 하늘이 어둑어둑한 저녁에 발생하였다.
키잉-
서거거거걱!
“아이른, 장작은 이 정도면 될까?”
“……?”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모아 온 고귀한 분위기의 여성.
헌데 그 과정이 몹시 이상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줍는 게 아니라, 도끼날로 내려쳐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나무를 칼질 몇 번 만에 장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허나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두꺼우면 안 돼. 가뜩이나 생나무는 잘 안 타서 그래도…… 하나 던져 봐.”
“응.”
휘익
촤라라라라락-!
“이렇게 얇게 썰면 좀 나을걸?”
“그렇겠네.”
“……?”
허공에서 지면에 착지하는 동안 32조각으로 잘게 썰려 버린 장작을 보며, 존슨이 두 눈을 꿈뻑거렸다.
그리고 직후, 아이른의 가방 안에서 내내 자고 있던 고양이 요술사 루루가 얍! 소리와 함께 불덩이를 던졌다.
화르륵-!
“봤어? 나도 이제 정령 쓸 줄 안다!”
“그거 정령 아니라 요술이잖아.”
“힝. 나도 정령 배우고 싶어.”
“예전에는 정령 못 써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는데, 공부하다 보니까 재밌어져서. 그런데 계속 못 하니까 아쉬워…….”
“…….”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마부 겸 도적 떼의 수장 존슨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드리나무를 순식간에 썰어 버리는 어린 여성도, 장작을 허공에서 수십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애송이 청년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가장 기괴한 건 발바닥에서 불꽃을 내뿜고, 사람 말을 하는 고양이였다.
도대체 뭐지? 이게 뭐지?
혼란으로 인해 존슨의 머리가 타들어 갔다. 이곳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런데 잠시 후, 환장할 일이 한 번 더 벌어졌다.
“헤헤, 뭐야? 한적한 길에 이런 고급 마차라니…….”
“어이쿠. 귀족분들인가? 분위기가 고급진 게…… 거 돈도 많을 것 같구만.”
“불쌍하게 사는 우리들에게 좀 나눠줄 생각 없나?”
‘……안 돼! 안 돼 이 녀석들아!’
존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절대로 안 됐다. 이 괴물인지 귀신인지 모를 이들 상대로 도적질을 했다가는 파멸뿐이다.
최소가 죽음이고, 최대는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저 기괴한 검은 고양이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저주를 내릴 수도 있었다.
요리 재료를 내던진 그가 호다닥 수하들의 앞에 섰다. 허리춤의 검을 위협적으로 뽑아 든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 꺼져! 이 개자식들아!”
“?”
“?”
도적들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손수 먹잇감을 끌고 온 대장이 갑자기 저런 말을 하다니. 곧바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한 명은 존슨이 장난을 치는 거로 생각했다.
헤헤, 비열하게 웃은 그가 장단을 맞추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이, 형씨. 대단한 용기인…….”
뻐억!
“용기는 무슨! 썩 꺼져!”
“혀, 형님?”
뻐억!
“형님이라니, 언제 봤다고 형님이야! 개소리 집어치워!”
“아니, 잠깐만요. 존…….”
뻑!
뻐억!
뻐어억!
“끄억…….”
“안 꺼져? 다들 내 손에 뒤지고 싶어?”
검면과 발길질로 도적 하나를 기절할 때까지 팬 존슨이 으름장을 놨다.
그제야 도적들의 눈에 존슨의 모습이 들어왔다.
잔뜩 핏발이 선 눈, 귀신처럼 일그러진 표정.
대장의 진심을 확인한 그들이 동료를 부축해 슬금슬금 사라졌다.
“더 빨리 사라져!”
신속하게 사라졌다.
“허억, 허억…….”
존슨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까지 지칠 일은 아니었다. 허나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끝난 건 아니었다. 어쩌면 상황의 위화감을 느낀 고용인들이 자신을 심문할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저벅저벅 다가오는 금발과 은발의 검사.
둘 다 표정이 없었다.
한 발자국씩 걸어오는 두 검사를 보며 존슨은 거대한 벽이 밀려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의 숨이 더욱 가빠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인 게 아닐까?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은 곧바로 알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존슨 씨.”
“정말로요. 마부 일도 모자라 도적 떼 앞에 그렇게 용기 있게 나서시다니…… 그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아이른과 일리아가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일리아의 감정이 더 격했다.
평생 대중의 비웃음과 뒷말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그녀에게 있어서, 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용기 있는 호의는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적어도 일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마워, 존슨! 앞으로도 잘 부탁해!”
“…….”
거기에 허공에서 보물을 쏟아내는 검은 고양이까지 더해지자, 존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러한 감정은 아주 잠시였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황금 생쥐 세 개를 주시하던 그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 존슨, 앞으로도 지극한 마음으로 고용주분들을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