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각자의 길을 향해 (3)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4인방이 한창 오행신공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고양이 요술사 루루 역시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아이른에게 도움 될 구석이 있어 보인단 말이지.’
두르칼리의 보물 창고에서 고른 목걸이를 보며 루루가 생각했다.
정령이니, 오행신공이니 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감이 왔다.
이 기록도 남지 않은 고대의 유물을 잘만 활용하면, 아이른의 앞날에 적잖은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심지어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얍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파아아앗-
으드드득……!
밝은 빛무리와 함께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지고, 이마와 등에서 뿔과 날개가 자라난다.
카라쿰과 조우했을 때보다 훨씬 쉽게 변신에 성공한 루루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역시 변신 상태에선 힘이 더 붙는 기분인걸!”
인간과 비슷해진 자신의 외관을 살펴보던 요술사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아이른이 빌려준 목걸이를 강하게 노려봤다.
이 목걸이의 정체에 관해 아는 건 없다. 그야말로 쥐뿔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요술사라 자부했던 루루다.
싸움 실력만 비교하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고양이가 인간 말을 하게 될 정도라면 그 염원의 크기가 얼마나 강했겠는가?
헌데 이제는 변신의 영향으로 마음의 힘이 더욱 강해졌으니, 이렇게 눈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목걸이에 관한 정보가 자연스레 흘러들어올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정들었던 주디스와 브랫이 두르칼리 성채를 떠날 때까지.
루루는 목걸이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실패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변신 상태의 루루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보유했지만, 목걸이는 자신을 꽁꽁 숨긴 것처럼 쉽사리 정보를 내주지 않았다.
물론 검은 고양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앞발을 불끈 쥔 그가 의욕에 찬 눈으로 슈르르 날아갔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정령사 고르하에게 찾아가 부탁했다.
“나 정령술 좀 알려 줘.”
“……음?”
“직접 알려 주지 않아도 돼. 그냥 정령, 오행, 이것들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궁금해서 그런데. 말 잘하는 정령사 하나만 소개해 주면 안 돼?”
“…….”
“대신 이거 줄게.”
“자네, 지금 나를 돈으로 사려는…….”
우르르르르-
“…….”
덥석
“마침 괜찮은 녀석을 하나 알고 있다네.”
루루의 앞발을 덥석 쥔 고르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루루는 두르칼리 부족이 자랑하는 정령과 오행, 그보다 더 근원에 닿아 있는 지식에 대해 배울 기회를 가졌다.
땅, 금속, 물, 나무, 불로 이루어진 다섯 정령(五行).
그보다 더 전에 존재했던 이론인 사상(四象)과 삼재(三才), 음양(陰陽), 그리고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혼원(混元)까지.
루루는 오크족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차근차근 학습해 나갔고,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대륙을 떠도는 돌팔이 오크들은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정령과 제반 지식에 관해 박식해졌다.
심지어 쿠바르보다도 나았는데, 그가 실전에 비해 이론이 부족한 걸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안 배우길 잘했군.”
“하하! 그러면 나도 이제 정령사인가?”
“그건 아니지. 정령을 못 다루는 정령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루루가 다시금 목걸이에 집중했다.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여기에 담긴 힘은 다섯 정령보다 더욱 근원적인 무언가라는 사실을.
물론 이제 겨우 감을 잡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쿠바르가 말을 걸어 집중을 끊어도 별달리 귀찮지 않았다.
“아이른은 어디 있나? 여전히 아버지와 타라칸과 함께 있나?”
“뭐, 그렇지. 항상 그랬잖아.”
“흐음. 그렇구만.”
쿠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르가르로부터 점술을 배우는 탓에, 최근의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성채에 방문하는 것도 빠듯했다.
가족도 아이른도 중요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스승과의 추억을 쌓는 것이 더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달 전부터 시작된 그의 마음 수련을 떠올린 쿠바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쉽지 않을 거야.”
지금의 아이른은 오행신공을 수련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검술을 갈고 닦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
두르칼리 부족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상황, 문제들과 마주하고, 자신이라면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숙고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즉, 알하드 산채에서 품었던 고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심도 있게 이어 가는 셈이었다.
‘하긴, 아버지와 타라칸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기는 하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난감한 상황에 닥쳤을 때, 지도자는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정답은 없다.
역사에 기록된 대단한 존재들이라 한들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송만 받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철혈의 통치자라 칭송하면 다른 누군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비난하고, 성인군자라 평가받는 이도 어디선가는 우유부단한 위선자라고 욕을 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한 압박과 부담을 감내하면서 무리를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장(長)의 역할이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이른에게 있어서 카라쿰과 타라칸만큼 훌륭한 선생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가 걸어가는 길이 왕의 길은 아니지만, 어렵고 부담스러운 선택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늙은 지도자와 젊은 지도자의 의견을 참고하여, 나름의 신념과 기준, 주관을 쌓아 나간다.
자신에게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그야말로 영웅에게 걸맞은 마음 수련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육체를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 아이른이기에 더더욱 그렇고.’
잠시 눈을 감은 쿠바르가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인간을 떠올렸다.
자신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선한 인물.
그 선한 마음을 혼자서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이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존재.
그렇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아이른은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잔인하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구별할 수 없는 불행과 고난이 수없이 펼쳐져 있는 지금은, 어찌 보면 악마를 때려잡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과거보다 영웅이 되기 더욱 힘든 세상이라 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몸을 혹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처럼 심장이 터질 정도로 검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절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아이른은 이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 모습이 더없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쿠바르는 그에 대한 걱정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부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벌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번쩍 뜬 쿠바르와 루루가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존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른 파레이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선한 눈매로 다가오는, 젊다 못해 어린 영웅 지망생.
아니, 그렇지 않았다.
쿠바르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청년의 앞에, ‘지망생’이라는 단어를 덧붙여도 되는 것인가?
“루루.”
“응.”
아이른의 부름을 받은 루루가 두둥실 날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눈망울이 그의 얼굴을, 마음을, 신념을 들여다봤다.
요술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의지가 화악 전해졌다.
“기억나? 이그넷이 나에게 했던 말. 다음에 만날 때는 내 안의 강철이 아니라,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똑같이 묻겠다고. 그때도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다면, 훨씬 많이 노력해야 할 거라고.”
“응, 기억나.”
“네가 보기엔 어때?”
“…….”
“지금의 나는, 그 사람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설 수 있을까?”
“말 안 해도 이미 아는 것 같은데?”
루루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쿠바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못 본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진 젊은 영웅을 보며, 그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해졌군. 자네의 다음 행선지.”
* * *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아이른 파레이라가 카라쿰과 타라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일리아 린제이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처럼 확신을 품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어떤 분야에서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모두가 성취를 보이는 오행신공도 지지부진했고, 작년까지만 해도 쑥쑥 늘었던 검술도 완전히 정체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은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리아가 구르가르가 건네준 쪽지를 열어 본 것은, 그러한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무렵이었다.
종이에는 유려한 필체로 짤막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내용.
하지만 일리아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굳이 처음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로 침잠해도, 현재에 집중해도, 심지어 미래로 나아가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존재가 자리할 터였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린 일리아가, 구르가르의 쪽지를 와락 구겼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남의 말을 듣기 싫다는 치기 어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대중의 소리에서 벗어나기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더는 이그넷에 집착할 필요 없어.’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그녀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이 불러온 강박과 불안이 자신을 얼마나 깊게 상처입혔던가.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불태웠는가.
이를 알면서도 다시 이그넷의 뒤를 쫓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일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조금 어이없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더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겠다고 해 놓고도 자신은 여전히 똑같았다.
여전히 남의 말에 휘둘리고, 타인의 조언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아무리 위대한 점술가라 하더라도, 다른 이의 말에 휙휙 생각이 바뀌는 것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빙긋 웃은 일리아 린제이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동안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던 그녀가 눈을 떴을 때.
“…….”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빛나는 모습으로 말을 전하고 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보러 갈 생각이야.”
“…….”
“혼자 가기는 조금 겁이 나서 그런데…… 함께 가 줄 수 있을까?”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아이른은 강했다. 그 대단한 이그넷의 앞에서도 제 색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이 쪼그라든 자신은 갖다 댈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태양처럼 다가와 자신과 오빠의 자신감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린 이그넷과 다르게, 그가 내뿜는 불빛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덕분이었다.
일리아는, 지금껏 자신이 형편없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하고 있었구나.’
집착에서 벗어나려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이그넷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다시금 찾아올 두려움에 무너질 자신이 겁이 나서, 이리저리 회피하고 도망 다녔을 뿐이다. 일리아는 비로소 이를 깨달았다.
빠득, 그녀가 강하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구르가르의 쪽지는 구겨진 지 오래였지만, 괜찮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미소를 지은 일리아 린제이가,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말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