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각자의 길을 향해 (2)
“아아, 날씨 좋다아! 하늘도 맑고, 바람은 선선하고…….”
두르칼리 성채로부터 떠나는 마차 안에서, 주디스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날씨가 좋아서 한 말은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은 물감을 쏟아놓은 듯 파랬지만, 엄밀히 말해 바람이 선선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의 북쪽인 탓에 살짝 추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해서 죽을 것 같단 말이지.’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주디스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브랫 로이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들은 1년가량 함께했던 아이른 파티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 둘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라칸의 배려 덕분에 오크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마부가 동행하긴 하지만, 그는 잡일과 마부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일절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기에 일행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즉, 검술관으로 향하는 3달의 시간을 이 녀석과 단둘이 보내야 한다는 뜻.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후우, 브랫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건 전부 브랫 로이드 때문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녀석이 자신에게 그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렇듯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바깥 구경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다.
평소처럼 검술을 주제로 토론하거나, 여행 도중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농담 따먹기라도 했겠지.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담담하게 녀석의 눈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두르칼리에선 혼자 수련할 시간이 있고, 브랫과 마주할 때도 다른 이들이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녀석이 대담하게, 때로는 능글맞게 자신에게 마음을 전하더라도 편하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버럭 화를 내거나 일리아를 시켜 대신 욕을 쏟아부으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따로 갈 걸 그랬나?’
이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주디스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브랫과 함께 검술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전에, 녀석과 함께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굳이 한 쪽을 고르라고 한다면, 좋은 쪽이었다.
그런데도 결정을 못 내리고 이처럼 우물쭈물하고 있는 건, 주디스가 19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사랑’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머리 아파.’
창문 쪽에서 시선을 돌린 주디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려웠다.
누군가가 재수 없고, 싫고, 짜증 나고. 이런 감정들은 한 번도 헷갈려 본 적이 없었다.
허나 타인을 좋아한다는 감정.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직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사랑’이라는, 속에 품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지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찰싹
“히익!”
주디스의 입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옆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범인은 브랫 로이드였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그가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번쩍 눈을 뜬 주디스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뭐, 뭐야! 왜 말도 없이 옆에 붙어!”
“안 되나?”
“안 돼! 아니, 그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굳이 넓은 자리 놔두고 내 옆에 올 이유가 뭐야?”
“이유가 궁금한가?”
브랫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나 그와는 달리 목소리는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주디스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버버하며 상대를 바라봤고, 피식 웃은 브랫이 이내 답했다.
“추워서.”
“……뭐?”
“춥다고. 대륙 북쪽이라 그런지, 10월밖에 안 됐는데도 쌀쌀하네. 그래서 옆에 앉은 건데…… 왜, 생각한 거랑 다른 대답인가?”
“……아니? 나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그럼 문 닫을 테니까 반대편으로 꺼져.”
“미안. 옆에 오고 싶어서 왔다.”
“…….”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이제 있어도 되나?”
“……그러든가 말든가.”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브랫을 쳐다보던 주디스가, 홱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예전에도 말싸움하면 살짝 밀린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요즘은 정말이지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이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물론 브랫의 행동과 말이 마냥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녀석은 나름대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컨대 저 받아주기 힘든 재수 없는 화법은, 적지 않은 고민과 줄타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짜증 나는 새끼.”
고마웠다.
“사람 빡치게 하네.”
감사했다.
친구가 생기는 것조차 과분한, 지랄 맞기 그지없는 성격의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 줘서…… 그래서 좋았다.
그러한 감정은 이내 짜증과 부담스럽다는 감정을 누르고 조금씩, 조금씩 커져 갔다.
두르칼리의 마부가 떠나고, 크로노 검술관에 가까워질수록 더.
그래서였다.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겨울날, 주디스가 진실된 마음을 꺼낸 것은.
“네가 싫지 않아.”
“…….”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네가 좋아. 하지만…… 네 마음을…… 하기엔, 확신도 없고, 겁도 조금 나.”
네 마음을 받아 주기엔.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브랫은 똑똑히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가 눈길의 중간에 멈춰서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밑바닥에서 온갖 더러운 짓 하면서 살아왔던 내가 누군가와 이런 관계를 맺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검밖에 모르는 내가 그런 관계를 잘 이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혹시나, 정말 혹시나…… 그것 때문에, 아니 무슨 이유가 됐든, 너랑 그런 연인……이 됐다가, 다시 그보다 못한 관계가 된다면…… 다시 볼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
“미안. 엄청 이기적인 대답이네.”
말을 끝낸 주디스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짜증이 났다. 한껏 용기 낸 상대의 마음에 이런 식의 대답밖에 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음 말을 듣기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일리아를 보고 박탈감을 느꼈을 때, 아이른을 보고 열등감을 느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답답함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허나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덥석
“어?”
주디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힘있게 자신의 손을 낚아채는 브랫의 손.
따뜻하진 않았다. 하지만 단단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그녀가 푸른 머리의 청년을 바라봤다. 싱긋 웃은 그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거절은 아니어서.”
“……어?”
“보자. 그러니까…… 유예 기간이라고 보면 적절하겠군.”
“에?”
“아닌가?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는데. 설마 거절이었어?”
주디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꽤 강하게 저은 탓에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지켜본 브랫이 더욱 진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일단은 이쯤에서 타협할까?”
“뭐?”
“싫으면 말고. 아니, 싫어도 해. 이 이상은 양보 못 하니까.”
“…….”
“대답할 필요는 없어. 손 안 놓으면 그런 거로 안다.”
선언하듯 당당하게 말한 뒤, 앞으로 걸어가는 브랫 로이드.
여전히 손을 굳게 잡은 채였다.
그리고 주디스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의 냉기를 지워내려는 듯,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
“…….”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겨울의 눈길을 걸어가는 두 검사.
허나 그것도 잠시.
그들의 앞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허어, 말세로구만.”
“대낮부터 젊은 양반들이 말이야, 어? 그렇게 붙어 다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어?”
“그러게 말이야.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니…… 이거, 가지고 있는 짐은 웬만하면 내려놓고 가셔야겠는데?”
흉험한 날붙이들을 들고 둘의 앞을 가로막는 도적 떼.
이를 본 주디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룻강아지들을 혼내 주기 위해 주먹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뻑-!
빠아악!
“갈까?”
“…….”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얼굴로 도적들을 기절시킨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존재.
짜증이 많이 난 듯한 브랫의 얼굴을 본 주디스가 푸흐흐, 웃으며 말했다.
“손이나 다시 잡아. 시려우니까.”
* * *
해가 바뀌었다.
어느덧 1월의 말, 예상했던 것보다 보름가량 늦게 알칸트라에 도착한 두 검사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크로노 검술관의 정문을 바라봤다.
무려 1년 반만의 복귀다.
그냥 복귀가 아니다. 둘 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성취감을 갖고 돌아왔다.
특히 주디스의 마음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관주님이 어떤 말을 할까?’
검술관주의 조언에 딱 들어맞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이안은 그녀가 대륙을 경험하며 여유를 품기를 원했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열등감과 자괴감의 불꽃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도록 말이다.
‘필요 없어.’
허나 주디스는 스승의 말을 따르는 대신, 더욱 세차게 자신을 몰아쳤다.
두르칼리의 대 정령사인 고르하마저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뜨거운 불꽃을,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불사르는 화기를 품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버텨 내면 그만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아무리 개 같아도.
아무리 화나고 서럽고 짜증 나도. 그러한 치졸한 마음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 받아들일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 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원동력 삼아, 대륙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들어갈까?”
“……그래.”
브랫을 쳐다본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적잖이 긴장됐지만, 그보다 큰 기대감이 그녀를 붕 뜨게 만들었다.
그런데.
“……?”
안으로 들어서는 주디스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그녀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가 귀를 쫑긋 세우며 생각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허나 단순히 금속끼리 부딪치는 느낌은 아닌, 그보다 훨씬 흉험하면서도 강렬한…… 쉬이 듣기 힘든 충돌음.
‘……오러 소드! 마스터와 마스터의 싸움이다!’
“빨리 가자!”
주디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끼리의 대전이라면 그게 누구든 간에 구경할 가치가 있었다.
둘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졸업생과 수련생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대연무장에 모여 두 검사의 결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브랫과 주디스 역시, 두 소드마스터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주디스가 생각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대단한 이들의 싸움을 봐 왔던가?
검술관 내에서는 수많은 선배의 대련이 있었고, 증명의 땅에서는 아이른과 일리아의 검투가 있었다.
심지어 두르칼리에서는 오크 최고의 전사인 카라쿰의 오행신공도 경험했다.
타라칸과 할리파 역시 어디 가서 빠지는 실력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대결은.
그 모든 감동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정도로 거대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브랫 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칫
칫-!
때로는 번개가 스쳐 지나가듯.
콰아아앙!
꽈앙!
꽈아아아앙!
때로는 거인의 철퇴가 부딪치듯.
아니, 그러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빛나는 시간이 이어졌다.
브랫과 주디스를 비롯한 검사들은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싸움의 당사자들이 약속한 듯이 검을 갈무리했을 때였다.
“여기까지 할까? 더 해 봤자 결판이 안 날 것 같은데.”
“아니. 무조건 내가 이기지.”
“허허, 그럼 조금 더 할까?”
“닥쳐. 다음에 올 때는 완벽하게 찍어 누를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이거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구만.”
“지랄. 그럼 지금까진 대충했냐?”
“이거, 말로는 못 이기겠구만.”
“조만간 검으로도 못 이길 날이 올 거다. 됐고, 난 케이라랑 오랜만에 데이트나 해야겠어.”
“독신은 서럽구만…….”
검술관주의 태도는 더없이 점잖았다.
허나 상대는 달랐다. 군데군데 욕설을 섞어 말하는 모습이 주디스를 연상시켰다.
물론 비슷한 건 말투뿐이었다. 철갑 같은 근육을 두른 노인의 외관은 그녀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안과의 대화를 통해, 또 대결 중에 보인 실력을 통해 깨달았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브랫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쳤다.
“쿤!”
대륙 3강의 하나라는 괴물 중의 괴물이, 오랜 잠적을 깨고 크로노에 방문한 것이다.
“으음?”
어슬렁어슬렁, 호랑이처럼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던 노인의 시선이 브랫을 향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데 돌아보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터.
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건방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허나, 그의 발걸음은 중간부터 방향을 달리하였다.
“…….”
짐승처럼 날카로운 기운.
그리고 그보다 더 흉험한 눈빛.
그것이 브랫 로이드가 아닌, 주디스를 향해 쏟아졌다. 브랫을 비롯한 주변 검사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 갔다.
하지만 주디스는 굴하지 않았다.
화르르륵-!
더없이 뜨거운 마음에, 오행신공의 기운을 더한다.
그걸로도 부족한 부분은 악으로, 깡으로 메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눈을 부릅떴고, 그런 그녀를 쿤은 한참이나 지켜보고, 살펴봤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연무장에 모인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너, 내 제자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