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각자의 길을 향해
브랫 로이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어떤 성향인지는 안다.
성격이 좋은 것과 별개로 외향적이지는 않기에, 많은 이와 연을 맺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 그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궁금증이 일었다.
‘이곳에서 더 배울 게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물론 타라칸과 할리파, 그리고 오크 최고의 전사인 카라쿰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이어 간다면 얻는 것이 많겠지만, 그건 크로노 검술관이 더 나았다.
예비 수련생 시절 검무(劍舞)를 통해 깨달음을 주었던 것처럼, 이안 관주는 이번에도 자신들이 여행을 통해 얻은 성과에 추가적인 조언을 해 줄 터였다.
브랫은 벌써 그 순간이 기대되었다.
헌데, 그것을 뒤로 미룰 만큼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음, 그렇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 그리고 최근에 품게 된 뜻.
아이른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나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신에게 중요한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선택은 그로 인해 나온 결정이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브랫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차례라는 듯 시선을 주는 아이른을 보며, 브랫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뭐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좋은 영주가 되는 게 목표지. 검술관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어떤 영주가 좋은 영주인가.
어떤 모습이 진정으로 귀족다운 모습인가.
그를 위해 자신이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브랫은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기탄없이 풀어놓았고, 아이른은 부족한 지식이나마 이런저런 의견을 내며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 갔다.
주제는 서로의 목표와 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여행 중에 겪었던 이야기, 예비 수련생 시절에 있었던 추억, 일리아 이야기, 주디스 이야기, 그밖에도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소중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
그 외에도 정말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1년가량 함께 대륙을 떠돌았지만, 둘이서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이별인가.’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브랫이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를 그대로 말하는 것은 정 없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브랫이, 아이른을 보며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그럼…… 잠시 이별이군.”
“그렇겠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헤어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서로에게 있어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둘이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 *
남자 둘의 긴 대화가 있은 지 닷새 후.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가 두르칼리를 떠날 채비를 갖췄다.
마중나온 이가 적지 않았다.
아이른, 일리아 린제이, 루루, 쿠바르, 거기에 카라쿰과 타라칸, 유령인 구르가르가 더해졌다.
“진짜 죽은 거 맞아요? 살아 있는데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흘흘. 그렇게 섭섭한 말을…… 방금 그 말 때문에 내가 이승에 있을 시간이 사흘 정도 짧아졌어.”
“아니, 그런 거로 농담하지 말아요. 찝찝하니까.”
주디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더 성질을 내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죽은 몸인 구르가르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터.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구르가르도 손을 뻗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 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했다.
“고마웠어요. 잘 있어요.”
“볼 수 있으면 다음에 보세.”
구르가르는 끝까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건넸다.
빙긋 웃는 그를 보며 혓바닥을 낼름한 주디스가 이번엔 루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악수보다도, 포옹보다도 진한 표현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툭, 투닥, 툭탁
바쁘게 부딪히는 주디스의 손과 루루의 앞발, 꼬리, 그리고 머리.
화려한 핸드 셰이크(Hand Shake)를 선보이는 둘을 보며 주변 모두가 웃음 지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모습이 꽤 봐줄 만했다.
허나 브랫은 과했다.
“귀여워.”
“…….”
“…….”
언제부턴가 주디스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브랫이었고, 그런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진지하게 둘 사이를 응원해 주는 쪽이었다.
허나 지금처럼 부담스러운 말을 툭툭 내뱉을 때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주디스조차 그랬다.
처음에는 브랫의 공세에 어쩔 줄 모르던 그녀였지만, 그게 한두 달 반복되자 내성이 생겨 버렸다.
아니, 애초에 브랫의 말에는 애정표현뿐만이 아니라 개그 욕심과 자신에 대한 놀림도 조금씩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구르가르를 상대할 때보다 더 인상을 찡그린 주디스가 말없이 일리아를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은발의 검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브랫에게 말했다.
“****.”
린제이 가의 재녀가 했다고 믿기 힘든 험악한 욕설.
경악할 일이었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일리아가 지난 몇 달간 주디스로부터 욕설 강의를 배웠다는 사실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주디스는 자기 대신 일리아를 시켜 브랫에게 욕을 퍼붓고는 했다.
물론 린제이 가의 아가씨는 이를 무척 힘들어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브랫 한정으로는 즐기는 모습마저 보여 주었다.
‘어떻게 저렇게 만든 거지?’
아이른은 몹시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여자 둘 사이에 그동안 어떤 이야기가 오갔기에?
물론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겉돌고 있던 일리아가 이를 계기로 둘과 더 친해졌으니까.
“무슨 생각 하냐?”
“아.”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주디스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른은 싱긋 웃으며 손을 건넸다. 그녀 역시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고, 둘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허나 눈빛만은 가볍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주디스가 말했다.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수련해. 다음에 볼 땐 너든, 일리아든 다 발라 줄 테니까.”
“그렇게 안 되도록 빨리 만나러 가야겠네.”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일 잘하고. 건강하고.”
“멋있어.”
“닥쳐, 브랫. 너는 할 말 없어?”
“딱히. 어차피 오래지 않아 볼 텐데.”
브랫의 말을 들은 아이른 일행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전보다 훨씬 돈독한 관계가 된 그들이고, 전보다 훨씬 더 커다란 사람이 된 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떨어진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별의 순간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 갈게. 쿠바르, 종종 놀러 올게요.”
“여러 가르침 감사합니다. 카라쿰 님, 타라칸 님, 구르가르 님. 그리고 쿠바르, 다음에는 가문에서 위스키 좀 갖고 오겠습니다.”
“좋지. 나도 괜찮은 놈들로 구해 놓겠네.”
“그럼…….”
브랫 로이드가 귀족적이고 멋스러운 예를 표했다.
그 옆의 주디스도 마찬가지였다. 브랫보다 훨씬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연습한 티는 났다.
아이른을 비롯한 모두가 그들의 떠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잘 가! 주디스! 브랫!”
10초마다 잘 가라고 외치는 루루 때문에 헤어짐의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둘의 모습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고, 평원에는 벌써 두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지.”
허나 언제까지고 아쉬움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카라쿰이 신형을 돌렸고, 그를 따라 나머지 오크들 역시 몸을 돌렸다.
여전히 주디스, 브랫 쪽을 바라보던 루루를 일리아가 품에 안았고, 아이른 역시 두르칼리 성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6년 반 전의 헤어짐보다 더욱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끝났다.
* * *
[브랫 로이드 외전]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직 크로노 검술관에 도착하지 않았을 시점.
열심히 검술을 수련하던 브랫 로이드에게 아메드가 찾아왔다.
“열심히 하는군.”
“아, 선배님.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당당한 분위기로 대련을 언급하는 한참 어린 후배를 보며, 아메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은 절대로 아니었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미친 녀석이 얼마나 끔찍한 재능을 가졌는지.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대단한 인내심, 그리고 심지를 가졌는지.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일리아 린제이도 대단하지만, 이 녀석 역시 그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어쩌면 훗날 역사에 남을 검사로 성장할지도.
물론 아메드는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곧이곧대로 인정해 주기에는 묘하게 재수 없을 때가 많은 녀석이었다.
칭찬의 말은 아끼고 아꼈다가 주디스 혹은 랜스 페터슨에게 해 주는 쪽이 나았다.
상념을 정리한 그가 본론을 꺼냈다.
“아니, 대련은 나중에 하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일이라면…….”
“관주님께서 널 호출했다.”
“……대충 알겠군요. 바로 가겠습니다.”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실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올 것이 왔다!’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싸! 졸업시험이다! 내가 제일 먼저야! 봤냐, 브랫? 이 누나가 먼저라고! 하하하하하!’
어제 주디스가 찾아와서 했던 도발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안 관주님이 자신에게 ‘세상을 경험하러 오라’고 했다며 종일 자신을 놀렸었다.
얼핏 들으면 별것 아닌 말 같지만, 사실 이는 검술관 졸업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넓은 세상을 돌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보완한 뒤, 다시 크로노로 돌아와 관주의 인정을 받으면 비로소 정식 졸업자가 될 수 있다.
물론 먼저 졸업하고 늦게 졸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느냐만…….
‘그래도 저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단 말이지.’
더군다나 상대가 주디스라면 더욱 그렇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브랫이 빠르게 몸을 씻은 뒤 관주의 방으로 움직였다.
머릿속에는 벌써 여정에 관한 상념이 가득 들어찼다.
어떤 곳으로 가야 성장을 꾀할 수 있을까, 누구를 만나고 오면 좋을까, 기왕이면 주디스와 같이 다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허나, 그러한 생각들은 이안의 말을 듣자마자 싹 사라져 버렸다.
“졸업 축하한다.”
“……시험은, 없는 겁니까?”
“무슨 시험?”
“세상 경험을 하고 와야…….”
“그런 거야 부족한 면이 있는 자에게나 필요한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시험은 필요 없어. 지금 순간부터 브랫 로이드는 수련생이 아닌, 엄연한 크로노 검술관의 졸업자다.”
말을 마친 이안 검술관주가 부관주 케이라 핀을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품에서 금속패 하나를 꺼냈다.
수련생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교한 마법 문양이 새겨진 상징패.
그 위에는 ‘브랫 로이드’의 이름이 멋들어진 필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손을 내밀어라. 각인을 위해 피가 필요하니.”
“…….”
브랫 로이드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그를 관주와 부관주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충분히 이해했다.
현재 그의 나이 19세.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크로노 검술관을 졸업한다는 건 웬만한 천재도 생각하기 힘든 영예였다.
아마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러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상태일 터였다.
둘은 브랫이 자신을 다스릴 시간을 넉넉하게 주었다.
허나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졸업 상징패를 받는 것을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습니까?”
“음?”
“나중에…… 주디스가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 시험을 통과한 뒤에 받겠습니다. 아니,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흐음.”
이안과 케이라 핀이 서로를 쳐다봤다.
당혹스러웠다. 역대 누구도 크로노 검술관의 졸업패를 거절한 이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절이 아닌 유예였지만, 그거나 그거나였다. 감히 누가 대륙 최고의 검사의 인정에 저리 대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알 것 같군.’
둘이 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자신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러한 선택을 내렸는지. 어떠한 감정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겠다고 한 것인지.
하지만 오랜 연륜을 쌓은 둘의 눈에는 빤히 보였다.
이안이 말했다.
“많이 변했어. 처음 예비 수련생이 됐을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야. 아, 물론 좋은 뜻이다. 혹시나 오해하지는 말고.”
“…….”
“좋다. 졸업패 수여는 나중으로 미루지. 부디 옆에서 주디스를 잘 도와주길 바란다.”
“답을 찾는 건 자기가 할 일이죠. 저는 옆에서 제 할 일이나 할 생각입니다.”
뭐, 잔소리 정도는 할 수도 있지만…….
뒷말을 흐리는 브랫 로이드를 보며, 이안과 케이라 핀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주디스는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오직 셋만이 아는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