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브랫 로이드 (3)
브랫 로이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가장 짜증 나는 녀석.
그로부터 ‘어째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주디스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아니, 그런 거면 말로 하든가!’
왜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직접 보여 주려 한단 말인가!
물론 말로 툭 내뱉는 것보다 이쪽이 오해를 푸는 데 더 좋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다는 게 주디스의 생각이었다.
조금이지만 짜증도 났다. 브랫이 이렇게 된 것이 속 좁은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
그 사실에 언짢음을 느끼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더욱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허나 그런 생각들은, 브랫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좋아해.”
“……?”
주디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누구를?
설마 자신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는 것은 자신과 브랫, 오직 둘뿐이었으니까.
‘아니, 아니지. 다른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침을 꿀꺽 삼킨 주디스가 사고의 흐름을 돌렸다.
자신의 경우, 수련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때면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곤 한다.
욕을 내뱉기도 하고, 아무 생각이나 막 쏟아내기도 하고, 가끔은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할 때도 있었다.
아마 그런 것일 터였다.
상태가 안 좋은 나머지, 머릿속에 있던 다른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좋아해, 주디스.”
“으아아악!”
벌떡
콰당!
“으, 으윽…….”
“어! 아! 미안…… 아니, 어으……!”
훅 치고 들어오는 브랫의 말에 주디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던 브랫이 바닥에 머리를 찧고 신음을 흘렸다. 진심 어린 아픔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주디스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잠시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자기 때문에 다친 녀석을 놔두고 그냥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브랫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 자식?’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주디스는 자신이 이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성격은 개차반에,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검 휘두르는 것과 어렸을 때 익힌 소매치기밖에 없다.
못난 외모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일리아처럼 특출나게 예쁜 것도 아니었고, 출신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도련님 중의 도련님인 브랫이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자식, 설마 장난치나?’
오히려 이쪽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진짜 나 좋아해? 이유가 뭔데.”
“…….”
“좋아하면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지, 진짜, 혹시나 해서 그런데 장난이면 지금 말해라. 지금 말하면 안 아프게 패 줄 테니까…….”
“장난 아니다.”
“그럼, 뭔데.”
주디스가 브랫을 노려봤다.
자신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모습.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저러는 거로 생각한 탓도 있었고,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실망한 자신의 꼴도 우습게 여겨졌기에 더 그랬다.
허나 이어지는 브랫의 말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잠깐만 기다려 줘.”
“하, 왜? 이 자식, 할 말 생각 안 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무…….”
“대충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둘의 시선이 수평을 이뤘고, 주디스의 눈에 브랫의 얼굴이 더 잘 들어왔다.
살짝 건방지고, 또 느끼한 감도 있는 외모.
하지만 객관적으로 잘생긴 축에 속하는 도련님 자식이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곤 말한다.
“내가 매사에 계획적인 편이긴 하지만, 오늘의 고백은 계획에 없었어. 그냥, 문득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으읏!”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다. 그래서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아니, 지금, 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제대로,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너도 알게끔 잘 숙고하고 말할 테니까.”
“……!”
주디스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이젠 확실히 알았다. 브랫의 뒷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비록 자신이 요술사는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 따위는 없지만…… 상대의 눈에서 물처럼 새어 나오는 감정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브랫은 진심이었다.
그 사실이 주디스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나, 나중에 들을게!”
이를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연무장에서 벗어났다.
“……흠.”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지켜보던 브랫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진창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그는 오늘 주디스에게 고백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조차 한참 전이었기에 화해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일은 벌어졌고, 주디스는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하지만…….
‘나쁘진 않은데?’
브랫은 오늘의 일을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고백에 대한 최상의 결과는 당연히 수락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거절이다. 정색, 혹은 배려를 위한 억지 웃음과 함께 입에서 흘러나오는 ‘미안’이라는 단어.
그것이야말로 브랫이 가장 피해야 하는 결과일 터.
일단 그것을 피한 것만으로도, 오늘의 고백은 실패가 아니었다.
‘저만큼 당황했다는 건, 주디스도 충분히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야.’
“……오히려 좋아.”
예정에 없던 고백.
예정에 없던 급전개.
하지만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분위기.
그것을 느낀 그가 슬쩍 웃음 지으며 자신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겠다.
입안이 쓰렸지만,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주디스 생각이 가득한 브랫 로이드였다.
* * *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이 두르칼리 부족의 성채에 입성하고 4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물론 바뀐 건 계절만이 아니었다. 아이른 일행 역시 대부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가장 밸런스 좋게 성장한 사람은 브랫 로이드였다.
다섯 정령 중 물의 기운에 자질을 보였던 그는,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정령에도 놀라운 친화력을 보여 주었다.
물에서 나무를, 나무에서 불을, 불에서 흙을, 흙에서 금속을.
마지막으로 금속에서 물을 만들어 내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과정.
즉 오행의 흐름(Circle)을 이뤄내는 데 불과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재능있는 오크 전사들과 비교해도 남다른 성취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중심이 되는 정령은 여전했다.
브랫은 오행의 흐름을 이어 가며 내실을 단단히 다졌고, 안정적인 균형 속에서 물의 기운을 불려 나갔다.
또 그것을 검술과, 오러와 접목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그 모습을 본 고르하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심이 섰으니, 더 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겠군.”
허나 주디스를 보는 표정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균형을 위해 다섯 정령을 골고루 신경 쓰는 브랫과 달리, 그녀는 오로지 불의 정령에만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굳이 다섯 정령을 상생시키지 않더라도. 내 방식대로 해도 불을 키우는 데는 충분해요.”
“하지만, 다른 정령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만 키우면 균형이 깨지고, 가득 들어찬 화기가 몸을 불태워 버릴…….”
“그것도 괜찮아요. 참아낼 수 있어요. 아니, 애초에 나는 다른 정령은 느끼지도 못하겠어요.”
사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것처럼 친숙했던 불의 정령과는 달리, 주디스는 다른 네 가지 정령 중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예 모든 정령과 연이 없다면 모를까, 이런 경우는 대 정령사인 고르하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결국 주디스의 앞에 펼쳐진 길은 두 가지였다.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해 오행신공을 익히지 않거나.
그런 리스크를 감수한 채 불의 기운에만 집중하거나.
그녀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게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릴 수도 없고…….’
특이하기 그지없는 인간 여자를 보며, 고르하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특이한 것은 주디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충분히 특별한 존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는 고르하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다는 점이었다.
“상생이 아니라 상극이요?”
“그렇네. 일반적인 이들과 다르게, 자네의 기운은 순방향이 아닌 역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정령술, 혹은 오행신공을 배우는 이들은 대부분 상생의 흐름을 탄다.
정령끼리 서로 발생시키고 조장시키는 원리를 통해 기운을 불려가는 식으로 경지를 높이는 것인데, 물을 흡수하여 나무가 자라는 것, 혹은 나무를 불살라 화염이 피어오르는 것이 상생의 예라 할 수 있다.
허나 아이른의 경우는 그와 정확히 반대였다.
너무나도 강한 기운을 제약하고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 내는, 이른바 ‘상극’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렇네요. 쇠말뚝의 금기(金氣)를 매끄러운 검으로 다듬기 위해 화기(火氣)를 사용한 거니까…….”
“음? 쇠말뚝? 검?”
“아, 아닙니다.”
“……뭔가 있나 보군. 굳이 깊이 캐묻진 않겠지만…… 모르고 들어도 괜찮게 느껴지는 비유로군. 자네 말이 맞네. 쇠말뚝의 투박함을 다듬어 내기 위해서는 화력이 필요하지.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닐세. 지금은 괜찮지만, 오행신공을 통해 더욱 불의 기운이 커진다면 열기를 다스리기 위해 물이 필요하지.”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오행 상극의 수련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브랫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이른 역시 정령을 다루는 데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오행신공에 매진하여 물과 나무, 흙의 기운을 키운다 한들, 전생의 기억과 불꽃의 신념, 깨달음을 통해 쌓아 올린 불과 쇠의 기운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나머지 셋이 그와 비슷해지려면 결국 또 다른 깨달음이 필요할 터.
하지만 혼자서도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흠…….”
“…….”
하지만.
놀라운 성취를 보인 세 검사와는 다르게, 일리아 린제이는 별다른 성장을 이뤄내지 못했다.
사실 이상할 건 없었다.
오행신공과 정령술은 오크에 의해 만들어진, 오크를 위한 기예.
인간 대부분은 어려움을 겪는 게 당연했다. 검의 천재라고 해서 꼭 정령까지 잘 다루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만 친구이자 라이벌인 세 친구가 워낙 출중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그녀 나름대로 실망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냐?”
“응? 뭐가?”
“두르칼리에 더 남아 있겠다고 한 거. 일리아가 걱정돼서 같이 있으려고 그런 거 아니야?”
“음.”
브랫 로이드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뒷목을 긁었다.
한동안 언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이 대륙을 여행하는 이유는 검사로서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크로노 검술관의 수련생 신분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졸업자로 인정받을 만한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서였다.
‘일리아는 이제 수련생이 아니니 예외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아이른은 여행을 통해 쌓은 경험과 전생의 기억을 통해 오랜 방황을 끝냈다.
그의 마음속엔 꺼지지 않는 뜨거운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디스 역시 자신을 좀먹던 열등감과 자괴감을 어느 정도 극복해냈다.
그 방식이 기괴하긴 했지만, 어찌 됐건 지금의 그녀는 검술관을 나오기 전보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훨씬 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브랫은…….
‘……브랫은, 이미 부족한 점이 없어 보이는데.’
적어도 아이른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는 애초에 졸업 시험을 위해 대륙을 나올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이 브랫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리아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래?”
“응. 이곳에서 더 배워야 할 게 있어.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검술관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왜냐면…….”
그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답을 들은 브랫 로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