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브랫 로이드 (2)
“휴우.”
상담이 끝났다. 브랫 로이드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
딱히 불만이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말을 하는 내내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화해를 위한 조언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숫제 연애 상담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카라쿰의 말처럼 자신의 몸 하나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에게 있어서, 이성과 섬세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과정인 연애는……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해 준 조언도 별것 없었다.
그저 이안 관주가 해 주었던 조언을 그대로 전했을 뿐. 어찌 보면 제 생각이 아닌 이안의 생각이었다.
‘상황이 다른데 똑같은 조언을 해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브랫은 나보다 훨씬 머리 좋으니까 잘하겠지.”
아마 자기 방식으로 잘 소화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가 잘 풀릴지는 모르겠다.
주디스는 그가 아는 어떤 인물보다도 다루기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연애라.’
브랫의 말을 떠올린 아이른이 빈 연무장을 거닐었다.
감이 오지 않는다. 평생의 대부분을 한심하게 살았고, 친구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질 정도로 대인관계가 어설펐던 그의 처지에서 이런 건 별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반대로,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나타날 일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던 그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검을 소환한 그가 이를 휘두르며 생각했다.
‘일단은 오행신공에 집중하자.’
새로이 깨달은 불의 오러를 수습하기 위해, 아이른 파레이라가 신념을 끌어올렸다.
앞선 이들에 비해 어설프고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가슴 속의 불꽃만은 누구보다 강하고 커다랬다.
* * *
아이른이 전생의 기억을 통해 신념을 완성하고, 불의 오러를 다듬어 나가고 있을 때.
주디스 역시 그의 전생을 떠올리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아이른처럼 선한 의도를 품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전생의 사내가 정말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었다면 광대 악마를 처리하기 전에 자신을 무시했던 녀석들에게 먼저 복수의 칼날을 꼽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디스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은 사내의 어떤 면인가?
‘노력.’
그렇다.
그의 무시무시한 집념이 만들어 낸 35년간의 노력.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덜 잤다고, 남들보다 몇 번 더 휘둘렀다고 만족할 게 아니었어.’
분명 주디스는 노력가다. 웬만한 녀석들은 갖다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인내심으로 똘똘 뭉친 크로노 검술관 동기들조차 학을 뗄 정도로 열심히 검을 내지르고, 누구보다 육체 단련에 힘썼다.
항시 냉정하게 수련을 감독하는 부관주 케이라 핀조차 그녀에게는 쉬엄쉬엄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해서 아이른, 일리아…… 그리고 브랫, 이 괴물 같은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그 녀석들보다 더한 천재로 알려진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그 위에 별처럼 떠 있는 이안 관주님, 쿤,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은 어떻고?
‘절대 무리야. 지금처럼 해서는 절대로 못 따라잡아. 하지만…….’
아이른의 전생이었던 사내와 근접한 노력을 할 수 있다면.
아니, 그가 품었던 독기의 절반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
그 정도였다. 그 정도로 사내가 보여 줬던 불꽃은 강렬했고, 지독했다.
비록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그것조차 내려놓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그딴 건 모르겠고, 내 지향점은 그전까지 전생의 사내가 보여 줬던 모습이야.’
벌떡
의자에 앉아 종일 생각을 이어 가던 주디스, 그녀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라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검을 수련해야 했다.
그녀의 가슴에 더욱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직 부족해. 더, 더 뜨겁게 타올라야 해.’
아무리 뜨거워도 모자라다.
아무리 커다란 불꽃이어도 부족하다. 화기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통 뒤덮어 나간다 해도 괜찮다.
자신은 무조건 버텨 낼 것이다. 오히려 그 괴로움마저 불꽃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불의 화신이 된 주디스가 숨을 골랐다.
정신을 집중한 그녀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주디스.”
“…….”
익숙한 목소리.
주디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아래로 검을 내리그을 뿐이었다.
허나 처음의 생각과 달리 매끄러운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원인을 파악한 주디스가 다시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부웅-!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잠잠해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지금 자신을 찾아온 이는 그런 이였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가장 친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짜증 나는 존재.
브랫 로이드.
언제나처럼 재수 없는 얼굴의 그에게 잔뜩 욕설을 쏟아내려는 찰나였다.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하자.”
“…….”
주디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두르칼리 부족의 치료 덕분에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친 상태였다.
가람에게 얻어맞은 부위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주디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재는 성격이었다면 전사의 시련을 이겨 내지도 못했을 터였다.
퉤- 하고 침을 뱉은 그녀가 자세를 취했다.
‘말을 섞는 것보단, 차라리 검을 섞는 게 낫네.’
그런 생각을 하며, 곧바로 선공을 취하려는 순간이었다.
“저번에 말했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느냐고. 그래, 숨겼다.”
“뭐?”
“하지만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새 유령처럼 접근한 브랫 로이드가 매섭게 검을 휘둘러 왔다.
카강-!
“크윽…….”
검을 맞댄 채 거칠게 파고든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검이 아닌, 매섭게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기세였다.
그 중심에 있는 퍼런 녀석이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보여 줄게, 내 검.”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 봐!”
터어엉!
전신에 힘을 줘 상대를 밀어낸 주디스가 곧바로 앞으로 짓쳐 들었다. 눈빛이 뜨거웠다.
아니, 눈빛뿐만이 아니었다. 브랫은 마치 커다란 불덩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디스의 검은 정말이지 불꽃 같았다.
카앙!
캉-!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튀어 오르는 불똥.
거기에 섞인 오러가 상당한 두려움을 선사했다.
생명이라면 무조건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 주디스의 기세는 이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검격뿐만이 아니었다.
발걸음에도.
시선에도.
호흡에도.
그야말로 모든 행위에 깃든 화염의 기운이 뜨겁고 지독하게, 브랫을 향해 달라붙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난감함이 깃들었다.
‘좋아.’
주디스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 할리파의 장남인 가람과의 싸움에서 느낀 점이 있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불이 품은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고, 그 무엇보다 커다란 고통을 선사하는 화염을 통해 상대의 공포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다.
상대를 위축시키고, 더 나아가 의지마저 꺾어 버린다.
나아가서 동작 하나하나마저 제한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검이 코끝에 닿을 때까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로 만든다.
단순히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보다도…… 압도적인 폭력!
지향점을 발견한 주디스가 사나운 웃음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계속해서 휘둘렀다.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검과 검이 만들어 내는 불꽃이 온 세상을 덮어 버릴 정도로 뜨겁게, 또 거칠게.
……이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러한 양상이 10분가량 이어졌을 무렵이었다.
‘뭐지?’
이상했다.
분명 지금의 브랫 로이드는 밀리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방어에 치중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열세를 보이는 상태. 여유 없는 표정과 이마 가득 흐르는 땀이 그걸 증명했다.
헌데, 상대를 몰아붙이는 주디스 역시 심신이 편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운 느낌.
마치 두꺼운 솜옷을 입고 진한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꽃으로도 날려 버릴 수 없는 습기가 몸 곳곳에 스며든 듯했다.
‘이 자식, 뭔가 수를 썼구나.’
주디스가 이를 악물었다.
예전에 비슷한 것을 겪어 보긴 했다.
늪처럼 끈적끈적한 오러를 흩뿌려 놔 움직임에 제약을 주는 오러 운용. 성격답게 얍삽한 짓을 한다고 뭐라 했던 기억이 났다.
헌데 지금의 수법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안개가 아니었다.
습기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 가득 흩뿌려져 있는 브랫 로이드의 오러가, 새파란 물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닐 터였다.
허나 주디스의 귀에는 정말로 들렸다. 사방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뒤편에서 짓쳐 들어오는 오러의 물결을 걷어내기 위해 주디스가 불꽃의 검을 휘둘렀다.
허사였다. 지금의 반격은 브랫이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일거에 터뜨린 것으로, 급작스럽게 휘두른 검으로는 도저히 막아 낼 길이 없었다.
마치 막아 놨던 제방을 삼면에서 동시에 터뜨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주디스가 와락 인상을 썼다.
결국, 그녀에게 남겨진 길은 정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자신을 기다리는 브랫 로이드 쪽을 돌파하는 것뿐이었다.
으득- 어금니를 간 주디스가 발에 힘을 주고 전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푸흡-!
삼면에서 밀려오던 오러의 파도가 힘을 잃었다. 기세를 잃고 무너진 기운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허나 주디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피 분수를 내뿜으며 비틀거리는 브랫 로이드.
그 모습을 본 주디스가 검을 집어던진 채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부축했다.
자신의 무릎에 브랫의 머리를 눕힌 그녀가 소리쳤다.
“뭐야!”
“봤냐? 내 검…….”
“아니, 시발, 지금 이게 뭔데. 갑자기 피는 왜 뿜고 지랄이야!”
주디스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브랫은 웃었다.
최근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항상 저런 표정을 지었던 그녀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얼굴에 적지 않은 걱정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한 브랫이 조용히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기술을 쓰기 위해 무리한 것은 사실이다.
대기에 천천히, 은밀하게 기운을 뿌려 놨다가, 일순간에 유형화시켜 파도처럼 상대를 압박하는 오러 운용.
성공만 한다면 위력은 충분하겠지만,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 정도도 힘들었다.
주디스에게 성취를 숨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대로 다듬어내기 전까지는 보여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성공하는 쪽이 더 멋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른의 말을 듣고 브랫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완벽하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더 멋있어 보이고, 덜 멋있어 보이고는 나중 문제다.
갈등을 풀어내고 화해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 그에 대한 아이른의 대답은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랫 로이드가 미완성의 기술을 무리하게 시도한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검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른의 수단은 편지였지만…… 역시 검사는 검으로 말해야지. 편지는 좀 민망하기도 하고.’
아마 편지를 써서 줬다면, 주디스가 자신을 미친놈처럼 쳐다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놈이, 왜 처웃고 있어? 빨리 설명해. 뭐 어떻게 된 거야?”
“아…… 흔들지 마. 힘들다.”
“그럼 빨리 설명하라고!”
“알았어, 알았어.”
주디스의 재촉을 들은 브랫이 천천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중간중간 기침도 섞었다. 피가 튀는 것을 본 주디스의 얼굴에 더 큰 걱정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브랫이 속으로 생각했다.
‘오버하길 잘했네.’
내부가 진탕되긴 했지만, 사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허나 피를 뿜는 쪽이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아 일부러 입안을 씹었다.
아이른의 조언을 참고하더라도, 이런 쪽에서는 조금 요령을 부리고 싶었다. 그게 브랫의 방식이었다.
물론 주디스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알았으면 부축은커녕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의 손길에는 섬세함이 가득했다.
위로 보이는 얼굴이 못나면서도 귀여웠다.
그래서였다.
브랫이 자신의 진심을 말한 것은, 그저 그 때문이었다.
“주디스.”
“왜.”
“좋아해.”
“……?”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주디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