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브랫 로이드 (1)
로이드 가문의 장자, 브랫 로이드.
거베라 왕국의 고위 귀족으로, 혈통에 어울리는 찬란한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바로 그였다.
아니나 다를까. 브랫은 어렸을 때부터 다방면에 재능을 드러냈고, 그중에서도 검술 방면은 왕국의 또래들과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륙의 영재들조차 들어가기 벅차하는 크로노 검술관조차 그에게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검술관의 정문에 도착한 순간, 브랫은 기필코 수석을 차지하겠다고 다짐하며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너희들을 만났지.”
충격적이었다.
린제이 가문의 위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허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체력도, 파워도, 기술도.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가 일리아 린제이였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평민 출신에 체계적인 검술도 배운 적 없는 주디스가 자신보다 앞서간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브랫은 브랫이었다. 중간평가가 끝난 이후, 그는 관주의 조언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편협함을 내려놓은 로이드 가의 천재는 또 한 번 도약하여 수련생들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마음속에 또다시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주디스를 넘고, 일리아 린제이마저 넘어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다고.
“개 같은 착각이었다.”
“…….”
더욱 강한 어조로 말하는 브랫 로이드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는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지금보다도 훨씬 눈치가 없었던 당시의 아이른조차, 최종평가 이후의 브랫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경쟁의 패배에서 비롯된 열등감과 공허함, 그리고 끝도 없는 자기비하.
아마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의 열 배는 진한 감정이 브랫의 마음을 괴롭혔을 터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브랫은 어떻게 그 괴로움을 극복했을까.
주디스의 말 덕분일까?
주디스의 주먹질과 도발 덕분에 오기가 생겨서 다시 검술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온전히 그러한 이유 때문인가?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주디스 때문은 아니야. 아니,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 주디스의 지분도 어느 정도 있는 건 분명하다. 검술관으로 돌아간 후에도 녀석 도움을 꽤 받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한 건 아버지의 조언 덕분이었다.”
패배감과 공허함을 가지고 가문에 돌아온 날.
브랫 로이드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최종평가 이후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던 그였지만, 가주인 더글라스 로이드는 브랫의 닫힌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느꼈던 기쁨과 즐거움, 이후에 닥쳐온 박탈감과 좌절감까지 전부.
그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꾸지람도 아니었고, 격려도 아니었다.
간단한 질문이었다.
‘네가 검을 배우는 이유는 최고의 검사가 되기 위함이냐, 아니면 좋은 영주가 되기 위함이냐.’
‘…….’
브랫은 아버지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꼭 검술 분야에서 1등이 될 필요는 없다.
그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너는 충분히 훌륭한 영주가 될 수 있을 테니, 쓸모없는 감정으로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대충 이런 뜻일 터였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긍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자신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는 동기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럽게 느껴졌다.
짓밟혀 아래로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은 반대로 형편없이 느껴졌다.
그런 브랫에게, 아버지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더글라스 로이드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며.’
‘제라드 로이드의 멋있는 형이고.’
‘프레드 가문의 자제를 비롯한 여러 아이의 친우이다.’
‘또 미래 로이드 가의 훌륭한 영주가 될 몸이기도 하지.’
‘다시 한번 묻는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이고, 친구이자 영주인 브랫 로이드. 너는 이 아비가 말한 모든 것보다도 검사로서의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봐라. 네가 검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공통점을.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글라스 로이드는 그 말을 끝으로 아들의 방을 나섰고, 혼자 남은 브랫은 아버지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아니, 곱씹는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고민이 길지도 않았다.
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래. 검술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부분에서, 타인과의 경쟁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랬다.
좋은 아들은 있을지라도 ‘1등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좋은 형은 될 수 있었으나 ‘1등 형’은 될 수 없었다.
형이라는 위치는 애초에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친구라는 신분도, 로이드의 영주라는 신분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의 자신보다 나아지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남과의 비교는 필요 없었다. 그만큼 허무하고 의미 없는 것도 없을 터였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자 자연스레 검술에 대한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검술은 정말로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많다.’
‘그리고 그것들 전부는 타인과의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과의 경쟁을 필요로 할 뿐이지.’
‘그렇다면 검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남보다 뒤처진다고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와의 경쟁에 힘쓰는 것.’
‘자신의 한계를 계속해서 갱신해 나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것 아닐까.’
“물론 타인과의 경쟁이 전혀 의미없다는 뜻은 아니다.”
허공을 응시하던 브랫이 아이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여전히 주디스보다 앞서나가고 싶다. 일리아가 최연소 소드마스터 타이틀을 딴 게 견딜 수 없이 부러웠고, 끝을 모르고 강해지는 너를 쫓아가기 위해 아득바득 검을 수련할 생각이기도 해.”
“…….”
“하지만, 그 생각에 매몰되어 내 중심을 잃지는 않을 거다.”
경쟁이 패배로 이어지고, 패배가 열등감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열등감이 공허함과 자기비하로 이어지고.
누구나 겪는 아픔이다. 어린 나이에 괴물들을 만난 브랫은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잠시 흔들리더라도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갈 힘을 얻었다.
진짜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영웅에는 순위가 없다. 1등 영웅, 2등 영웅 같은 게 어딨어. 좋은 뜻을 품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건데.”
“…….”
“그러니까 쓸데없는 비교는 집어치우고, 네가 가려는 길을 가라.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어. 그 길은 꾸준히 걸어가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길이니까.”
알겠냐?
마지막 말을 마친 브랫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푸른 눈동자가 호수처럼 깊고 평온했다.
아이른은 그런 친구의 눈을 요술사의 감각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마음이 브랫의 육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정말이야. 브랫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
사실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제트 프로스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타인과의 경쟁, 타인과의 비교에 지나치게 신경 쓰다 보면 자신을 잃기 마련이라고. 진짜 중요한 것은 다른 쪽에 있다고.
허나, 그의 말보다 브랫의 말이 더욱 깊숙이 와닿았다.
영웅에는 순위가 없다.
꾸준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길이 있다.
두 문장이 자신의 가슴속에 깊게 각인되는 것을 느끼며, 아이른은 자신의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허나 브랫이 한 박자 빨랐다. 묘한 미소를 지은 그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이런 얘기가 씨알도 안 먹히는 녀석도 있지.”
“…….”
“우리랑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진 녀석. 목표로 한 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끼는…… 우리 같은 녀석들이랑은 다르게,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꿈을 가진 자식.”
“주디스 이야기야?”
“걔 말고 더 있겠냐. 너도 봤잖아. 제트 프로스트 씨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던 거.”
브랫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와인이었다.
코르크 마개를 뽑아낸 그가 병나발을 불었는데, 그러한 귀족답지 않은 모습조차 묘하게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물론 아이른이 어떻게 생각하든 브랫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반 병을 비워낸 그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주디스랑 우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지. 그 녀석은…… 대륙 최고의 검사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1등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걷는 길은 자신과는 완전히 달랐다.
목표에 닿기 전까지는 어떠한 보람도 느낄 수 없는, 괴로움과 절망만이 가득한 가시밭길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조차 대부분은 달성하지 못하는 험난하고 어려운 여정이었다.
아이른은 실제로 그러한 레이스에서 튕겨 나와 타락한 이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샬럿과 빅터가 그랬고, 그레이슨 역시 커다란 위기를 넘겼다.
자신의 검술을 정립하는 쪽으로 노력의 방향을 바꾼 존 드류의 경우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아마 그보다는 좌절에 잠겨 있을 사람들이 훨씬 많을 터였다.
‘그래서 더 염려되긴 해. 주디스도 그렇게 될까 봐.’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걱정거리였다.
허나 브랫의 생각은 아이른과 달랐다.
“그래도 주디스는 괜찮을 거야.”
“…….”
“안쓰럽고, 바보 같고, 어떨 때는 사람 빡치게 만드는 고집불통 민폐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으음…….”
“그만큼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녀석도 없으니까. 빛이 날 정도로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재능은 대륙 최고를 논하기에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성과 독기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녀보다 우직하게 노력을 이어 갔던 존재는 꿈속의 사내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브랫 로이드의 말투가 점점 이상해졌다.
“아프고 쓰라리겠지. 속이 뜨거워 죽을 정도로 힘들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포기하지 않아.”
“…….”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나가는 모습이, 경쟁에 초연해질 수 없어서 누구보다 강하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모습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는 꽤 멋있다고 생각해. 예쁘다고 생각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이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분위기가 묘했다.
단순히 친구를 칭찬하고, 동기의 앞날을 축복하는 뉘앙스가 절대로 아니었다.
눈치가 더럽게 없는 그조차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로, 브랫의 말투에는 과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이른이 브랫을 쳐다봤다.
브랫도 아이른을 쳐다봤다.
남자 둘이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만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브랫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주디스 좋아한다.”
“……!”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픽 하고 웃은 브랫 로이드가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런데, 싸운 뒤에 화해하는 방법 좀 조언해 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