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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74화 (174/388)

◈ 58. 뜻을 세우다 (2)

“…….”

황금색 손잡이의 대검과 이를 타고 흐르는 황금색의 불꽃.

오러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황홀한 빛깔을 띤 아이른 파레이라의 기운을 보며, 대전사 카라쿰은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지.’

정말로 그랬다.

오러 소드를 뿜어내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이 마스터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만큼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을 수련에 힘써 왔을 터였다.

헌데, 그 훌륭한 실력에 맞지 않게 정신력은 굉장히 약해 보였다.

도적 몇 놈을 잡았을 뿐임에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선, 헉헉대는 모습으로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는 황당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로 놀란 건 그다음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물론 해야죠. 스승이자 친구인 쿠바르를 위해서라면.’

오크 최강의 전사이자,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신의 앞에서.

녀석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뱉은 말 그대로, 아이른은 친우를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앞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어떤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철의 의지…….’

누군가를 해할 때는 시골 어린아이처럼 유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누군가를 지킬 때는 이야기 속 영웅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은 또 한 번 변하였다.

영웅처럼 변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젊은 영웅’ 그 자체의 모습을 한 인간 검사를 보며, 카라쿰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군.’

즐거웠다.

단순히 검술 실력이 향상된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대륙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국가 간의 전면전이 사라진 대신 나라 안의 소규모 분쟁이 판을 쳤고, 악마가 자취를 감춘 대신 그보다 끔찍한 악당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당장 저번 달에 마주쳤던 오크 도적 떼만 해도 그랬다.

그처럼 반쯤 마(魔)에 물든 녀석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각자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을 위해 자신의 검을 들겠다고 선언하는 사내가 나타났다.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다른 누군가는 낯부끄럽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말할 포부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의 얼굴.

그의 눈빛이, 아침마다 초원을 따사롭게 비추는 태양보다도 밝게 느껴졌다.

“……묻고 싶구나.”

하지만, 마냥 기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카라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히 영웅의 길을 걷겠다고 말한 그 배짱은 인정해 주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궁금하구나. 그대가 과연 영웅을 입에 담을 만큼 커다란 그릇인지. 영웅의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자리인지. 이것들을 제대로 생각해 보고 그러한 말을 꺼냈는지 말이다.”

“…….”

“옛말에 이런 게 있다.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은 후, 가정을 가지런히 돌보아야 하고. 그 후 나라를 다스리며, 마지막으로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문이 좁은 그였으나 카라쿰의 말은 익숙했다.

옛 성현의 입에서 나온 아주 유명한 고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입을 다물고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론 모든 이를 이 고사에 욱여넣을 생각은 없지만, 그대가 말하는 영웅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답은 충분히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자기 혼자 다스리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대륙의 수많은 이들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짐을 대신 짊어져야만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카라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영웅의 말과 행동, 선택과 생각 하나하나에 얼마나 육중한 무게가 실리는지.

옳고 그름이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신념을 지켜나가기 위해 얼마나 단단한 심지가 필요한지.

그러한 과정에서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실수와, 그에 따라 쏟아지는 비난은 얼마나 쓰라린지.

그것을 견뎌 내기 위해 얼마나 강한 마음이 요구되는지.

아이른은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평생토록 자기 외의 누군가를 책임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반면에 카라쿰은 평생토록 부족의 장으로서 두 어깨 가득 짐을 짊어지고 살아 왔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력이 강하다고, 단순히 성품이 선하다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칭호…….’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받자, 아이른의 얼굴에 고뇌가 묻어났다.

그를 본 카라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혼을 낼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해 주길 바랐다.

허나 진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깊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터.

잠시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보던 그가, 재차 아이른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파악해라. 전생이라는 커다란 자극에 휩쓸려 버린 건 아닌지…… 거대한 검술관의 장도, 일국의 왕도, 거대한 부족의 장이었던 나조차도 감히 품지 못했던 뜻을 좇을 정도로 지금의 마음이 진심인지…… 조용히 생각해 봐라.”

“…….”

후우, 길게 조언한 카라쿰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양날 도끼를 정령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을 쓰려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얌전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화르륵, 검에서는 더욱 강렬한 황금빛의 오러 소드가 피어났다.

카라쿰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짓이냐?”

“지금껏 만났던 검사들이 그러더군요.”

슬며시 미소를 지은 아이른이 몇몇 이들을 떠올렸다.

검술관에서 만났던 랜스 페터슨과 이안 검술관주.

오랜만에 재회했던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그랬다. 그 누구보다 검사다웠던 그들은 말이 아닌 검으로써 자신의 뜻을 전달했고, 자신의 의지를 보여 줬다.

그리고 지금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그 누구보다 검사에 합당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검사는 검으로 말해야 한다고.”

“…….”

“단순히 전생의 기억에 휩쓸린 게 아닙니다. 타이밍 좋게 제가 쌓아 올리던 탑의 마지막을 장식했을 뿐, 지금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저는 언젠가 이 길을 걸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네놈…….”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저와 어울려주시죠.”

화르르륵-!

단단하기 그지없는 대검.

그 위를 뜨겁게 감싸고 있는 불꽃.

굳세면서도 이글거리는 의지를 한껏 뽐내며 다가오는 인간 검사를 보며, 카라쿰이 웃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불꽃에 취한 젊은이의 도발이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오냐, 제대로 두들겨 패 주마!”

약간의 분노.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큰 기쁨과 즐거움.

그러한 감정을 가슴에 품은 채, 카라쿰이 다시금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거칠게 아이른을 압박했다.

콰앙!

쾅!

콰아앙-!

은퇴한 부족의 장과, 영웅을 지망하는 젊은 검사.

신기하기 그지없는 조합을 지켜보며, 고르하 역시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아이른은 간단한 세면 후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카라쿰과의 대련이 너무 격했던 탓이었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말은 전부 수긍했지만, 전생의 기억에 휩쓸려 가벼이 말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을 향해 품었던 마음과 친우를 위해 품었던 마음.

그 밖에 모든 불꽃을 하나로 모아 준 지금의 뜻과 신념은, 앞으로 꺼지는 일 없이 영원히 타오를 터였다.

아이른은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쿰의 다른 충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단순히 마인을 마주했을 때라면 고민할 것 없다. 무찌르면 그뿐. 이는 옳고 그름이 분명한 상황이다.

허나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은…… 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어야 하는 상황.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이든 내려야만 한다면, 자신은 과연 흔들리지 않고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로 인한 원망의 무게, 죄책감의 무게를 짊어지고 계속해서 나아갈 자세가 되어있는가?

그런데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러한 가시밭길을 계속해서 헤쳐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직은…… 무리야.’

문득 알하드 산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옳지는 않지만,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만들어진 불편한 균형점.

아이른은 끝내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객관적인 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만이 존재할 뿐.

그런 불편한 상황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답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단단한 주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지식, 노력이 필요했다.

‘아마 이그넷은 훨씬 전부터 이러한 노력을 해 왔겠지.’

신념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존재,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이름이 떠올랐다.

자신과 달리 그녀는 왕의 길을 추구하고 있었으나, 수많은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 선택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무겁다는 사실까지도.

비단 이그넷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부족장 타라칸도.

검술관의 주인인 이안 관주도.

그밖에 홑몸이 아닌 다수를 책임져야 하는, ‘장’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을 거라는 들었다.

이를 깨닫자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삶을 살아왔는지, 그 역시 반대로 깨우칠 수 있었다.

“……잘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검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꿈이라는 것이 처음 생겼기 때문일까.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두려움도,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압박감도 더욱 커졌다.

아이른은 실로 오랜만에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어 바닥을 바라봤다.

“잘할 수 있을까라니, 무슨 소리야?”

그런 그에게, 어느새 다가온 브랫 로이드가 질문을 던졌다.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던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브랫.”

“왜.”

“내 고민 좀 상담해 줄래?”

“어?”

“응? 왜?”

“아니. 마침 나도 네게 고민 상담 좀 받으려고 했었다.”

“어? 진짜?”

아이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브랫 로이드는 강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그야말로 귀족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예전에는 거기에 오만한 느낌이 더해져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분위기마저 개그 요소로 활용할 만큼 익살맞고 편한 존재가 된 상태였다.

헌데, 그런 그가 고민이 있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다고?’

쿠바르도 아니고?

몹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브랫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네가 먼저 말했으니까, 네 얘기 먼저 해라.”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자신이 품은 뜻과 카라쿰의 말, 그로 인한 고민을 찬찬히 털어놓았다.

당연하게도 브랫은 그의 꿈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 보다 어울린다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 따위 없었더라도, 아마 이 녀석은 언제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터였다.

로이드 가의 장자는 친우의 뜻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렇기에 화도 났다.

이그넷, 타라칸, 이안.

그 밖의 거대한 책임을 두 어깨에 지고 있는 존재들.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의기소침해지는 아이른을 보며, 브랫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싸가지없는 녀석이군.”

“어? 누구?”

“너 말이다.”

“아니, 왜…….”

“네가 말한 이들을 봐라. 하나같이 소드마스터, 아니면 그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들을 언급해 놓고, 거기 비해 뒤처진 것 같다고 말하면 나는 뭐가 되지?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영웅이 될 깜냥도 아닌 나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 조용히 해라.”

“…….”

따끔한 말로 아이른을 침묵시킨 브랫이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주디스만 해도 지금껏 이 녀석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했던가.

또래 중 누구보다 잘난 주제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른의 모습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도 됐다.

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남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다.

그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조급함을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거의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던 게 신기한 일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기꺼운 마음도 들었다.

검술관 때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나았다.

당시의 녀석은 그야말로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면, 지금은 확실히 또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게다가, 이쪽 분야라면 내가 전문가니까.’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했다.

검술관 시절 일리아와 아이른 녀석들 때문에 호되게 앓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친구에게는 해 줄 말이 적지 않았다.

“아이른.”

“응?”

“검술관 때 기억나? 내가 똥 씹은 표정하고 가문 돌아갔을 때.”

“아, 그…… 주디스한테 맞았을 때?”

“닥쳐.”

“미안.”

“어쨌든…… 그때 얘기를 해 주지.”

옛일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브랫 로이드.

그런 그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경청의 자세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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