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73화 (173/388)

◈ 58. 뜻을 세우다 (1)

아이른 파레이라와 카라쿰, 고르하는 구르가르의 무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산을 내려왔다.

평범한 이들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마스터 간의 대련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어차피 산 밑의 공터는 구경꾼도, 방해꾼도 없는 대련에 최적화된 장소였으니 먼 길을 갈 필요도 없었다.

허나 그 짧은 시간, 카라쿰은 이 어린 인간이 어딘가 바뀌었다는 점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꽃이 피었어.’

성큼성큼 앞서가는 아이른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인간 사회를 떠돌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오크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기 때문일까.

대륙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두 손으로 꼽기도 부족할 만큼 많았다.

비단 검술의 달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적인 강함과 별개로, 오랜 세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며 자연스레 위엄을 쌓아 올린 사람들.

혹은 자신의 신념, 뜻을 관철하며 거친 세상을 단단히 버텨 왔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도, 분위기가 저 청년에게서도 느껴졌다.

‘오히려 검술의 경지가 상승한 느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아이른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지도 대련을 받아 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사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언가 더 느껴지는 것이 있을 터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진짜 대화를 나눠도 되고.

여기까지 생각한 카라쿰이 반 발짝 뒤처져서 걸어오는 고르하를 바라봤다.

그가 물었다.

“왜 따라오나?”

“따라오면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만.”

“저도 보고 싶습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났는지.”

“……사내들 셋이 나누기에는 다소 징그러운 표현이군.”

“하하. 그렇다면 조용히 구경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하산이 끝났다.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카라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인 카라쿰이 땅을 향해 팔을 펼쳤다.

쩌저적

그드드드드득……

지이이잉-!

지면의 균열과 함께 위로 솟구친 땅덩이 속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흙더미는 무기를 토해낸 뒤 스러졌고 카라쿰이 이를 쥐었다.

해머와 한 손도끼가 아닌 양날 도끼.

상대가 처음부터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른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대검을 소환했다.

슈우욱

터업!

매일같이 휘두르던 검의 손잡이건만,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대검이 변화한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변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전생의 자신을 확인하며 더욱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검은 꿈속 사내의 검이 아닌 자신의 검이지만, 그의 유지 역시 얼마간 남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 사내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흡.”

우우우우웅-!

잠시 검을 바라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멋들어진 대검에 황금빛이 피어오르자 종족이 다른 고르하조차 감탄할 만큼 멋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물론, 카라쿰은 그런 감상 따위를 갖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웅-!

아이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오러를 끌어올렸다.

검은 도끼날에 칙칙한 오러가 더해지자 투박한 듯하면서도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카라쿰이 말했다.

“먼저 와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파앗-!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변화도, 속임수도 없었다. 정직하고 직선적인 돌격.

허나 거기에 담긴 힘만큼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실력이 애매한 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공격이 더 까다로울 터였다.

물론 카라쿰의 실력은 애매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에 들어가는 초강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날아드는 대검에 맞춰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그가 육중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오크 하나와 인간 하나가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소리가 터졌다.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금속음에 고르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둘은 오랫동안 싸움에 굶주렸던 이들처럼 광폭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특히 아이른 쪽이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콰앙!

쾅!

콰아앙!

콰앙!

단단한 코어를 중심으로 휘둘러지는 연속 공격.

카라쿰이라는 동상을 찌그러뜨리려는 듯 강맹한 검세에서는 무자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두르칼리의 대전사는 일말의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심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는 반격에 나설 생각 없이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는 상황.

아이른의 실력이 급상승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카라쿰을 당황하게 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아이른이 될 공산이 컸다.

자신의 대부분을 드러냈던 그와는 다르게, 카라쿰은 아직도 많은 것을 보여 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드드드득-!

다섯 정령 중 가장 밸런스가 좋은 땅의 정령(土氣).

땅의 오러를 활용하면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이라도, 아무리 묵직한 공격이라도 탄탄하게 받아내기 좋다.

물론 경지가 부족할 경우 지면이 쪼개지듯 근골이 박살 나는 경우가 생기겠지만, 적어도 동급 미만의 상대에게 그런 꼴을 당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물의 오러(水氣)를 활용하기보다 쉽고, 단순하면서 위험부담도 적었다.

카라쿰은 거기에 하나의 기운을 더 추가했다.

스르르륵

발바닥을 타고 자라난 나무의 기운(木氣)이 바닥에 깔렸다.

지면에 뿌리박듯 퍼져나간 오러가 그에게 안정감을 더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오러를 운용하면 기동력에서는 손해를 보지만, 강하게 쏟아지는 우박을 버텨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니나 다를까, 공세를 쏟아내는 입장의 아이른이 더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라쿰이 말했다.

“호기롭게 대련을 신청한 것치고는…… 별거 없구나!”

콰아아아앙!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도끼날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하늘과 땅을 찢어 버릴 듯 억센 공격!

이 역시 땅과 나무의 조합 덕분이었다.

안정적이고 낮은 중심을 통해 동작이 크고 균형에 무리가 가는 동작도 순식간에 해낼 수 있다.

의표를 찌르고 들어온 커다란 일격에 아이른이 열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계속 부탁드립니다.”

“좋다!”

고개를 끄덕인 카라쿰이 아이른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싸움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무작정 찍어누르는 방식은 아니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카라쿰은 이 인간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앞에서 당당했던 모습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도, 여러 날을 지켜보며 알게 된 성실함도 하나같이 전사의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었다.

그는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며 오행신공의 다섯 가지 기운을 차례대로 풀어나갔다.

실전을 통해 정령과 오러의 접목을 느껴볼 수 있도록 배려한, 지도 대련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싸움 흐름이었다.

우우웅-!

브랫 로이드의 검술보다도 더욱 부드러운 물의 오러가 아이른의 검을 희롱하고.

쩌저정-!

아이른의 것만큼이나 단단한, 허나 훨씬 세련된 무쇠 오러가 아이른의 전신을 노리고 들어온다.

마지막 불의 오러 역시 못지않았다.

주디스의 것만큼이나 뜨겁고 광폭한 기운을 두른 카라쿰이 거칠게 상대를 압박해 갔다.

금기(金氣) 정도는 아니었지만, 화기(火氣) 역시 그가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대응이 생각과 달랐다.

콰앙!

도끼날과 검날이 부딪혔다. 붉은 오러와 황금의 오러가 엉켜 만들어진 불똥이 위협스럽게 느껴졌다.

콰아앙!

두 번째 공격이 쏟아졌다. 이번에도 아이른은 물러나지 않았다.

받아낼 목적이 아니라 정면에서 맞서는 느낌으로, 당당하게 나서는 그를 보며 카라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의 시야에 또다시 튀어오른 불똥이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욱 커다랐다.

콰앙!

쾅!

콰아앙!

콰앙!

그다음에도, 다음의 다음에도 아이른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끼와 대검은 한 치도 후퇴하지 않고 자웅을 겨뤘고, 그에 따라 피어오르는 불씨의 크기도 점차 커졌다.

그렇게 1분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 카라쿰은 도끼를 거두고 조용히 젊은 인간을 바라봤다.

급격한 체력 저하 때문에 퍼렇게 질려 버린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허나 그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위협적인 형상으로 검을 타고 흐르고 있는 황금의 불꽃.

화르르르륵-!

무쇠의 오러에 이어 불꽃의 오러를 깨우친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카라쿰이 질문을 던졌다.

“대련은 여기까지 하지. 계속 하기엔 궁금해서 못 참겠다.”

“허억, 헉…… 무엇입니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금발의 청년.

허나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이 피워낸 불꽃을 자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아이른을 보며 카라쿰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근엄함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

“전생의 기억을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 무언가를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도 알겠고.”

“허억, 후우……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대전사의 말씀대로 지금껏 중심 없이 겉돌고 있던 불꽃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축하한다.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에 스스로 불의 정령을 피워낼 만큼 뜨거운 신념을 품어내다니. 부족의 얼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성취군.”

“과찬이십니다.”

“겸손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돌아오지. 나는 네 전생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제 조금 궁금하기는 해.”

“…….”

“하지만 이를 억지로 캐묻는 것은 실례겠지.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네가 완성시킨 뜻, 신념.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는가.”

화르륵-!

질문을 마친 카라쿰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에게 젊은 시절과 같은 열정, 패기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육신이 아닌 정신의 나이가 말이다.

허나 젊은 천재가 꽃을, 아니 불꽃을 피워 내는 순간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가슴이 뜨거워졌다.

카라쿰은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아이른을 응시하였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대검을 바닥에 꽂은 청년은 잠시 말을 아꼈다.

그리고 꿈속의, 아니 전생의 사내가 걸어왔던 길을 찬찬히 떠올렸다.

가족을 잃고.

신뢰를 잃고.

슬픔과 고독함 속에서 피워낸 증오와 분노로 삶을 지탱하고, 수많은 환상 속에서 악착같이 버텨 낼 힘을 얻었던.

허나 그보다 강하고, 그보다 아름다운 선의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 사람.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자신의 마음속에 퍼져 있던 불씨를 하나로 모으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친우에 대한 우정을 넘어서.

자신의 주변보다 더 넓은,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손을 내밀고 싶다.

말을 마친 아이른의 눈동자에서 카라쿰보다 더욱 진한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를 들은 카라쿰이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거창하구나. 네 포부는…… 단순히 검의 최강자가 되겠다는 말보다도 더욱, 훨씬 크다.”

“…….”

“그 누구도 쉽사리 입에 담기 힘든, 마치 영웅의 길을 걷겠다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는 뜻이다. 너는 이를 알고서 그러한 뜻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카라쿰도, 아이른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고르하도 말이 없었다.

몇 배는 강해진 듯한 중력이 그들의 주변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른 역시 강해지는 대전사의 기세에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꺾지는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다시금 대검을 들어 올린 그가, 저항하듯 오러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

“제가 품은 뜻이 영웅의 길을 뜻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 길을 걷겠습니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황금의 불꽃 앞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선언하듯 다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