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72화 (172/388)

◈ 57. 전생을 확인하다 (2)

1.

텃세 같은 거 없으니 편하게 생활하시오. 모르는 건 물어보고.

촌장의 말이었다.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말투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3년간 받아 왔던 취급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광대의 타깃이 된 나를 살갑게 대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영지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런 두메산골에 터를 잡으려는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오지에 사는 이들까지 날 꺼리진 않겠지.”

몇몇 꼬맹이들이 거리를 두고 내 쪽을 바라봤다. 신경 쓰지 않았다.

버려진 집에 들어선 나는 적당히 짐을 풀고 곧바로 검을 들었다. 대검이었다.

3년 전이라면 들기도 벅찼을 크기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휘익

휙-!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더 위력적인 검격을 쏟아낼 수 있을 때까지. 남쪽의 악마를 벨 수 있을 때까지.

그럴 때까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굳은 다짐과 함께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2.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바뀐 건 없다.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고, 마을은 여전히 평온했다.

신기한 듯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던 꼬마들이 사라진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검술 실력 역시 변함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지만, 익숙했다.

나는 기대도, 실망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3.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검을 휘둘렀다. 나갈 일은 딱히 없었다.

입주하며 촌장에게 건넨 돈 덕분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제때 보충되었다.

내가 할 일은 오로지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휘익!

사선으로 검을 휘두르고.

휘익!

수직으로 검을 휘두른다.

검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야말로 단순한 동작의 반복.

어쩔 수 없었다. 소문은 이미 온갖 곳에 퍼져있었다. 광대의 미움을 사기 싫은 검사들은 나에게 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괜찮았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검을 휘두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몸속을 휘젓는 뜨거운 고통을 숨으로 토해내며, 또다시 대검을 내려친다.

휘익!

그와 함께, 나를 성 밖으로 내쫓던 가신의 환상이 베어졌다.

4.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검을 휘둘렀고, 마을은 더 이상 내게 관심이 없었다.

며칠 전 힐끗 시선을 주고 간 남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몰려오는 땅거미를 바라보며, 나는 대검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광대 가면을 쓴 모습.

그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더러운 놈!

자기 생각만 하는 녀석! 네가 난리를 피우면 우리가 위험해진다고!

검은…… 알려 줄 수 없소. 미안하오.

꺼져. 아직도 네가 영주인 줄 알아? 일 없어!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녀석들을 향해, 나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머리가 쪼개지고, 팔다리가 날아가면서도 그들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깨져나간 가면 뒤의 눈동자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나는 지쳐 쓰러지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검을 움직였고, 마침내 아침이 찾아왔다.

“허억, 헉, 허억…….”

모르겠다.

이것이 광대 악마의 수작질인지, 녀석에 대한 증오가 불러온 환상인지.

어느 쪽이든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었다.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날 저버린 영지민들에 대한 분노.

날 외면한 검사들에 대한 설움.

악마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증오.

그것들이 새로운 연료가 되어 나를 지탱했다.

휘익!

휘익

휘이익-!

검을 휘둘렀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시간의 흐름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끝없는 고행을 이어 나갔다.

5.

세월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검술이 늘었다는 점이었다.

사선 베기, 수직 베기, 수평 베기밖에 모르는 건 예전과 같았으나, 위력이 달랐다.

서너 번을 얻어맞아도 쓰러지지 않던 환상들이 이제는 한 번에 사라졌다.

흡족해진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날 쫓아냈던 가신의 목을 쳐 내고.

스각-

남편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던 아낙네의 머리를 베었다.

나를 붙잡지 않았던 사냥꾼의 몸도, 끝내 검을 알려 주지 않았던 검사의 허리도 모조리 베어 버렸다.

광대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대륙의 영웅들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웃었다.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웃으며 휘두르는 검에 또 하나의 광대가 박살이 났다.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면 안의 얼굴로 향했다.

이번엔 누굴까.

제 가족만 생각하며 손가락질을 했던 노인네일까.

그도 아니면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던 수석 기사 녀석일까?

가면이 부서져 내렸다. 이윽고 드러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나는 마을에 온 뒤 처음으로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 놀랐나?

놀랐나본데.

이봐,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경악한 나를 비아냥거리는 또 다른 나.

녀석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콰득-!

재차 검을 집어 든 나의 공격에, 나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6.

시간이 흘렀다.

아니, 세월이 흘렀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런 것을 헤아릴 정신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광대들과, 그 사이에 점점 숫자를 불려가는 또 다른 나.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검을 휘둘렀다.

후웅!

후우웅-!

퍼거거거걱!

한 번의 검에 대여섯의 광대가 부서지고, 두 번의 검에 열이 넘는 환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도 끝이 없었다. 광대들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더는 낮과 밤의 경계도 없었다.

땅거미와 그림자. 어둠이 있다면 환상은 어느 곳에서든 피어났고, 끊임없이 나를 비웃고 조롱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나는 쉴 틈도 없이, 지칠 권리조차 없이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그때였다.

“안 힘들어요?”

수없이 쏟아지는 악의 속에서 피어난 맑은 목소리.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광대가 아니었다.

앳된 얼굴에, 순수한 눈망울.

가면을 쓰지 않은 뽀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의 손에는 꽃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줄게요.”

“…….”

아이는 오래 있지 못했다.

황급히 달려온 아낙네가 다가와 꼬마의 손을 낚아챘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게 무서운 듯,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연신 고개를 숙인 뒤 황급히 사라졌다.

언제 열렸는지 모를 문이 꽉 닫혔다. 나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외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

나는 아이가 사라진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꽃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함께 아이의 눈망울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

나는 지금의 감정을 어디서 느꼈는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것이 없자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내키지 않는데 검을 든다니. 십 년도 넘는 세월을 미쳐서 살아왔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과 달리 몸은 움직였다. 어느새 자세를 취한 나는 환상을 상대하기 위한 태세에 들어갔다.

“…….”

허나 더는 광대들이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온전한 정신으로 검에 매진하였다.

7.

세월이 흘렀다.

영지를 떠나 마을로 들어오기까지보다 훨씬 긴 세월이었다.

10년도, 20년도 훨씬 더 됐을 것 같은 세월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검을 휘둘렀다.

외롭지는 않았다.

아주 잠시 모습을 감췄던 환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땅거미와 함께 고개를 내밀었고,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옆에서 조롱을 이어 가고 있다.

부숴도, 베어내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광대 가면은 더는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랬다.

내가 외롭지 않은 것은 우후죽순으로 돋아나는 환상 때문이 아니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차가움 때문도 아니었고.

내가 쏟아내는 세상에 대한 증오 때문도 아니었다.

광대들로부터 시선을 거둔 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것을 하나씩 떠올렸다.

후웅!

어린 시절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자애로운 표정과.

후웅!

그런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 준 아내의 따사로운 얼굴.

후우웅!

그로부터 2년 뒤에 태어난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과, 아들이 보여 준 순수한 눈빛.

이제는 성인이 됐을 소녀가 꽃을 건네며 보였던 눈빛과도 비슷한 그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찼던 나의 정신은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아갔다.

“후우.”

깊은 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상황은 여전했다.

수많은 환상이, 나의 인생을 좀먹었던 수많은 인간군상이 어둠과 가면을 뒤집어쓴 채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다.

괜찮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뱉었다.

밤의 시원한 공기를 머금자 가슴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한 어둠속으로 천천히, 단단하게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병신 같은 새끼. 뒈질 거면 혼자 뒈지지, 왜 엄한 사람까지 끌어들이고 난리야?

나에게 눈을 부라렸던 늙은 영지민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그를 베지 않고 지나쳤다.

어처구니없는 놈일세. 아내와 아들이 죽은 게 우리 탓이야? 네 탓이잖아. 우유부단하게 있지만 않았어도 둘 중 하나는 살렸어.

나의 아픔을 후벼 파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환상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증오와 분노, 두려움과 공포로 물든 광대들의 눈빛이 화살처럼 쏟아져 꽂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굳건한 걸음을 유지하였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가슴속에 품었던 독이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 …….

그리하여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사람의 뼈와 살점이 카펫처럼 깔려 있는 추악한 곳.

그 중앙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번에도 광대였다.

허나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나의 목소리가 녀석의 귀에 꽂혔다.

“남쪽은 아니지만, 찾아왔다.”

어떻게……!

당황과 분노로 얼룩진 광대 악마의 목소리.

나는 피식 웃었다. 가면 뒤로 일그러진 녀석의 표정이 훤히 보였다.

세상에 대한 악의와 집착을 내려놓자 놈의 가면도, 놈을 둘러싼 어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고 싶은 몰골은 아니었다.

나는 벼락처럼 대검을 휘둘러 광대 악마의 육신을 쪼개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십 년간 단련해 온 결정체가 은회색의 빛줄기로 화해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크아아아아악!

귀청을 찢을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녀석의 반격은 허무하게 스러졌고,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던 육신도 형편없이 상했다.

반파된 가면 뒤의 끔찍한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세상에 품었던 증오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도 더 악독한 눈빛이 나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광대 악마는 덤벼들지 못했다.

오히려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흩뿌리며 저 멀리,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녀석의 숨통을 끊기 위해, 강철처럼 정련된 빛줄기를 손에 든 채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최상의 상태라 생각했다. 나의 검은 찬란하진 않으나 흠 없이 강건했고, 나의 마음 역시 오랜 방황에서 벗어나 단단했다.

그 어떤 대단한 검사, 그 어떤 대단한 악마가 와도 이겨낼 수 있을 듯 강한 자신감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뤄내야 할 육신이, 몸뚱이가 따라 주지 못했다.

시선이 검 날을 향했다.

어느새 주름이 깊어진 얼굴을 보며, 나는 안타까움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콰악!

땅에 꽂힌 대검에 의지한 채, 나는 광대가 사라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서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어리석기 그지없던 나를 바로잡은 것은, 그 누구도 상대하지 못했던 광대 악마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힘은.

‘증오와 분노로 벼려낸 검이 아니라…….’

소녀가 전해 줬던 꽃에 담긴 순수한 선의.

그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는 후회가 말라가는 육신을 뒤덮었다.

“허억, 헉…….”

생명이 꺼져 감을 느낀다.

숨을 쉬는 것도, 생각을 이어 가는 것도 힘들다. 안타까웠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지금의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다.

그로 인해 더는 나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빌었다.

‘헛된 바람일지라도…….’

죽어가는 늙은이의 추한 발악일지라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지금의 마음이, 나의 유지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

……

……

“…….”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구르가르의 의식에서 깨어났는지,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디스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루루,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쿠바르.

자신의 소중한 친구들을 바라본 아이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왔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정령사 고르하, 그리고 대전사 카라쿰이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

“…….”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시선을 보내는 아이른과 카라쿰.

그를 본 고르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도록 상대를 바라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말했다.

“지도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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