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71화 (171/388)

◈ 57. 전생을 확인하다 (1)

저벅저벅

오크 전사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는 빠른 걸음걸이로 영산에서 내려온 뒤, 지체없이 구르가르의 묘가 있는 동산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력을 다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지금의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지금의 감정은 무엇인가.

호기심?

두려움?

그리움?

모르겠다.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후우, 잠시 멈춰 숨을 가다듬은 그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

그런 그의 뒤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우선 루루,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이들은 아이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우들로, 당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른의 전생에 깊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허나 카라쿰은 달랐다.

그는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해 모른다. 쌓인 인연도 없다시피 하다.

앞으로 오행신공을 가르칠 예정이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검 한 번 맞댄 것이 고작이다.

현생의 그도 잘 모를진데 전생까지 궁금해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것이 궁금해진 고르하가 물었다. 왜 저 청년의 뒤를 좇느냐고.

잠시 고민하던 카라쿰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나? 늙은이가 재능 있고 젊은 친구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

“알고 있습니다.”

고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주치는 벽이 많아지고, 그것들을 넘어섬에 따라 지쳐 가는 것이 늙은이가 겪는 애환이다.

그들은 여전히 현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모습에 취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지금의 카라쿰이 그러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놀랄 만큼 빠르게 성장했음에도……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녀석이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어. 그랬다가는 꽃이 피는 순간을 지켜보지 못할 것 같군.”

“……여기서 또 한 번 성장할 것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켜보는 재미는 충분하지.”

피식 웃은 카라쿰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네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함께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고르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두 늙은 오크도, 아이른 일행도, 침묵을 지킨 채 동산을 올랐다.

적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다들 생각이 복잡했던 탓에 목적지는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과 달리 점술사의 복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구르가르가 그들을 맞았다.

“여, 왔는가.”

“……술 마시고 해도 돼요?”

“괜찮아, 괜찮아. 유령이라 취하지도 않아.”

“취하지도 않는 걸 뭐하러 마셔요?”

“술을 취하려고 마시나? 아직 하수로군.”

“그럼 왜 마시죠? 맛으로 마셔요?”

“그것도 하수야.”

“그럼…….”

“마시는 데 이유가 어딨어. 술은 원래 그냥 마시는 거야.”

“…….”

할 말을 잃은 주디스가 입을 뻐끔거리는데, 쿠바르가 천막을 젖히며 나왔다.

“스승님, 그만 놀리시죠. 자자, 다들 들어오게.”

“흘흘, 알았다. 부족장님, 그리고 고르하. 미안하지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아이른과 아이른의 지기들뿐일세.”

“이젠 부족장이 아니다.”

“이런, 죄송합니다. 이승을 떠난 지 좀 돼서 그런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받아 주기 힘든 농담을 건넨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카라쿰과 고르하는 얌전히 고인의 지시에 따랐고, 아이른을 비롯한 나머지가 천막의 안으로 들어섰다.

“와…….”

“……!”

그런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

좁은 공간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차원문인 것처럼, 전혀 다른 풍경이 아이른 일행을 맞이했다.

커다란 도시.

요즘 세상에 비하면 다소 촌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도시의 풍경이었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분위기에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허, 그만 놀라고 자리에 눕게. 애초에 귀신인 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새삼스럽게 뭘 그러나?”

모두의 반응을 지켜보던 구르가르가 아이른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상반신이 잔뜩 뒤로 젖혀진, 의자와 침대의 중간 형태의 물건이 다섯 개가 있었다.

가장 우측에는 조그마한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신의 자리임을 직감한 루루가 뾰로롱 날아가 몸을 말았다.

그를 시작으로 아이른, 일리아, 주디스, 브랫, 쿠바르가 차례대로 누웠다.

모두가 자리한 것을 확인한 구르가르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오랫동안 아이른 파레이라 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사내를 만나러 떠날 예정이네. 모두가 알다시피 그자의 정체는 아이른의 전생이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십 년간 검을 휘둘러왔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네. 지금 당장 설명해 줄 수도 있어. 허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한 건, 이 사내의 인생이 그대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물론 여기 있는 모두가 아이른의 소중한 친구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른.”

“예.”

“혹시 여기 있는 이들이 자네의 전생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불편, 혹은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네들에게 묻겠네. 자신의 속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것만큼이나, 남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 역시 적잖게 부담스러운 법이지. 그대들은 아이른 파레이라의 전생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와 깊고 진한 우정을 이어 나갈 자신이 있는가?”

“예.”

“있어요.”

“당연하지!”

“예, 스승님.”

“있습니다.”

일리아 린제이의 대답을 끝으로 장내에 고요함이 감돌았다.

즐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구르가르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좋아. 준비는 다 된 것 같구만. 그럼 바로 시작하지.”

“그런데, 이제 뭐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

딱!

“……므어얽.”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주디스가 기절하듯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브랫도, 쿠바르도, 루루도, 일리아도, 아이른 파레이라도. 모두가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깊고도 진한, 허나 달콤하지는 않은 죽음과도 같은 수마.

그리고…….

……

……

……

그들은 어느새, 꿈속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 * *

“으음…….”

머리가 아프다. 정으로 두개골을 내리치는 것 같은 고통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진다.

절로 나오는 신음에 기사들 중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괜찮아졌다. 직전의 고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시야도 맑고, 정신도 또렷하다.

도대체 뭐였지? 방금은…….

“……다행입니다. 하면, 외람되지만 저희의 결정에 따라 주셔야겠습니다.”

“…….”

내 시선을 받은 기사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해했다.

이 상황이 몹시도 불편하고, 부담스럽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앞을 바라봤다.

더 넓어진 시야에 방안을 가득 차지한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나의 가신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나의 기사들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유능한 나의 하인들이었다.

가족만큼은 아닐지언정, 나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큰 축을 차지했던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나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었다.

“…….”

이런 결과를 바라고 속내를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에 죄책감이 가득하다는 것도 위안거리였다.

물론 그 정도 죄책감으로 그들이 결정을 번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호통을 칠까, 울며 매달릴까, 혹은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떠나겠다.”

결국, 그들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

깊은 한숨과 함께 방을 나서는 나를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등을 찌르는 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라니. 뒤늦은 분노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대부분은 삼켰고, 그러지 못한 일부는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조용히 영주관을 벗어났다.

거리는 한산했으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몇몇 영지민들이 자신을 알아보았다.

아니, 영지민이라 부를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영주가 아니었으니.

하여튼, 점차 몰려드는 주민들이 나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새끼!”

“악마를 치러 가자고? 차라리 단체로 목매달아 죽으라고 하지!”

“악마에 씐 게 분명해! 이미 마인이야!”

“죽여! 죽여야 해!”

“이놈들아, 그게 무슨 소리냐! 영주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다!”

“아직도 헛소리야? 저 자식이 군사를 모아서 악마의 영토로 가겠다는 소문이 이웃 영지까지 퍼졌는데, 아직도…….”

“그럴 리가 없다! 헛소문, 헛소문일 거야!”

“헛소문은 개뿔! 죽여야 해! 아니면 쫓아내야 해!”

“자기 배 불리려고, 우리까지 죄다 악마에게 팔아넘길 속셈이 분명해!”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쏟아지는 악과 분노, 욕설들.

받아 줄 만했다. 넘어갈 만했고, 흘려들을 만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게 아니냐는 소리도 참을 수 있었고, 주민들을 팔아넘길 속셈이라는 이야기는 입안을 씹으니 견뎌 낼 수 있었다.

나는 조금씩 커지는 독을 품고 주민들의 사이를 헤쳐 지나갔고, 마침내 성문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키이잉-!

서슬 퍼런 도끼를 나의 목에 댄 중년인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질문을 던졌다.

“말하십시오, 영주님! 영지의 모든 병력을 차출하여 악마의 영토로 출진하려 했다는 말, 그 말이 사실입니까?”

“…….”

“사실이 아니라면 말씀하십시오.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모아 거짓 소문을 퍼뜨린 녀석들의 목을 치겠습니다. 변명할 것이 있다면 그 또한 말씀하십시오. 더러운 사냥꾼의 귀지만, 깨끗한 강물에 씻어 말을 들을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지금 영지에 퍼진 소문이 정녕 사실이라면, 살아서 나갈 생각은 포기하십시오.

사냥꾼의 말이 끝났고, 주민들의 모든 눈과 귀가 나를 향했다.

“…….”

딱히 속내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기사들과 가신들에게, 하인들에게. 세 차례나 아픈 시간을 겪었던 나다.

이들이 이해해 주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내가 영지를 떠나는 것은 정해져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악에 받친 사냥꾼의 도끼가 목을 향해 날아들 것이고, 나는 가슴에 품은 독을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악마의 조롱거리가 될 터였다.

그것만은 원치 않았다.

나는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었고, 자꾸만 흐려지려는 시야를 닦아낸 뒤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한 말을 꺼냈다.

그 끝에 얻을 것이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 달 전, 광대 가면을 쓴 악마가 나를 찾아왔다.”

“……!”

“그리고 제안했지. 나의 아내와 아들, 둘 중 하나를 살려 주겠다고.”

분위기가 급격히 무거워진 것이 느껴진다.

당연하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광대 모자를 쓴 악마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강대국 하나가 총력을 다해도 제압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위험한 대 악마의 출현에, 나 역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허나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제안도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왔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중 한쪽의 목숨을 끊어내는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나.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들었고, 다행히 그는 화를 내지 않았어. 그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영지를 향해 몰려들고 있는 마물 떼거리였다.”

“…….”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여 한쪽을 선택한다면, 50년간 어떤 악마들의 침입도, 마물들의 침략도 막아 주겠다고.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지.”

내가 아내와 아들 중 어느 쪽을 선택했을 것 같나?

이 말을 꺼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사냥꾼도, 사냥꾼의 뒤에서 성난 표정을 짓던 이들도, 나를 둘러싼 주민들도 조용히 숨을 죽이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을 보며 내가 살짝 웃었다.

아직도 당시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옥인 상황, 결정하지 못하는 날 보며 가면 속에서 활처럼 휘어지는 악마의 눈매, 우유부단한 나를 대신해서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은 아내와 기꺼운 듯 웃음을 흘리던 광대…….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 타버린 재 같은 표정으로 주민들의 앞에 이야기의 마지막을 털어놓았다.

“악마가 말했지. 아내의 자살은 나의 선택이 아니니…… 다시 선택하라고 말이야.”

“…….”

“그렇게 나는, 하룻밤 사이 아내와 아들을 전부 잃었다. 그리고…… 영지는 50년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말을 마친 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선택을 마친 대가로 나의 영지는 대륙의 어떤 곳보다 안전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마물들에 의해 멸망할 운명에서 벗어나고, 거기에 더해 50년의 평화를 얻기 위한 대가가 가족의 희생이라면…… 슬프지만, 아프지만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지를 짓밟으러 달려오던 마물 떼거리가 광대 악마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이 지옥의 처음과 끝, 그 모든 것이 녀석의 여흥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말이다.

“하아, 하아, 후우…….”

가슴이 괴로워졌다. 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억지로 호흡을 바삐 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괴로움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슬픔에서 증오로, 증오에서 복수심으로 바뀌어 가는 무거운 감정.

이를 지켜보던 가신들은 처음에는 함께 괴로워하고 분노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러지 못했다.

복수에 눈이 먼 내가 악마에게 저항할까 봐 노심초사했고, 전전긍긍했다.

급기야는 나를 외면하고,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영지민들, 아니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나와는 달리, 그들은 아직 잃을 것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악마의 든든한 비호를 받게 된 사냥꾼의 도끼날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두렵겠지. 나와는 달리 잃은 것도 없고, 보장받은 세월도 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

“앞을 막아서지는 말아 주게.”

그것이 끝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영지를 떠났고, 주민들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조용하고도 씁쓸한 이별이었으나, 이번에도 나는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지 않음에 안도해야만 했다.

허나 마중 나온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광대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여어, 안타깝고만! 아주 후안무치한 놈들이야. 그렇지 않아?

- 자네가 얼마나 잘해 줬는지 뻔히 알면서 말이야. 흉년일 땐 아낌없이 곡식을 풀었고, 영지민들 하나하나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이런 영주를 헌신짝처럼 배신하다니. 몹시 나쁜 녀석들이라고.

- 그래서 말인데, 새로운 제안을 하지. 나와 계약하자. 어때? 응? 죽이고 싶잖아. 저 녀석들을 괴롭히고 싶잖아. 아내도 빼앗기고 자식들의 목숨도 빼앗겨 봐야 지금 네가 느끼는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응?

-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막아 준다고 한 건 악마하고 마물들뿐이거든. 네가 나와 계약해서 마인이 되면 원 없이 저 녀석들을 도륙 낼 수 있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어때?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

지평선의 끝까지 펼쳐진 도로를 걸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푸근한 웃음으로 아침을 반겨 주던 하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성실한 가신들의 얼굴도, 든든한 기사들의 훈련 장면도, 밝은 얼굴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던 영지민들의 모습도.

그 모든 얼굴이 혐오스러웠다.

그 모든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더욱, 훨씬 더, 견딜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 싫다고? 어쩔 수 없지. 나는 남쪽 산맥 끝자락에 사니까, 언제든 내킬 때면 찾아오라고. 다음에 보자.

악마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정말로 떠났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근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머금고 있을지도.

아니, 분명 그럴 터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뜬 뒤, 녀석이 있을 것 같은 방향을 향해 다짐했다.

그리하겠다고.

영주로서가 아니면 검사로서라도.

혼자서라도.

기필코 힘을 길러, 남쪽 산맥의 끝자락을 찾아갈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의 뜨거운 불이 꺼지기 전에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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