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오행신공 (2)
오행식(五行式)은 정령술도, 오행신공도 전혀 접하지 않은 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숙련자들은 자신이 어떤 면이 부족하고 뛰어난지 알고 있으므로 굳이 이를 행할 필요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령의 문외한들이 참여하다 보니 결과물 역시 초라하고 원시적인 경우가 많았다.
아주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생겨난다거나, 주먹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진다거나, 원석 형태의 금속이 솟아난다거나…….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정령은 그렇지 않았다.
금속, 그리고 불꽃.
두 가지 정령이 동시에 발현된 것부터가 범상치 않았는데, 그 크기는 더욱 대단했다.
거대하게 솟아난 쇳덩이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를 보조하듯 바닥에 깔린 불꽃 역시 정령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허나 더욱 대단한 것은, 두 가지 정령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바닥에 깔린 불꽃이 거대한 금기를 다듬어 냈다. 원래라면 투박했을 형태에서, 도구라 해도 손색이 없는 검의 형태로…….’
화극금(火克金).
불로 금속을 제어한다는, 오행 상극의 묘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며 대 정령사 고르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바르도, 카라쿰도, 그 밖의 정령사들도.
아니, 영산에 모여 있는 모든 존재가 작금의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고르하였다.
정령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기도 했고, 실질적으로 지금의 오행식을 주도하고 있는 오크도 그였다.
자신이 아니면 설명할 이가 없었다.
허나 고르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설명이 아닌 질문이었다.
“자네, 어디서 정령에 대해 배운 적 있나?”
“……쿠바르 씨에게 여러 말씀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쿠바르 님, 저 인간에게 정령에 대해 가르쳤소이까?”
“그렇지 않소. 마음 공부의 목적으로 다섯 정령을 빗대어 조언해 준 적은 있으나, 이런 건…… 예상 못 했지.”
쿠바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아이른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다.
말 몇 마디에 마음속의 불꽃을 키워 나간 것도, 아이젠마르크트에서 타락하기 직전의 인간을 구해 낸 것도 평범한 인간은 보일 수 없는 기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행신공의 고수인 카라쿰, 할리파조차 눈을 부릅뜰 정도의 성취를, 오행식에서부터 보여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카라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오행신공의 전수는, 쌍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군.”
부족 대전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술도, 오행신공도 배우지 않은 자가 두 가지의 정령을 수준급으로 다루고 있다.
이는 자신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정령력을 쌓고, 익혀 나갈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즉, 저 젊은 청년과의 교류를 통해 지식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오크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디스라는 인간이 시련을 이겨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기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테니까.
‘구르가르의 말이 맞았군. 저 인간들의 성장이 부족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마스터 할리파가 남몰래 신음을 흘렸다. 몇몇 오크들은 사정을 알겠다는 듯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크의 사정.
주디스는 그런 것 따위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화산처럼 뜨거운 시선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아이른을 향했다.
‘저 미친 새끼.’
놀라웠다.
어떻게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지.
친우의 성취를 마냥 축하해주기에, 주디스의 속은 그리 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조금 상했다. 열등감, 시기, 질투 따위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그러한 감정에 잡아먹히지는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가 부정적인 감정들을 뜨거운 가마솥에 모조리 때려 넣었다.
그리고 가슴속의 무시무시한 불꽃을 통해 하나로 녹여 냈다.
부글부글……
그리하여 ‘투쟁심’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거듭난 주디스의 마음.
비로소 당당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당장이라도 불꽃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주디스가 아이른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더 크다.”
“응?”
“불꽃의 크기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불꽃으로는 절대 안 져. 기대해. 오행신공 배우고 나면 화상 입을 만큼 뜨거운 검술, 보여 줄 테니까.”
“……그래.”
씨익 웃은 아이른이 악수를 청해오는 주디스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원로 오크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인 전사들이 선의의 경쟁을 도모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들보다 더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브랫 로이드였다.
‘대견해.’
주디스가 원래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는 것쯤은 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냥 성격이 더럽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최근의 그녀는 너무 의기소침했다.
아이른과 일리아를 만난 이후, 그녀의 표정은 밝을 때보다 어두울 때가 더 많았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브랫 역시 마음 한구석이 계속해서 불편하던 차였다.
허나 전사의 시련을 마친 뒤, 주디스는 달라졌다.
여전히 지랄 맞은 면이 있긴 하지만, 몸 안의 독을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정말 다행이야.’
브랫의 얼굴에 방금 전과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주디스를 귀엽다고 생각했을 때의 그 표정이었는데, 남이 본다면 꽤나 부담스러울 광경이었다.
물론 그러한 얼굴을 오래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브랫은 자기 객관화가 철저한 사람이었으니까.
헌데, 이번에는 그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우연치 않게 브랫 쪽을 쳐다보던 일리아 린제이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
“헉!”
“……?”
“일리아?”
툭
아이른 일행 모두가 일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루루는 가지고 놀던 실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또르르 굴러간 실뭉치가 바닥에 긴 선을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욕은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게 일리아였다.
그런 그녀가 입에 담기 힘든 험한 말을 내뱉으니, 모두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아이른이 물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심지어 주디스마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오행식 하고 올게.”
오로지 브랫만이, 일리아에게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둘만의 사건은 그렇게 별 일 없이 끝났다.
휘익!
화르륵-!
“으음, 불이군. 하긴 젊은이들은 대부분 불이긴 하지.”
휘익!
철퍽-!
콰르르르르……
“오오…… 물이군. 상당한데…… 상당한 양이야.”
이윽고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의 오행식이 이어졌다. 일리아는 불, 브랫은 물이었다.
주디스와 아이른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지만, 부족 전체로 보면 손에 꼽힐 정도로 커다란 물웅덩이를 보며 고르하가 또다시 감탄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루루가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양이라 그런지, 요술사라 그런지 잘은 모르겠군. 재능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괜찮아. 나는 요술만 잘해도 충분해.”
씩씩하게 대답하는 루루.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했던 인간 검사들의 오행식이 끝났다.
원로 오크들은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며 흡족하게 돌아갔고, 타라칸과 할리파 역시 각자의 일을 위해 자리를 떴다.
쿠바르도 스승님의 묘를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갔다.
그리하여 자리에 남은 것은 대 정령사 고르하를 비롯한 몇 정령사들, 그리고 카라쿰.
어수선함이 가라앉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카라쿰이 아이른에게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예.”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고르하, 이쪽은 내가 가르치겠다.”
“알겠습니다. 다른 쪽이라면 모를까, 금기(金氣)만은 대전사께서 누구보다 훌륭하시니…… 그럼 저는 제자들과 함께 이쪽 인간들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길게 대답한 고르하가 주디스를 바라봤다.
흥미로운 소재를 발견한 마법사처럼 흥미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거기에 쫄지 않았다.
“아이른보다 강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세요.”
“허허. 그건 장담 못 하지만, 정령술만을 놓고 본다면 내가 최고의 스승이오.”
“하지만 우리가 배울 건 정령술이 아니라 오행신공…….”
“허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주디스와, 그녀를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고르하.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무는 브랫과 조용히 스승의 말에 집중하는 일리아.
그런 그들을 잠시 지켜보던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카라쿰이 말했다.
“네가 어떻게 금기, 화기를 품고 있는지…… 쿠바르로부터 어느 정도 설명을 듣긴 했다.”
“예.”
“태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쇳덩이를 타고났다고 했지.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마음속의 불꽃을 찾는 여행을 다녔다고.”
“그렇습니다.”
“놀랍군…… 오행신공과 같은 기공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마음 공부만으로 그런 경지에 닿을 수 있다니.”
진심이었다.
태생적으로 정령의 기운이 강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오크 중에서도 가끔 그런 돌연변이가 나오곤 하니까.
물론 그마저도 주디스만큼은 아니고, 브랫 로이드 정도의 기운이면 손에 꼽는 재능이라 일컬어진다.
허나 체계적인 가르침과 수련 없이, 오로지 마음 공부만으로…… 그것도 1년 남짓의 시간 만에 부족했던 기운을 이토록 끌어올린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렇게 쌓은 화기로 금기(金氣)를 스스로 다듬어 내다니.’
카라쿰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 해서 상대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안목을 넓혀 줬음에 감사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카라쿰이 다음으로 꺼낸 말은 제자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대의 방식으로 금기를 다스려 보도록.”
“예?”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이 있지 않은가. 화기로 금기를 다스렸으니, 투박하기 그지없던 쇳덩이가 검의 형상을 띤 것일 터. 내 말이 틀렸나?”
“맞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라쿰의 말이 이어졌다.
“보통 오행신공을 수련할 때는 상생의 묘를 따른다. 금속에서 물이 나오고, 물에서 나무가 자라고, 나무에서 불이 잉태하고, 불에서 재가 탄생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흙더미에서 다시금 금속이 뭉치는 것처럼, 하나의 기운이 다른 기운을 북돋워 주는 방식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그대는 반대다. 너무나도 강한 쇠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불꽃을 키워 낸 셈인데, 이는 상생이 아닌 상극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다 보니 접근하기 무척 조심스러워. 기왕이면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 수련해 왔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주고 싶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의 안계도 넓히고 싶군. 이제 이해했나?”
“……대충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해 봐라.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말을 마친 뒤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카라쿰.
자신이 시작하지 않는다면 평생토록 저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뚝뚝한 모습이었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아이른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심상수련에 빠져들었다.
우우우웅……
화르르르륵-!
다사다난했던 덕분에 오랜만에 행해지는 수련이지만, 어색한 것은 없었다.
아이른이 집중을 시작하자 마음속에 커다란 검이 떠올랐고, 불꽃이 나타나 이를 휘감았다.
이윽고 황금빛으로 달궈진 검을, 아이른의 의지가 계속해서 두드렸다.
터엉
텅
터엉
순식간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흐름에 접어든 아이른 파레이라.
하지만 그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전사의 시련에서 목도한 주디스의 불꽃 때문이었다.
그때의 강렬하면서도 거대한, 뜨겁기 그지없는 의지를 떠올린 아이른이 조용히 생각했다.
‘더 강한 불꽃이 필요해.’
오행식에서도 확인했듯, 주디스의 불꽃은 하나로 통합되어 거대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자신의 불은 이리저리 흩어져 바닥에 깔린 모습이었다.
마치 불꽃 하나하나가 제각기 따로 움직이는 듯, 무질서하고 산만한 모습이라고 할까.
‘그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면, 최소한 중심이 되는 불꽃을 찾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강한 화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더욱 예리한 검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더욱 큰 화력이 필요하다.
더욱 큰 화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중심이 될 불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불꽃들은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 중 어떤 것이 중심으로 삼기에 마땅한가?
처음 요술을 배울 때 느꼈던 가족애인가?
알하드 산채에서 깨달은 향상심인가?
이그넷과의 만남 이후 피어난 투쟁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일리아의 폭주를 막기 위해 품었던 우정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이른의 머리를 휘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대전사 카라쿰은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오크 전사 하나가 그들이 있는 곳에 찾아왔다.
“구르가르 님의 전언입니다. 지금…… 전생을 확인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찾아온, 반가우면서도 긴장되는 소식.
장내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