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오행신공 (1)
조용한 방안.
아무것도 없는, 빛마저 없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마스터 할리파가 눈을 감고 있었다.
양 발바닥과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 채 앉아 있는 모습. 가부좌였다.
많은 인간들이 이러한 자세를 신성왕국 사제들의 수련 방식이라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오크가 먼저였다.
정령사들은 대기에 흩어져 있는 다섯 기운을 몸에 담기 위해 통로 역할을 하는 사지를 위로 노출시킨 채 명상에 잠기곤 했다.
물론 지금의 할리파에게는 그런 목적 따위 없었다.
그가 가부좌를 취한 것은 그저 익숙한 자세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
그의 머릿속에 붉은 머리의 인간, 주디스가 보여 줬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사의 싸움이었지.’
요즘 세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싸움.
오래전, 아니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150년 전의 대 전쟁 이후 악마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세상엔 여전히 많은 마인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로부터 부족을 지키기 위해 오크들은 끊임없이 목숨을 걸어야 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자연스레 전사가 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고위 전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따로 볼 필요가 없이, 매 순간순간이 시련이었던 것이다.
허나 악마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뿌린 씨앗들마저 사라지고.
대륙에 남아 있는 위험이 평원을 떠돌아다니는 도적 떼와 몇몇 몬스터밖에 남지 않게 된 요즘.
오크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진짜 전사’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변명일 뿐이지.’
보고 배울 존재가 없다고?
그렇지 않다. 대륙은 평화로웠으나, 여전히 넓었다.
광활한 대지 곳곳을 쏘다니며 수행을 나서는 검사들이, 전사들이 세상엔 여전히 많았다.
젊은 시절의 이안이 그러했고, 불과 몇 년 전의 이그넷이 그러했다.
주디스를 비롯한 네 인간들 역시, 세상 속에서 수많은 경험을 겪으며 빠르게 성장했을 터였다.
이를 알면서도 고인 물처럼 부족 내에서만 지냈던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선조의 후광에만 취해 있던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아들 녀석들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어.’
번쩍 하고 눈을 뜬 할리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람, 파한, 군트. 거기에 더해 자신까지.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부족의 일 따위 잠시 집어치우고, 전사의 본분을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수련에 들어가야 마땅했다.
허나 그것이 오늘은 아니었다.
다시금 붉은 머리의 인간을 떠올린 그가, 성채의 뒤편에 있는 영산(靈山)으로 향했다.
구르가르가 묻혀 있는 동산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가파른.
허나 모이는 정령의 기운 역시 비교도 안 되게 짙은 장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은 길었으나, 움직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그에게 있어서 산이 험하고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할리파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오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어, 왔는가.”
“오랜만이구만.”
“아들놈들이 망신당하는 모습은 잘 봤네. 속 좀 쓰리겠어?”
“…….”
두르칼리의 원로 전사들.
자신보다도 나이가 지긋한 늙은 오크들을 보며,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하긴, 궁금할 수밖에 없겠지.’
* * *
전사의 시련이 있고서 일주일 후.
아이른 일행은 비로소 오행신공을 배우기 위해 두르칼리 부족의 영산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는 더 시간을 두고 배울 계획이었지만, 주디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며 떼를 썼기 때문에 일정이 앞당겨졌다.
덕분에 주디스의 몸은 여전히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후, 힘들구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스는 부축 없이 험한 산세를 헤치고 올라왔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런 독기야말로 그녀의 근간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머지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고생했어.”
“수고했다.”
“고생은 무슨. 그것보다…….”
주디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오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카라쿰과 타라칸, 쿠바르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지지했던 이들이었으니까.
허나 마스터 할리파는 도대체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심지어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오크들.
종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지긋함이 느껴지는 이들이 열 명도 넘게 모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말이다.
“당황하지 말게. 주디스, 자네의 싸움이 인상적이어서 그런 것이니.”
“내 싸움?”
“그렇지. 오랜만에 보는 불같은 싸움에 자극받은 나머지, ‘오행식(五行式)’이 행해지는 것을 꼭 보고 싶다고 하더군. 보면 알겠지만, 부족의 원로들일세. 그들 역시 오행신공의 주인이라 할 수 있으니 참관을 거절할 명분은 없었네.”
“…….”
“왜, 부담스러운가?”
곁으로 다가온 쿠바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디스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크들의 눈빛을 살펴보았다.
“…….”
늙고 쇠약해진, 몇몇은 병이 들었는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들.
하지만 느껴졌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세월과 연륜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를 말이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오크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대전사 카라쿰.
그런 그의 아들이자,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타라칸.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대 정령사 고르하와, 심지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마스터 할리파까지.
그야말로 부족을 지탱하는 거목들 전부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주디스는 자신의 가슴속에 거센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고 있다.’
그렇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
인간 세상으로 따지면 5대 검술명가의 기사들이라 할 만한 존재들이.
브랫 로이드도, 일리아 린제이도, 아이른 파레이라도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실이 주디스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 주었다.
군트, 가람과의 싸움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불꽃이었다.
후우, 뜨거운 숨결을 내뱉은 그녀가 뚜벅뚜벅, 고르하의 앞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당찬 표정으로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쑤욱
두르칼리 부족의 오행식.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정령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절차로, 정령사들이 빚어 담아 놓은 무형의 기운을 끄집어내 던지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다.
심지어 지난 일주일간 설명도 수없이 들었다. 당황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수많은 거인들의 기대에 짓눌려 버릴 수도 있었지만, 주디스는 그러지 않았다.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더욱 뜨거운 가슴으로, 항아리 안의 기운을 강하게 움켜쥔 그녀가 지면을 향해 이를 냅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푸화아아아아악-!
“……!
“오오……!”
“으음…….”
거세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본 원로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누군가는 그조차도 하지 못해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주디스가 피워낸 불꽃의 높이가 웬만한 2층 건물에 닿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로, 옆으로 더 퍼져 나가려 했다.
이를 본 고르하가 손을 튕기자 물의 결계가 형성되어 불길을 잡았다.
그의 표정 역시 원로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디스가 오크들 중 가장 만만한 쿠바르에게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이걸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일단 크기만 보면…… 절대로, 절대로 부족하지 않네. 오히려 너무 커서 문제지.”
“오행신공에 부적합한 재능은 아니라 이거죠?”
“당연히. 재능이 없으면 기운 자체가 발현되질 않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불꽃이 클 줄이야. 이걸 제대로 다루려면 어떤 식의 수련을 해야 할지, 나로서는 감이 잘 안 오는데…….”
“흐응, 그래요?”
주디스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물론 그녀는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귀여워.’
오직 브랫 로이드만이 남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물론 구태여 이를 티 내지는 않았기에,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여전히 붉은 머리의 인간, 주디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dlrj gotjrgoqhkdi qufrj djqtsmsep gkdtkd gktlejfkrhdy?”
“rmfoeh akrtkd dkaneh dksgownaus tjdnsgkrlsgkqslek.”
“dlqjsdpeh wkf qnxkremflqslek……!”
“…….”
마스터 할리파 역시 그들과 비슷했다.
원로들처럼 주책없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주디스가 품은 불꽃에 상당히 놀란 터였다.
쿠바르의 의견과 비슷했다.
그 역시 저만한 불길을 어떤 식으로 다스려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행신공을 익힌 전사에게만 맡기는 수준이 아니라, 실력 괜찮은 정령사의 보조도 함께여야 할 것 같은…….’
“음?”
할리파가 자기 나름대로 주디스의 지도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고르하의 눈빛이 이상했다.
다른 오크들과 다르게, 그의 눈빛은 주디스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쿰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이 생긴 그가 빠르게 다른 이들을 살폈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수는 아니었지만, 고르하, 카라쿰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오크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을 떠올린 그가 한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령사.’
정령을 무술의 보조 용도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다섯 기운 자체를 자신의 근간으로 삼는 존재들.
전사인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사소한 부분마저도 잡아낼 수 있는 그들의 시선을 보며, 할리파 역시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20대 초반의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괴물.
하지만 정령에 대한 재능까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렇기에 지금의 자리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간.
“아이른 파레이라.”
“예.”
“다음 차례는 자네일세.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그런 그에게, 정령사 고르하가 말을 건넸다.
할리파는 알 수 있었다.
애써 감추고는 있지만, 그의 목소리에 적지 않은 감정이 묻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주디스를 바라보던 눈빛과도 흡사하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디스보다 다소 느리게.
하지만 보다 묵직하게, 걸음을 옮긴 금발의 검사가 항아리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
“…….”
주디스처럼 빠르지는 않았다.
무언가 난항에 부딪힌 듯, 그의 동작이 탁 하고 멈췄다.
뿐만 아니라 눈까지 감아 버린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다행히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마음속의 근심이 해결되었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비로소 눈을 떴다.
찰나였지만, 할리파는 그의 눈에 단단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우뚝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언제까지고 인간의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보다 훨씬 직관적이면서도 놀라운 광경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휘익!
화르르르르……
주디스의 것과는 달리, 던져지자마자 잔잔하게 바닥에 깔리는 불꽃.
스으으……!
그리고 그 위로 천천히 솟아나는 거대한 쇠말뚝.
열기를 받은 그것은 이내 검의 형상으로 빚어졌고, 붉게 달아올라 노을과 같은 빛을 사방에 뿜어내었다.
아니, 노을빛이 아니었다.
황금색 광휘를 사방에 흩뿌리는 대검을 바라보며, 할리파를 비롯한 오크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