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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68화 (168/388)

◈ 55. 주디스의 방식 (3)

불의 정령은 다른 기운들에 비해 강렬하다.

뜨겁게 발산하는 기운을 제대로만 다뤄낸다면 그 어떤 것보다 위력적이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을 잘 다뤘을 때의 일이다.

화기는 남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상하게 하기도 쉬운, 굉장히 컨트롤하기 까다로운 정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스는 불의 기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뜨겁고 강렬한 기운이 걸음마다, 주먹마다 뿜어져 나오는 것이 카라쿰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문제는, 저 인간이 화기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다루는 게 아니야. 그냥 버텨 내고 있어.’

어마어마한 화력.

도대체 어떠한 감정으로, 무엇에 기인하여 피어올랐는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 기운은 가람에게 쏟아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불사르고 있었다.

허나 쓰러지지 않는다.

재가 되어 스러지지 않는다.

평범한 이였다면 몇 번이고 잘못되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식하게 버텨 내며 견디고 있다.

마치 지금껏 계속 그래 왔다는 것처럼.

황당함을 느낀 카라쿰이 고개를 저었다.

강철의 오러를 보였던 아이른 파레이라 때와는 또다른 충격이었다.

“으음.”

대 정령사 고르하도 그것을 느꼈는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그가 놀란 눈을 하고 있을 정도니, 저 인간의 불꽃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카라쿰이 다시금 무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타는 듯한 머릿결을 가진 인간이 재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가람의 발차기가 들어맞지 않았다.

쩌억!

쩌적-!

허나 근거리라고 해서 가람의 타격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원거리에서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도 충분히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그였다.

돌덩이 같은 엘보우가 주디스의 관자놀이를 찍고, 또 찍었다.

물론 주디스의 공격 역시 쏟아졌다. 주먹 가득 집중된 불꽃의 오러가 가람의 복부에 타는 듯한 통증을 심어 주었다.

퍽!

퍽!

퍼억-!

“크윽…….”

가람의 잇새에서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피해 없이 결착을 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이런 타격 교환 역시 자신이 훨씬 유리했다.

오러도, 근력도, 체격도 자신이 월등했다.

고통을 참아내어 얼굴을 밑으로 떨어트리지만 않는다면 상대가 때릴 수 있는 부위는 자신의 몸통이 전부다.

반면 자신은 상대의 안면을 비롯해 어느 곳이든 공략할 수 있었다.

물론 예정에 없던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짜증 났지만, 그 짜증조차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가람이 주디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상대가 피했지만, 예상한 바였다.

덥썩!

뒤통수를 끌어안은 그가 연이어 니킥을 퍼부었다.

쩍!

쩌적!

쩌엉-!

정으로 돌을 깨부술 듯 강인하고 둔탁한 공격이 연이어 터졌다.

듣기 좋은 타격음과 함께 가람의 다리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실수였다.

상대의 리듬을 파악한 주디스가 강하게 지면에 착지하는 상대의 발등을 강하게 찍었다.

콰직!

“크아악……!”

마침내 클린치가 풀리고, 가람의 몸에 파묻혀 있던 주디스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엉망이었다. 이곳저곳 부어오른 피부 곳곳에 찢어진 흔적이 가득했다.

피로 인해 시뻘게진 안면이 지옥의 악마를 연상시켰다.

누적된 데미지를 따져 보자면 지금의 공방은 그녀가 훨씬 손해 보는 장사였다.

하지만 주디스는 멈추지 않았다.

분노를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녀를 불태웠고, 동시에 지탱해 줬다.

화마(火魔)가 된 인간이 오크 전사의 품을 향해 파고들어 갔다.

‘이런 미친!’

가람은 그녀의 돌진에 마주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았다.

발 한쪽이 망가진 이상 긴 리치를 이용한 거리 싸움은 불가능했지만, 근거리에서 맞불을 놔도 자신이 불리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을.

지금처럼 피해를 감수하며 상대를 쥐어패다 보면 결국엔 자신이 승리할 거란 사실을.

허나 육체가 따라 주지 않았다. 몸이 주디스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쫓아오는 불꽃에 겁을 먹은 듯, 가람의 표정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상한 발등을 질질 끌며 뒤로 후퇴했다.

주디스는 그런 가람을 집요하게 쫓아갔다.

그리고 상대의 안쪽 허벅지에 강하게 무릎을 꽂았다.

푸우욱!

“……!”

마치 단검에 살이 파고든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가람의 기동력이 더욱 떨어짐을 의미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허나 그의 중심은 여전히 뒤에 있었다. 주먹과 팔꿈치를 연신 휘두르고 있었지만, 무게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정교함도, 힘도 없는 공격을 피해낸 주디스가 재차 파고들어 니킥을 날렸다. 같은 부위였다.

푸욱!

“크아아악!”

싸움이 벌어진 후 가장 커다란 목소리가 가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관중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지금 경기장에 모인 오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람이 아닌 주디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인간! 인간!”

“주디스! 주디스!”

“쫓아가! 죽여 버려!”

“주디스! 주디스!”

인간보다 몇 배는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오크들이었고, 인간보다 수십 배는 부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두르칼리의 전사들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시련에서 누가 더 전사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누가 더 뜨거운 투지로 싸움에 임하고 있는지.

오크이고 인간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는지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붉은 머리 인간이 부족의 고위 전사보다 더 대단한 전사였다.

“허억, 퉷!”

물론 주디스는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오감은 오직 가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녀석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결코 풀리지 않을 저주였다.

그렇다면 쓰러뜨리면 된다. 무너뜨리고 풀어내면 된다.

실실 웃은 주디스가 핏줄기를 뱉어낸 뒤 걸음을 옮겼다. 가람의 얼굴에 두려움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리 꺼져!’

속으로 외친 그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자세도, 호흡도 엉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정밀함은 떨어졌다.

주먹이 주디스의 귀를 스쳤다.

간발의 차로 안에 파고들어간 그녀가 어느새 떨어져 있는 상대의 고개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퍼억 소리와 함께 상대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발이 공중에 뜰 정도로 강하게 얻어맞은 가람이 대자로 나자빠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두 번째 시련을 끝마친 주디스를 보며, 오크들이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쾅! 쾅! 쾅! 쾅!

이름을 부르며 발을 구르는 전사들의 모습.

지진이라도 난 듯 울려 퍼지는 발소리.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주디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으며 주먹을 치켜 올렸다.

첫 번째 시련을 돌파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오크들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파한! 파한!”

“파한! 파한!”

“파한! 나와라! 파한!”

주디스를 부르던 오크들의 시선이 어느새 다른 쪽을 향했다.

예정되어 있던 세 번째 시련이자, 마스터 할리파의 둘째 아들인 파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가 붉은 머리 인간을 바라보았다.

형인 가람의 발과 주먹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모습.

붓고 찢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몇 군데 금이 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한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만에 하나 있을 패배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 그의 몸이 북풍한설을 마주친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파한! 파한!”

“파한! 파한!”

“파한! 파한!”

오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지금의 열기를 가라앉히지 않을, 지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멋있는 싸움을 원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허나 그런 단순한 기대감이 파한의 어깨를 무엇보다 강하게 내리눌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서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꿀꺽, 마른침을 삼킨 파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터업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살짝 인상 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파한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어깨를 잡은 이는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그리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

“…….”

그의 모습을 확인한 오크들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발 구름을 멈추었다.

파한을 연호하는 함성도 잦아들었다.

마스터(Master) 할리파.

대 두르칼리 부족에서 두 번째로 강한 위대한 전사가, 피 칠갑이 된 붉은 머리 인간을 향해 걸어 나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덮어오는 것을 본 주디스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팔…….”

“안 되겠어. 이건 너무…….”

“그만.”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대검을 소환할 듯 인상을 쓴 그가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했다.

허나 브랫이 이를 제지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팔을 느끼며 아이른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을 때, 그가 말했다.

“네가 일리아와 싸운다고 했을 때, 우리도 비슷한 마음이었어. 하지만 막지 않았다.”

“…….”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지금 주디스를 막지 마라. 나설 거면 시련이 끝난 다음에 나서.”

침착한 얼굴로 할 말을 쏟아낸 뒤, 자리에 앉는 브랫.

아이른은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얌전히 의자에 따라 앉았다.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브랫의 입가에는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리아가 심각한 눈으로 브랫과 주디스를 왔다갔다 쳐다봤다.

루루는 당장이라도 변신할 태세로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스터 할리파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디스의 몸이 떨렸다.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처럼, 오랜 세월 몸집을 키워온 거목처럼 무거운 기분.

가람은 물론이고 군트보다도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속에 휘몰아치던 화염이 잠시 기세를 죽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새롭게 피어오른 질시와 열등감, 그로 인해 피어오른 분노와 투쟁심이 주디스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사하였다.

다시금 활활 타오르게 된 그녀가 자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덤벼.”

초라한 모습이었다.

처음 무대에 올라왔을 때와는 달리 여기저기 붓고, 터지고, 핏줄기가 흐르는 그녀의 외관은 분명 할리파의 상대라고 하기에 부족해 보였다.

허나 카라쿰은 알 수 있었다.

타라칸도 알 수 있었다.

정령사 고르하도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 인간의 몸에는 여전히 화염이 흐르고 있고, 죽기 전에는 그것이 꺼질 일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두르칼리에서 두 번째로 강한 전사인 마스터 할리파 또한,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졌다.”

“뭐?”

“우리가 졌다. 그대는 세 개의 시련을 모두 통과했다.”

“…….”

그 말을 끝으로 경기장을 떠나는 마스터 할리파.

그의 뒤를 당황한 표정의 파한이 따랐고, 경기장에는 다시 한 번 오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주디스!”

그 어떤 곳보다 배타적인 장소에서, 그 누구보다 종족과 부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오크들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군트와의 시비가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네.”

피식 웃은 주디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브랫 로이드는 그 즉시 나는 듯한 움직임으로 무대에 난입해 그녀를 부축했다.

“…….”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런 주디스의 모습을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로부터 옮겨 붙은 불이, 그의 눈빛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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