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주디스의 방식 (2)
첫 번째 시련이 끝났다.
두르칼리의 자랑스러운 전사인 군트는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로 순식간에 패배했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등장 시의 패기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퇴장.
의외의 결과를 맞이한 오크들이 굳은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다봤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좋아, 주디스! 잘했어! 다음 녀석들도 박살을 내버려!”
“브랫, 목소리가 큰데…….”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응원하는 브랫 로이드.
그런 그를 보며 아이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 역시 브랫의 다른 면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리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미운털이 박힌 상태니까.’
애초에 자신들을 쳐다보는 이들도 아무도 없었다.
주먹을 쥔 채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주디스의 모습이 훨씬 자극적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밉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오크들의 눈빛이 몹시 따가웠다.
허나 그러한 분위기는 두 번째 대전자가 나오는 순간 급변하였다.
“가람이 나왔어!”
“뭐야, 파한이 먼저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냥 이번에 끝을 내겠다는 생각인가 본데?”
“조용! 바로 시작하려나 봐.”
술렁이는 관중들.
브랫은 느꼈다. 그들이 적지 않은 기대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트보다도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신장을 가진 오크 전사를 바라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만만치 않네.”
“응.”
아이른이 동의했다.
상대가 마스터 할리파의 맏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요술을 각성한 그의 눈에 상대의 오러가 보였다. 주디스보다 많았다.
물론 오러의 총량만이 전사의 강함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아니겠지만…….
‘아까처럼 쉬운 싸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이를 느꼈음인가.
주디스 역시 얄밉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봤다.
자세를 취하는 그녀의 눈에 신중함이 자리했다.
가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내 군트와 달리 차분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그 모습을 본 주디스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tlwkr!”
잠시 후, 오크 심판의 외침과 함께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 즉시 가람이 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트와 달리 자세는 꽤 높은 편이었기에, 어마어마하게 긴 리치가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주디스는 좌측으로 조금씩 돌며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슥
스윽
허나 효과적인 대처는 아니었다.
도망치는 상대를 수도 없이 만나 본 모양인지, 가람은 몇 번의 걸음걸이만으로 순식간에 주디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 압박을 시작했다. 무채색의 석벽이 밀려오듯 묵직하고 두려운 전진이었다.
그때, 주디스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파앗!
도깨비불이 터지듯 화려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움직임!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주디스의 움직임을 대부분의 오크들이 놓쳤다.
지켜보던 브랫 역시 감탄사를 터뜨릴 정도로 현란한 움직임이었다.
허나 가람의 대처는 단순했다.
그가 길고 두꺼운 다리를 뻗었다.
퍼억!
“으윽!”
치지직-!
발바닥으로 상대의 몸통을 밀듯이 쳐 내는 프런트 킥.
보통은 견제 용도로 많이 쓰이는 기술인데, 신장 차이가 나다 보니 흡사 지면을 내려찍는 느낌이 들었다.
중력까지 더해진 재빠른 공격에 주디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두 팔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상당했다.
성큼성큼
그 사이에도 가람은 계속 전진을 시도했다.
다시금 느껴지는 중압감에 주디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고, 불리한 위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재차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퍼억!
퍽!
퍼억-!
“크으윽…….”
그럴 때마다 쏟아지는 상대의 프런트 킥에, 그녀는 전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원거리에서 폭발하는 가람의 무차별 공격!
오크들의 입에서 커다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밟아 버려!”
“박살 내버려!”
두꺼운 성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중저음의 함성이 싸움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당사자가 아닌 관객들마저 피가 끓어올랐다.
허나 가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서늘한 눈이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상대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
무대에 오르며 가람이 품었던 생각이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방심한 결과 군트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봤다.
저 인간은 분명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다.’
퍼억!
얕게 숨을 내뱉은 가람이 또다시 킥을 날렸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상대를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분명 강하다. 체내에 쌓인 오러의 총량도 대단하고, 몸을 움직이는 방법 역시 제대로 알고 있다.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맨몸싸움에 능하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격차는 충분해.’
실력의 격차도 충분하고, 신체 조건의 격차는 월등하다.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도록 냉정하게 흐름을 이끌어간다.
퍽!
이렇게.
퍼억!
이렇게.
퍼어억!
이렇게!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 없다.
지금의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작업만으로도 상대는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몸보다 마음이 먼저 꺾여 나갈 것이다.
피날레는 그때 장식해도 충분하다.
생각을 마친 가람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예상보다 더 일찍 끝나겠어.’
승리까지 다소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무대가 좁다면 모를까, 꽤 넓은 편이었기에 대놓고 도망치는 식으로 나오면 귀찮아질 거라 생각하던 차였다.
허나 기우였다. 자신의 발차기에 한번 맞은 뒤, 저 인간은 미련할 정도로 정직하게 정면 돌파만을 시도했다.
아니, 돌파조차 아니었다. 어떻게든 간격을 좁혀 자신에게 유효타를 먹일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멍청하긴.’
가람의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걸렸다.
냉정을 잃은 전사는 전사가 아닌 멧돼지일 뿐.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사냥하는 것이다.
그가 다시금 쏘아져 오는 상대의 명치에 프런트 킥을 먹였다.
투웅!
“흐읍!”
“헛!”
그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발차기를 맞은 주디스가 이를 버텨 낸 것이다.
마치 묵직한 바위처럼 지지직, 한 걸음 정도만 뒤로 밀려난 그녀가 가람의 다리를 옆으로 치웠다.
곧바로 다시 짓쳐들어오는 인간을 보며,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싸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주디스의 주먹이 가람에게 닿았다.
* * *
‘시팔.’
주디스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상황이 불리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군트와 싸웠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그녀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해 있었다.
‘전사는 개뿔, 하는 짓 하나하나 양아치 같은 새끼들이.’
물론 주디스와 트러블이 있었던 건 연무장을 지나다니던 녀석들, 그리고 그들의 상관인 군트뿐이긴 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가람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어떤 놈인지 잘 모른다.
허나, 제대로 된 이유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유 따져가며 화를 냈다고.
퍼억!
“크윽…….”
그저 이 개 같은 발차기 하나만으로도, 주디스는 사흘 밤낮이 흐를 동안 상대를 흉볼 수 있는 성격이었다.
물론 자신도 전사는 아니긴 했다.
전사가 어떤 존재인가.
잘은 모른다.
하지만 긍정적이고 멋지고 대단한 무언가로 빚어진 무언가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다.
신의라든지, 신념이라든지, 긍지라든지…….
자신은 그런 것과는 어마어마하게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장 누구보다 친한 존재인 브랫, 아이른을 보면서도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를 느끼고, 분노를 느끼다가 그런 자신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고…….
그야말로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게 바로 주디스 자신이었다.
퍼억!
퍽!
퍼어억!
‘시발, 더럽게 아프네.’
욱신거리는 고통 속에서 그녀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브랫의 기품 있으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을, 아이른의 선함에서 나오는 강인함을, 일리아가 태생부터 타고났던 재능을, 그 밖에 자신이 가지고 싶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멋지고 부러운 무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허나 끝끝내 닿은 결론은, 자신이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퍼억!
욕심 많고, 찌질하고, 못돼 처먹은 사람.
남이 자기보다 하나라도 더 갖고 있으면 분해 죽겠고, 억울해서 못 견디겠고, 자괴감과 열등감이 넘치다 못해 온몸이 타들어 가듯 고통스러운 사람.
그럼에도 질시하고 질투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그게 바로 주디스였다.
아무리 지랄하고 애써도 바뀌지 않는 주디스의 민낯이었고, 근본이었다.
그 사실을, 그녀는 비로소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투웅!
지지직-!
“흐읍!”
주디스가 두 팔을 들어올려 가람의 킥을 막아 냈다.
그와 함께 활화산 속 용암처럼 뜨거운 오러가 들끓어 올랐다.
코어에 집중된 힘이 충격을 감당해 낸 즉시 그녀의 2차 돌진이 이어졌다. 가람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리고 들어오는 손바닥.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이 눈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주디스는 그마저도 쳐 냈다.
무사히 상대의 품으로 들어간 그녀가 강하게 오른주먹을 휘둘렀다.
뻐어억!
쩌어엉-!
“크윽!
“크흐……!”
동시에 가람의 니 킥이 주디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다급히 왼손을 껴 넣어 충격을 반감시키긴 했으나 그녀의 피해가 더욱 컸다.
주먹과 무릎이었고, 복부와 얼굴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허나 주디스는 겁먹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날아오는 발차기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았다.
투웅!
퍼억-!
쩌적!
또다시 프런트 킥을 튕겨내고, 파고든다. 그리고 안면 타격과 복부 타격을 교환한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손해를 본 주디스가 저 멀리 밀려났다.
아팠다. 무지하게 아팠다. 얼얼한 턱을 매만진 그녀가 퉤 하며 핏덩이를 내뱉었다.
부러웠다. 상대의 압도적인 체격이 질투 나서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였다.
욕망과 질시로 이루어진 불꽃이 주디스의 전신을 괴롭게 불살라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충분한 상황.
허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평생을 그러한 고통 속에 살아온 주디스는, 불꽃을 버텨 내는 방법 역시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열등감을 자양분으로.
질투와 욕망, 자괴감을 원동력으로.
불길에 휩싸인 그녀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가람을 향해 뛰어들었다.
“…….”
전사이자 정령사인 카라쿰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빠드득, 자신도 모르는 새 의자의 손잡이를 바스러뜨린 그가 생각했다.
‘아직 배우지도 않은 오행신공을 사용하다니.’
카라쿰이 평원에서의 싸움을 떠올렸다.
아이른 파레이라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