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63화 (163/388)

◈ 53. 신경전 (2)

“……하!”

붉은 머리 인간의 말을 들은 오크 전사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스터 할리파의 셋째 아들인 군트 휘하에 있는 자들로, 쿠바르가 두르칼리에 돌아온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17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이유가 ‘가족에 대한 정’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오크 전사들은 쿠바르가 무언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부족으로 돌아왔으리라 생각했고, 눈앞에 있는 인간 녀석 역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같은 오크가 아닌 다른 종족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는 없었다.

어찌됐건 대전사 카라쿰과 부족장 타라칸의 허락하에 성에 머무는 인간들이다.

공식적으로는 부족의 손님인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기네 언어로 흉을 보거나 기분 나쁘게 웃어 보이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저 쪽에서 먼저 저렇게 나와 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오크 전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 중 하나인 대머리가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주디스에게 물었다.

“지금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후회할 게 뭐 있어? 이렇게 서로 스트레스만 쌓아 두고 있을 바에야, 그냥 시원하게 한번 치고받고 싸우고, 깔끔하게 끝내고. 어? 그냥 그러자는 건데.”

“하하, 보기보다 당돌하군.”

“그쪽은 덩치에 안 맞게 졸렬하네. 전사의 핏줄 운운하던 주제에 판 깔아 줄 때까지 남 뒷담이나 하고 말이야.”

“뭐? 이…….”

“됐고.”

콱!

대머리 오크 전사의 말을 끊은 주디스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들어오라는 듯 까딱거렸다.

“주둥이는 그만 털고, 들어와. 검 말고 주먹으로 하자?”

“주먹?”

“그래. 검보단 맨손으로 패야 속이 시원할 거 같으니까.”

“하…….”

“왜, 자신 없나? 배경이고 혈통이고 쥐뿔도 없는 평민한테 겁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녀석이었어?”

대머리 오크 전사는 주디스의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를 동료에게 맡긴 뒤,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절제된 분노가 담긴 눈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새어 나왔다.

이를 마주한 주디스는 빙긋 웃었고, 대머리는 그녀를 향해 묵직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퍼엉-!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위력적인 주먹.

평범한 인간이라면 맞는 즉시 머리통이 터질 만큼 강맹한 공격이었다.

이미 대머리 오크의 머릿속에 뒷일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눈앞의 쥐방울만 한 녀석을 짓밟는 게 중요했다.

허나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먹이 얼굴에 다가오기 직전, 빠르게 자세를 낮춘 주디스가 오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뭐지?’

순간적으로 상대를 놓친 대머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주디스가 바짝 몸을 숙이며 달라붙으니, 그의 시야에서는 마치 증발한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기척을 느낀 오크가 시선을 밑으로 돌렸지만, 늦었다.

붉은 머리 인간의 통렬한 일격이 그의 왼쪽 복부에 꽂혀 들어갔다.

뻐어억!

“크허, 어…….”

털썩

바디 블로 한 방에 정신을 놓아 버린 대머리 오크가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신의 몸을 덮어오는 상대를 향해 주디스가 어깨를 튕겼다.

그 가벼운 동작만으로 오크 전사는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갔다.

쿠웅-!

싸움이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 고작해야 1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주디스가 다른 오크들을 보며 물었다.

“더 나올 사람 없어?”

“…….”

“아까보단 낫긴 한데, 아직 스트레스가 다 풀린 건 아니라서 말이야. 조금 더 개운해졌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그녀의 실력을 확인한 오크 전사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듣기는 했다. 쿠바르와 함께 온 인간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은발의 인간은 그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린제이 가의 후손이고, 나머지도 무시할 수 없는 혈통을 타고났거나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만 가끔씩 지나가며 본 붉은 머리 인간의 실력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얕봤다.

고대 영웅들의 피를 잇지 못한 오크들이 그렇듯, 평민 출신인 저 녀석 역시 한계가 분명하다고, 4인방 중 가장 실력이 형편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게, 지금 드러났다.

“뭐야, 더 없어?”

붉은 머리 인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

허나 몸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이제야 상대의 수준을 파악한 오크들은 땀만 주룩주룩 흘릴 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바닥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하지만, 주디스의 다음 말에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실망이네. 오크 전사들이 이렇게 다 졸렬하고 겁 많은 줄 알았다면, 굳이 두르칼리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그만.”

상대의 모욕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전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새 그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이의 명령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한 뼘은 더 큰 신장에, 두꺼운 흉통.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오크가 주디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붉은 도끼날 전투대의 부장을 맡고 있는 군트라고 한다.”

군트.

그녀도 아는 이름이었다.

쿠바르가 조심하라고 알려 준 이름 중 하나로, 정실부인 측의 최고 권력자인 할리파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인간사회로 따지자면 귀족 중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신분.

허나 주디스는 그 배경에 짓눌리지 않았다.

“그래, 군트. 나는 알다시피 주디스야.”

“…….”

그녀의 평대에 군트의 눈썹 부근이 살짝 움직였다.

오러와 함께 위협적인 투기(鬪氣)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의 눈빛이 새겨질 듯 주디스의 얼굴에 쏘아졌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허나 군트는 그 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두 가지 할 말이 있다.”

“오, 궁금한데. 더 많아도 다 들어줄 테니까 편하게 말해.”

“첫 번째.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나, 그대가 지금 벌인 시비는 틀림없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쿠바르 님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겠지.”

“아닌데. 쟤들한테 물어봐. 우리 그런 정치적인 거 다 떼놓고, 아무 뒤끝 없이 겨루기만 하기로 했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행동하지 마라. 상식적인 존재라면 조금 전의 행동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치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그렇지 않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뭔데?”

“두 번째. 그대는 오크족 전체를 모욕했다. 이는 두르칼리의 명예로운 전사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 이 경솔한 발언에 대해서도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도망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트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오크들조차 움찔할 정도로 흉악하고 두려운 기운.

과거 수많은 마인과 악마들을 토벌했던 영웅의 핏줄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고위 전사의 투기였다.

“흠.”

허나 주디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부하들은 물론이고 군트까지 놀란 눈빛을 보냈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민을 마쳤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주디스.

그녀가 이윽고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개소리 집어치워.”

“……지금 뭐라 그랬나?”

“개소리라 그랬다. 왜, 아닌 것 같아?”

“도대체, 그대는 무슨 배짱으로 계속해서 도발을…….”

“아, 꺼져.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나도 네 개소리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줬으니까, 반론은 그다음에. 알겠어?”

정말로 듣기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흔드는 주디스.

그 모습에 살심이 치솟는 군트였지만, 이미 주도권이 넘어갔다.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빠르게 할 말을 쏟아냈다.

“첫 번째. 눈 가리고 아웅이니 뭐니 지랄할 거면 네 부하들부터 똑바로 관리해라. 뻔히 뒤에서 개소리 씨불이고 다니는 거 아는데도 일주일이나 참아 줬다. 상식이 있는 오크라면 쿠바르의 이름을 대고 협박을 할 게 아니라, 먼저 정중히 찾아와서 사과했어야지.”

“…….”

“두 번째. 내가 오크족 전체를 모욕했다고? 맞아. 그런데 할 만해서 했다. 린제이 가와 로이드 가 같은 배경에는 시비 걸 용기도 없어서 깨갱 하는 주제에, 내 앞에서는 신나서 헛소리 찍찍 지껄이는 새끼들이 전사의 긍지니, 전사의 명예니 하고 깝죽거리고 다니는데. 게다가 그런 주제에 한 대 쥐어박았다고 쫄아서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게 졸렬한 게 아니고 뭔데?”

“……그들이 다소 부족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인정하나, 그것만으로 오크족 전체를 모욕한 건…….”

“병신들 상관이라 그런가? 똑같이 병신 같은 소리를 하네. 너랑 쟤들, 고대 영웅들의 후손 아니야? 데몬 슬레이어의 후손들?”

“…….”

“그렇게 대단한 전사들의 피를 타고난 양반들이, 자신들의 언동 하나하나가 오크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병신 같은 생각 아닌가?”

‘뭐야, 저 녀석?’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주디스의 말을 들으며, 브랫 로이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저 녀석은 저렇게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자신하고만 해도 말다툼을 벌이다 할 말이 궁해져 주먹을 드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허나 지금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할 말을 준비했던 걸까.

아니면 눈앞의 오크들이 너무나도 병신 같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둘 다인가?’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주디스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흉중의 말을 쏟아냈다.

“쿠바르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그래, 걱정된다. 네 말대로 엄청 걱정돼. 그것 때문에 일주일이나 참았다. 원래 내 성격이었으면 반나절도 못 가서 너희들 전부 대가리 깨졌어.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어. 쿠바르를 생각해서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병신 같은 새끼들아, 전사의 명예는 잘난 선조들의 핏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린 거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똑바로 행동해라. 지금처럼 뒤로 졸렬한 험담이나 늘어놓다가 상대하기 힘든 거 보이자마자 깨갱 하면서 조상들 얼굴에 똥칠하지 말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당당히 나서서 말을 하든가, 아니면 대놓고 한판 뜨자고 하든가.”

“아 참, 아직도 모를까 봐 말해 줄게. 내가 쿠바르가 왜 불쌍하다고 했냐고? 17년 만에 찾아온 고향에 너희 같은 새끼들만 득실거려서, 그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서 그랬다.”

“알아들었지? 그러면 이제 개짓거리 그만하고 꺼져. 가서 자아 성찰도 좀 하고, 진짜 전사가 뭔지도 좀 생각해 보고, 정신도 좀 차리고. 어? 그러고 있으라고.”

“…….”

그야말로 폭포수 같은 주디스의 언사에, 오크 전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군트가 가관이었다. 그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용암이 쏟아질 것처럼 뜨거운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저 건방진 녀석을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무장의 각지에 퍼져있던 3명의 검사들이 다가오는 순간.

“…….”

군트는 품었던 생각을 저 뒤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웅……!

폭풍처럼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은발의 검사.

강철처럼 묵직한 무게감을 풍기며 접근하는 금발의 검사.

마지막으로, 그 누구보다 서늘한 분노를 품고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푸른 머리의 검사.

그의 눈빛을 본 군트는 순간적으로 뒤로 걸음을 물려 버렸고, 그러한 실태에 뒤늦게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오크 전령 하나가 연무장을 향해 뛰어왔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를 완전히 깨 버릴 만큼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왔다.

“쿠바르의 스승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아니, 다시 살아난 건 아닌데…… 거, 거의 비슷합니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하기가 좀…… 어렵…….”

정신없는 얼굴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말을 전하는 전령.

잔뜩 인상을 쓰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군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내해라.”

“예, 예! 저기, 인간 나리들도…….”

“…….”

4인방이 시선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품은 인간 검사와 오크 전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전령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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