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신경전 (1)
“…….”
“…….”
쿠바르의 말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쿠바르의 스승, 구르가르를 만나고 싶었던 그였다.
지금껏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던 꿈속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자신이라 할지라도, 쿠바르가 느끼는 아쉬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타의로 인해 17년이나 바깥을 떠돌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돌아왔는데, 스승님이 돌아가셨다니…….’
만약 자신이 5년간 요술세계에 갇혀 있는 동안, 가족 중 하나가 변고를 당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아이른은 쿠바르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쿠바르는 생각보다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네.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지긋하셨던 양반이니까 말이야.”
“…….”
“그래도 다행인 건, 스승님이 나 같은 돌팔이와는 달리 진짜 용한 점술사였다는 점이지. 내가 이쯤 돌아올 것을 알고 수수께끼가 담긴 편지를 남겨 뒀어.”
“수수께끼요? 어떤 거예요?”
“나도 아직 못 풀어서 모르지만, 아마 답을 알고 나면 스승님께서 안배해 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아마도…….”
아이른 파레이라, 자네와 관련된 무언가겠지.
쿠바르는 이렇게 말했고, 아이른은 슬픈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누구도 말을 이어 가지 않았기에 그러한 기분은 더욱 깊게 그를 내리눌렀다.
그런 불편한 분위기를 느꼈음인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은 쿠바르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하, 그렇게 인상 쓸 필요는 없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난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여기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륙을 떠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자네들에겐 고마운 마음뿐이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애초에 스승님 일이 아니더라도, 매정하게 호위 일만 하고 훌쩍 떠날 생각은 아니었잖아?”
아이른을 비롯한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웃어 보인 쿠바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여튼, 얘기를 전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보겠네. 아직 잠을 못 잤거든. 나중에 다시 오지.”
“푹 쉬어요, 쿠바르.”
“아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성채의 고위 전사들을 대할 때는…… 조금,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을걸세.”
“……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쿠바르를 보며, 브랫 로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고개를 끄덕여 준 쿠바르가 웃으며 방을 나섰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침묵 속에서, 네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고양이가 조용히 생각을 이어 나갔다.
‘……확실히 조심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
쿠바르의 말을 되뇌며, 브랫이 생각했다.
두르칼리 최고의 전사 카라쿰, 그리고 부족의 지도자 타라칸.
둘이 쿠바르와 여전히 사이가 좋다는 것은 커다란 호재다.
이것만으로도 복잡한 일의 절반은 해결되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허나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 바로 타라칸을 지지하던 외가 측 오크들이 문제였다.
‘그들 관점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에 불씨를 갖고 찾아온 불청객과 다를 바 없지.’
게다가 종족도 달랐고, 잠깐이긴 하지만 카라쿰에게 검을 겨누기도 했다.
여러모로 아니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정실부인의 오라버니, ‘마스터 할리파’의 권세는 부족장인 타라칸도 무시 못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타라칸이 쿠바르를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마스터 할리파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거야.’
다른 이들보다 정치와 가까운 브랫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다.
이것까지 고려하면, 쿠바르가 스승의 죽음보다 이 부분을 더 우려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뭐……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되겠지.”
“그렇지. 사실 우리야 방이랑 연무장 정도 말고는 다른 데 갈 곳도 없잖아?”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는데…… 뭐, 그 정도는 우리 쪽에서 피하면 별문제 없겠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
브랫과 아이른이 대화를 나눴고, 일리아와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나, 둘의 말에 동의는 하는 분위기였다.
쿠바르가 스승 구르가르의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얌전히 수련만 하며 지내자.
그렇게 합의를 내린 네 검사는 루루를 재운 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낯선 이들의 시선과 분위기가 거슬린다 한들, 이런 멋진 연무장을 눈앞에 두고 수련을 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수련만 하는데, 거기다 대고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겠지.’
휘익!
정석적인 내려 베기 동작을 수행하며,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별문제 없을 것이다. 혹시나 그들을 자극할까 두려워 선물 받은 적검, 청검조차 꺼내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다루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러한 생각이 전해졌음인가.
그로부터 일주일간, 브랫 로이드를 건드리는 오크 전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예의를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거나 하는 녀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호전적인 오크족의 성향을 감안하면 좋은 흐름이었다.
허나 검을 휘두르는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wjgmlemfdms eksdur dprtmxmfkdlqslek.”
“wkrrkrk tlzutj djWjf tn djqtdl skQmsakfdmf gkrh dlTtmqslek.”
오크들은 자신도, 일리아 린제이도, 아이른 파레이라도 건드리지 않았다.
허나 주디스만은 달랐다.
가끔씩, 일부러 그녀의 옆을 찾아와 오크족의 언어를 중얼거리는 녀석들.
그들을 보며, 브랫 로이드는 어금니가 부러질 듯 강하게 이를 갈았다.
* * *
기본적으로 오크들은 자긍심이 강하다.
다른 종족들보다 우월한 근력, 거대한 체격은 그들의 자랑거리였고, 몬스터와 마물들 앞에서도 항상 당당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400년 전, 150년 전에 있었던 대혼란의 시기에도 수많은 공적을 올린 바 있다.
당시 악마의 목을 쳐 냈던 영웅들의 가문은 인간 사회의 ‘귀족’과도 같은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핏줄 역시 그러한 후광에 힘입어 자만에 가까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영웅의 후손, 혹은 고위 전사의 핏줄이라 한들, 4인방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그 악명 높은 ‘마룡왕’의 목을 벤 디온 린제이를 조상으로 뒀고, 로이드 역시 손색은 있으나 많은 영웅들을 배출했던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가문은 그 명성이 부족했지만, 소드마스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전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유일하게 주디스만이, 오크 전사들이 보기에 만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skdirgks dlsrks wnwpdp Rho gksp.”
“rmfjrp akfdldi. emerlfhsms wjstkdml vltwnfeh dkslfkau? rmfjs rjt clrhsms skQmwl dksgsp.”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는 것은 아니다.
허나 누가 봐도 신경 쓰일 만큼 가까이 지나치며, 들으라는 듯이 오크의 언어를 중얼거린다.
심지어 브랫은 저들이 지껄이는 말 일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쿠바르와 친해지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게 오크족의 욕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사의 핏줄이 아니라고…… 비천한 출신이라고 욕하는 것도 모자라서, 나약한 인간이라고 깔본다고? 저 주디스를?’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련을 하면 한주먹거리도 안 될 녀석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이 우스우면서도 짜증 났다.
더 화나는 것은, 주디스 역시 그들이 자신의 욕을 한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후웅!
후우웅-!
그래도 주디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묵묵한 표정으로, 우직한 태도로 자신의 검을 가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이를 바라보는 브랫은 자꾸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면, 아이른에겐 미안하지만 스승의 수수께끼고 뭐고 빨리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쿠바르를 생각해도 그게 맞았다.
평생 이곳에 남아 있을 게 아니라면, 자신들의 존재는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수 있었다.
부족장의 외가 쪽 전사들의 신경만 곤두서게 할 뿐이라는 게 브랫의 생각이었다.
‘젠장!’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오크 전사들이 주디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인 뒤, 누가 봐도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갔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주디스는 이번에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개가 짖는다는 듯이,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빛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볼 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랫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벅저벅
소매로 땀을 닦아 내며, 주디스가 브랫을 향해 걸어왔다.
두르칼리에 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해를 풀기에는 상황도, 분위기도 좋지 않았기에 둘 사이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브랫은 더욱 큰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도대체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하려고 나한테 다가오는 거지?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주디스가 그의 귓가에 바짝 입을 갖다댔다.
그리고 오크 전사 무리를 쳐다보며 온갖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삼, 멍청이, 똥강아지, 말미잘, 바보…….”
문장 형태가 아닌 단어 형태.
인간이 아닌 오크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한 쉬운 말로, 누가 봐도 그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심지어 오크들 중에는 대륙 공용어를 알고 있는 이도 있었으니, 주디스의 욕설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크 전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주디스, 그리고 브랫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하나가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지금 뭐라 그랬소?”
“병신, 고자, 바보, 멍청이.”
“나 참, 황당하군. 지금 나한테 시비를…….”
“아닌데?”
“뭐요?”
“너한테 한 말 아닌데? 내 옆에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이 녀석한테 한 말인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말이 안 될 건 뭔데?”
주디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이에 열이 치솟은 오크 전사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어쩔 수 없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붉은 머리의 인간 녀석에게 했던 짓도 비슷하다면 비슷했으니까.
피차 따지기 애매하고 유치한 수작질로 서로를 도발했으니, 한쪽만 일방적으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해했군. 가겠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똥 씹은 표정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일 뿐.
불편한 마음으로 그들의 대치를 바라보던 브랫이 뒤늦게 한숨을 쉬었다.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이만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왕 참는 거 더 참는 게 좋았을 거라고 지적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브랫은 전자 쪽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주디스의 평소 성격을 떠올리면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긴 했다.
아마 쿠바르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예 칼을 뽑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뽑은 이상, 무라도 썰어야 하는 것이 주디스의 성격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이, 거기 덩치들.”
“……우리 말한 거 맞나?”
“그래.”
“뭐요.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개소리 집어치우고, 맞짱이나 한번 뜹시다.”
“…….”
“왜, 싫어? 혹시 쫄리나?”
주디스의 충격적인 발언에 브랫 로이드도, 오크 전사들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다.
“뒤끝 같은 거 없이 깔끔하게, 그냥 서로 감정만 푸는 쪽으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