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대족장의 보물 (2)
대륙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소유한 국가가 어디인가 묻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왕국을 먼저 떠올릴까?
대부분은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와 대륙 동부의 룬텔 왕국을 생각할 것이다.
전자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보니 고대의 유물들이 즐비하고, 후자는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다 보니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오크족을 대표하는 두르칼리 부족의 보물창고 역시 대단할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정령의 힘이 담긴 물건은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드니까.’
타라칸의 뒤를 따르며, 브랫 로이드가 생각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대중적이지 않은 능력이지만, 정령은 존재한다.
그들의 말처럼 세상 전부가 다섯 속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더라도, 그 힘의 근원은 실존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마법처럼 체계적으로 발전한 학문이 아니다 보니, 또 사람을 많이 타는 능력이다 보니 정령의 힘이 깃든 물건을 얻는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부족장이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는데, 쓰지도 못할 물건을 줄 리는 없지.’
브랫이 주디스를 힐끔 돌아봤다.
여전히 감정이 상해 있는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었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해는 직접 풀어야 하겠지만, 기왕이면 이 일로 인해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리기를…….’
그렇게 몇 분을 걷고 나니, 어느새 눈앞에 창고의 문이 보였다.
멋따위 느껴지지 않는 투박한 석문.
허나 타라칸이 손바닥 문양에 손을 올려놓자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말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물론 그것을 계속해서 감상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타라칸이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고, 아이른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열려 있던 문은 이내 더 이상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자동으로 닫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물건들, 그 대부분은 병장기였다.
바로 어제 날을 간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전투 도끼.
성인 남성 서넛이 달라붙어도 들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해머.
그 외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함이 느껴지는 무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방어구 역시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아이른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허나 중간쯤에 놓인 한 쌍의 검을 보는 순간, 주디스와 브랫은 지금까지 봤던 모든 보물들을 머리에서 잊을 만큼 강한 자극을 받았다.
“오크들 사이에서 말하는 다섯 정령, 즉 오행(五行)은 원래 두 개의 커다란 개념에서 나왔네. 한쪽은 햇볕처럼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늘처럼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지. 세상 만물은 이 두 가지 성질이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의존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 우리들 사이에 퍼진 설화인데…… 그것이 온전한 진실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기운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네. 따스한 쪽은 플러스(+), 혹은 양(陽)이라 하고 차가운 쪽은 마이너스(-), 혹은 음(陰)이라 부르지.”
“…….”
“그리하여 이 검들의 이름도 음양검이라고 부르고 있네. 뭐…… 더 직관적인 이름으로 청검, 적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사실 입에 잘 붙기로는 이쪽이 더 좋아.”
“만져 봐도…… 될까요?”
주디스가 물었다.
짧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어떠한 검을 봐도 도구 이상의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 자신의 일부였던 조각을 뒤늦게 찾은 느낌.
타라칸은 고개를 끄덕였고, 주디스는 조심스레 붉은 손잡이의 검을 손에 쥐었다.
화아악-!
그 순간, 무언가가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검의 날이 붉게 변하였다.
피처럼 어둡고 거무죽죽한 것이 아닌, 불꽃처럼 밝고 뜨거운 느낌.
자신의 몸이 따스해진 것을 느낀 주디스를 바라보며, 타라칸이 말했다.
“역시 어울릴 줄 알았어. 아버님과 나를 포함해, 지금껏 많은 오크 전사들이 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적검을 쥐어 봤지만…… 지금처럼 좋은 반응은 없었지.”
“…….”
“자네도 들어보겠나?”
타라칸의 시선을 받은 브랫이 뒤늦게 푸른 손잡이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전신에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어느새 푸르게 변한 검의 날을 바라보며 브랫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부족장이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들 거네.”
“이렇게 귀한 것을, 저희가 받아도…….”
“받을게요! 감사합니다아악!”
주디스의 비명에 가까운 대답이 브랫의 말을 덮었다.
브랫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불보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눈빛에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타라칸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뺏어갈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괜찮아. 말하지 않았나. 다른 이들의 손에 들어가 봤자 돼지 목의 진주일 뿐…… 오히려 지금껏 쓰지 못했던 물건으로 생색을 낼 수 있으니, 내가 더 이득이라고 봐야지.”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람을 탄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물건이 분명했다.
“사실 나도 깜짝 놀라긴 했어. 형님이 자네 둘에게 꼭 맞을 거라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어려울 거라 생각하긴 했거든.”
역시 난 정령하고는 영 안 맞아, 짧게 중얼거리는 타라칸을 보며 브랫과 주디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타라칸도 타라칸이지만, 새삼 쿠바르가 자신들을 얼마나 깊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의 일도 잘 풀려야 하는데…….’
‘타라칸하고 우애가 깊으니, 괜찮겠지? 카라쿰도 겉은 냉정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고.’
아버지와 해후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둘은 잠시동안 검을 든 채로 목석처럼 자리에 서있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진 않았다.
아이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루루가 타라칸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나도 저런 거 갖고 싶어!”
방금 전까지만해도 변신의 후유증 탓에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했던 그였다.
허나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가 깜짝 놀랄만큼 대단한 선물을 받자, 루루의 눈망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빨리, 빨리!”
아이처럼 보채는 고양이를 보며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린 타라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자기 몫을 챙겨야겠지. 이쪽 두 사람처럼 딱 맞는 물건을 골라 줄 수는 없지만, 뭐가 됐든 괜찮으니 편하게 둘러보고 고르게.”
“두 개 골라도 돼?”
“그건 안 돼.”
정색하는 타라칸을 보며 루루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이건 너무 무겁고, 이건 너무 날카로워! 무기 말고 다른 건 없나? 아! 이건 좀 예쁘다!”
“……우리도 찾아볼까?”
“그러자.”
“너희들하고 어울릴 만한 게 있으면 알려 주지.”
“나도 한번 볼게.”
한마디씩 내뱉은 4인방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바야흐로 아이른과 일리아를 위한 보물찾기 시간이 찾아왔다.
허나 보물의 주인이 될 아이른은, 사실 그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물욕이 크지 않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거라고 해 봤자 무기뿐인데, 이미 그 무엇보다 훌륭한 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방어구라도 찾아볼까?’
그런 생각을 품고 이것저것 둘러보긴 했지만, 딱히 괜찮은 물건이 없었다.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가죽 방어구 자체가 불카누스가 만들어 준 것이다보니 품질이 좋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곳에 있는 방어구들이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무래도 기본 체격이 큰 오크 전사들의 신체에 맞춰진 장비들이다보니 검과는 다르게 알맞은 물건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아이른은 더욱 기대를 내려놓은 얼굴로 의미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허나 잠시 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목걸이 하나가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
외관은 특별할 게 없었다.
장인의 손을 탄 듯 정교하게 다듬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그란 돌멩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보석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된 구석도, 영롱한 자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시선을 잡아 끌었다.
‘요술사의 감이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요술사를 자처하긴 민망한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허나 그런 자신조차도 이런 생각이 들 정도라면,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군다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모를 루루 역시 목걸이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른은 이걸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뭔가 알겠어?”
“아니. 그냥 감이야. 네게 좋을 것 같다는 감.”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뛰어난 요술사가 저렇게 말하자 흥미가 더욱 강해졌다.
아이른은 설명을 부탁한다는 듯 타라칸 쪽도 쳐다봤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살짝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역사서에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 뛰어난 정령술사이자 점술사였던 양반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고 하더군. 아마 맞을 걸세.”
“음양검처럼 특별한 뭔가가 있나요?”
“딱히…… 예전에는 다섯 정령의 기운이 묻어났다고도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 그다지 추천해 주고 싶진 않지만…….”
슥- 루루 쪽을 쳐다본 타라칸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선 요술사의 감을 무시할 수 없으니, 원한다면 저걸로 하게.”
“헤헤, 으히히.”
타라칸의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한 루루가 헤실거리며 공중을 빙빙 돌더니, 살포시 목걸이를 집어들어 아이른의 목에 걸어주었다.
특별할 게 없는 모양이다보니 딱히 꾸민 느낌은 들지 않았고, 그밖에 특이사항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탐내는 두르칼리의 보물창고에서 골랐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한 물건이었다.
허나 이를 목에 건 순간, 아이른은 무언가 든든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나도 가끔 갖고 놀아도 돼?”
“이거?”
“응.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변신 상태에서 보면 뭔가 알 것 같기도 해서.”
“알았어.”
“흐음, 나도 궁금해지는군. 고양이 양반.”
“내 이름은 루루야!”
“아, 미안하네. 루루, 자네가 이 목걸이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내게도 비밀을 알려 줄 수 있겠나?”
“당연하지. 알게 되면 두 번째로 알려 줄게! 첫 번째는 아이른이야.”
“하하, 알겠네.”
타라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루루는 신이 난 듯 또다시 공중을 빙빙 돌다가 다시금 자신만의 보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로부터 30분 후.
남은 둘마저 물건을 고른 것을 확인한 타라칸이 보물창고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자네들을 만나서 반가웠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 함을 이해해 주게.”
당연한 말이었다.
무려 17년만에 형님이 두르칼리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을 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타라칸의 호의를 가슴 깊이 간직한 아이른 일행은 이내 하인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돌아갔고, 짧게 얘기를 나눈 후에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물론 곧바로 수마가 몰려오지는 않았다.
특히 일리아의 경우가 그랬다.
‘내게 어울리는 검은…… 뭘까.’
아이른 파레이라의 황금빛 대검.
브랫 로이드의 청검과 주디스의 적검.
셋 모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검을 찾은 데 비해, 자신은 여전히 그렇지 않았다.
보물창고에서도 그냥 적당한 단검 하나를 집어왔을 뿐이다.
물론 실제 검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 셋과는 달리, 현재의 일리아는 인생의 대략적인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루루는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비우라고 조언해 줬지만…….’
마음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한참이나 고민을 이어간 일리아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고, 쿠바르가 말한 신비로운 점술사 스승의 꿈을 꾸었다.
꿈속의 오크는 얼굴의 주름이 깊게 패일 정도로 짙은 웃음과 함께, 자신의 온갖 고민거리들을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일리아는 가슴속의 답답한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 시원한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고,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물론 대부분의 꿈이 다 그렇지만, 그 달콤함이 워낙 인상 깊었기에 아쉬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쿠바르의 스승에 대한 기대감도 새삼 피어났다.
점술을 믿는 쪽은 아니지만, 지금의 일리아는 무엇이든 의지할 구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스승님이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군.”
아침에 일행을 찾아온 쿠바르의 말에, 그녀는 더욱 큰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