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60화 (160/388)

◈ 52. 대족장의 보물 (1)

오크족 최고의 전사, 카라쿰과의 싸움이 끝이 났다.

끝난 것은 비단 그와의 결전뿐만이 아니었다. 상인들을 위협하던 도적 떼 역시 모조리 처리되었다.

갱생의 여지가 없는 녀석들이라 판단한 두르칼리의 전사들은 그들 모두를 남김없이 도륙했고,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태웠다.

살덩이 타는 향과 피비린내가 겹쳐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 풍경을 말없이 지켜봤다.

“…….”

첫 살인.

인간을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오크나 인간이나 지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서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신경 쓸 일이라면,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미리부터 고민해 놓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당한다는 최악의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검술을 갈고닦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그에 필적할 정도로 강한 느낌이었으니까. 위험했지.’

오크 도적 떼의 수장을 떠올린 아이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검은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루루는 진짜 고양이가 맞는 걸까?’

루루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고, 그 과정에서 변신에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변신 후의 모습이 ‘드래곤’과 관련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더 큰 고양잇과의 맹수, 혹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즐겨 읽던 동화나 소설 속의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면 루루의 과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런 생각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루가 옛날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 앙증맞은 요술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드문드문 사라진 부분도 많았고, 생각나는 부분마저도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느낌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듯 고민을 이어 갈 때, 쿨쿨 잠을 자고 있던 루루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른…….”

“응, 루루.”

“나 잘했지? 저번보다 훨씬 잘했지?”

“저번?”

“이그넷, 그 못된 여자랑 만났을 때 말이야.”

“아…….”

이그넷 크레센시아.

결코 좋은 만남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좋은 자극을 줬던 인물.

그렇기에 아이른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허나 무력감만을 느꼈을 루루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내 그때의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그를 보니 마음이 먹먹하면서도 기뻤다.

엷게 웃어 보인 아이른이 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응. 잘했어. 엄청 든든하고, 고마웠어.”

“히히…… 아, 근데 너무 졸리다. 이거 엄청 힘드네, 변신…….”

“괜찮아. 더 자도 돼.”

“또 싸울 일 없겠지? 그럼 나 조금 더 잘게. 어쩌면 며칠 못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푹 쉬어.”

고개를 끄덕인 루루가 아이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그의 배낭 안으로 쏙 들어갔다.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을 느낀 아이른이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브랫 로이드가 다가와 말했다.

“우리도 조금이라도 자자. 카라쿰 쪽 병사가 와서 말해 줬는데, 꽤 일찍 출발할 것 같더라고.”

“음.”

아이른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 어두컴컴했지만, 6월에 가까워진 탓에 아침은 빠르게 찾아올 터였다.

이를 생각하면 빠르게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았다.

그가 물었다.

“상인 분들은 어떻게 됐어?”

“다친 사람은 당연히 없고, 두르칼리의 병력 일부가 붙어서 목적지까지 호위해 준다고 한다.”

“다행이네.”

“그래, 그 쪽은 걱정할 거 없어. 오히려…….”

우리들 걱정을 해야지.

브랫의 뒷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평화롭게 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두르칼리의 최고 전사 카라쿰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수많은 오크들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른 일행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

쿠바르의 호위로 이곳에 발을 들여놨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안요소였다.

‘쿠바르는, 인간 식으로 표현하면 두르칼리의 왕세자 신분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현재 두르칼리는 대전사 카라쿰이 부족장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둘째 아들인 타라칸이 통치 중이었다.

예전에야 쿠바르를 지지하는 측과 타라칸을 지지하는 측이 나뉘어 분란이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쿠바르가 두르칼리를 떠난 게 17년 전이라고 했으니…….’

하지만, 권력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옛 왕세자를 반길 리는 없다.

인간세상의 왕국만 봐도 그렇다.

왕이 바뀔 때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들조차 계승권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조리 죽여 버리는 일이 여전히 많이 벌어졌다.

아마 두르칼리에 당도하면, 지금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오크들의 시선이 느껴질 터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쿠바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고향을 찾은 이유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족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쿠바르를 생각하던 아이른의 머릿속에, 헤일 왕국에 있을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인 키릴과 이제는 세상에 없는 자신의 친모까지.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리던 아이른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고, 몇 시간 후에 눈을 떴다.

이번에도 사내는 꿈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쿠바르의 스승님을 만나면, 이 문제도 해결되겠지.’

부지런히 움직이는 두르칼리 전사들의 한가운데서, 아이른 역시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 * *

며칠 뒤,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무사히 두르칼리 부족의 성채에 도착했다.

말이 부족이지, 인간 세상의 대도시 부럽지 않은 규모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주변 다섯 개의 성 역시 두르칼리의 영역이라 했으니, 사실상 그들은 왕국의 정치에 개입하게 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리아 린제이와 브랫 로이드의 신분이 그들로서도 경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

서부 5왕국의 하나인 아단 왕국, 중부의 강대국인 거베라 왕국의 고위 귀족의 영향력은 헤일 왕국과는 비교가 안 됐다.

평민인 주디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들은 좋겠구만.”

물론, 이렇게 말하는 그녀 역시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기는 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신경이 곤두서 있을 두르칼리의 고위 전사들, 특히 타라칸의 외가 측을 생각하면, 주디스와 아이른의 지위는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타라칸이겠지.’

두르칼리 부족의 장, 타라칸.

30살의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대단한 존재로, 쿠바르의 말에 의하면 정이 많고 순한 성격이라고 했다.

허나 아이른 일행은 믿지 않았다. 브랫이 한 말 때문이었다.

“투박한 오크들 중에서도 가장 거칠기로 소문이 났어.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 할 거야.”

솔직히 쿠바르의 말보다는 브랫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당장 카라쿰만 해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뽐내지 않았던가.

그런 그의 성격과 용력을 쏙 빼닮았다면,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두르칼리에 도착한 당일 늦은 밤, 타라칸의 호출을 받은 4인방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하, 반갑네. 내가 타라칸일세.”

쿠바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엄청난 신장.

허나 인상만은 형을 쏙 빼닮은 듯, 푸근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방의 분위기조차 무겁지 않았다.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을 수많은 부하들을 예상했는데, 알현실에는 오직 타라칸 하나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알현실도 아닌가?’

그렇게 보기에는 공간도 아담했고, 차려진 것도 조촐했다.

적당히 고급스런 테이블 하나와 인원수에 맞춘 술잔, 그리고 독주로 보이는 술병 열댓 개와 안주 몇 개.

‘술병 열댓 개…….’

주디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저렇게 많은 술병을 놔둔 걸까?

설마, 저걸 다 마실 셈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웃는 얼굴의 타라칸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마시기 힘들면 권하지 않을 테니.”

“예? 아? 아…….”

“이거 미안하구만. 괜히 은인들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아서 장소도 일부러 이런 곳으로 골랐는데, 맞지도 않는 술을 강요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다니…….”

아이른 일행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정중한 태도로 자신들을 맞이하는 부족장 타라칸의 태도.

예의가 과한 나머지 ‘저 모습이 가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모두를 둘러본 타라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형님을 모셔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네.”

“…….”

“이는 부족장 타라칸이 아닌 쿠바르 형님의 동생으로서 하는 말이니,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말이지.”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올린 타라칸의 눈에는 약간이지만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는 살짝 감정이 복받친 상태로 아버지와 형님,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타라칸이 태어나기 전, 쿠바르는 이미 왕세자의 자리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둘째 부인의 슬하에서 태어났지만, 정실은 아주 오랫동안 태기가 보이지 않아 아이를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쿠바르가 태어나고 10년 뒤, 덜컥 정실에게서 둘째가 태어났다.

그때부터가 혼란의 시작이었다.

서출이라고는 하나 이미 왕세자로 정해진 쿠바르를 지지하는 쪽과, 정실이자 부족 내에서 권력이 강한 세력을 등에 업은 타라칸 쪽.

갈수록 양쪽의 갈등은 커져만 갔고, 카라쿰조차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애꿎은 시간만 흘러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쿠바르가 부족을 떠나 떠돌이 점술사 생활을 했던 이유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원체 다툼을 싫어하고 욕심이 없던 쿠바르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동생과의 다툼을 유발하는 부족장의 자리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기에, 타라칸이 무에 재능을 보일 때부터 일부러 왕도와 상관없는 점술에 심취하는 등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럼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그의 뜻대로 두르칼리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타라칸 측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고, 쿠바르 측의 몇몇 이들마저도 불필요한 내전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듯 대부분이 만족하는 흐름 속에서,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카라쿰과 타라칸, 그리고 부족을 떠난 쿠바르밖에 없었다.

“그랬던 형님이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더군.”

“…….”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당시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타라칸이 말을 이었다.

“경험이 쌓이고 그리움이 더해진 지금마저 겉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형님은 그렇게 말하셨네. 아버지도, 자신도, 동생인 나도…… 셋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 준다는 걸 알고 있는데, 주변 상황이 조금 힘들다고 해서, 그게 무서워서 도망치기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그렇게 말했지.”

“…….”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전부 자네들 덕이라는 말도 함께였고.”

이 자리에 있진 않지만, 쿠바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크나큰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검술관으로 돌아왔던 브랫 로이드.

비슷한 이유로 괴로워하면서도 매번 다시 일어나서 나아가는 주디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부딪쳐나가는 아이른과, 그런 그의 믿음에 의해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있는 일리아 린제이.

이 이야기를 들은 타라칸에게 있어서, 눈앞의 4인방은 그야말로 은인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뭐…… 예전보다 조금 복잡해지긴 하겠지. 잡소리를 하는 녀석들도 많을 테고. 하지만 괜찮아. 그런 것들이 무섭다고 떨어져 지냈던 세월보다는, 그걸 알면서도 더 나은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지금이 훨씬 즐겁군.”

진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끝낸 뒤, 독주 한 병을 모조리 들이켜는 타라칸.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주디스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은인인 자네들에게 내가 뭔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쫑긋,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어두웠던 주디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녀였지만, 타라칸의 선물이 보통이 아닐 거라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두르칼리 부족은 오크족 중 가장 큰 세력.

그러한 곳의 부족장인 타라칸이 주는 선물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그 생각을 방증하듯, 눈앞의 오크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선은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를 향해 고정된 상태였다.

“마침 자네 둘에게 딱 어울리는 물건이 있네.”

“…….”

“그럼, 가 볼까? 아, 자네들도 기대해도 좋아. 귀한 신분들인 건 알지만, 두르칼리 족장의 보물창고는 나름 대륙에서 알아주는 편이니까 말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타라칸.

열 병 가량의 술을 혼자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참고로 나머지는 전부 브랫이 마셨는데, 그 역시 멀쩡한 상태였다.

물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4인방, 특히 브랫과 주디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오른 와중에.

“나도, 나도 줘…….”

아이른 파레이라의 배낭에서 고개만 쏙 빼낸 루루가 한마디를 보탰다.

껄껄 웃어 보인 타라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자네도 마음껏 골라 보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