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대격돌 (5)
고양이 요술사 루루.
그는 오랜 방황에서 벗어나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인물에게 정착했을 때, 진심으로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른과 웃고 떠들고, 아이른과 밥을 먹고, 아이른과 여행하는 내내 루루는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편안함을 느꼈고, 이러한 시간이 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허나 장인 도시 데린쿠에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만났을 때 깨달았다.
즐거운 시간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소중한 인연을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그넷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샬럿과 빅터를 때려잡고 아이른의 앞을 막아서는 동안, 루루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아이른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바짝 얼어서, 그저 저 자연재해 같은 여자가 얌전히 사라져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분하게도, 그러한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 거란 장담 역시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였다.
요술사 루루는 그저 다가온 행복을 받아들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이그넷 크레센시아만큼이나, 아니 그녀보다도 더욱 강력한 적을 앞둔 상황에서, 그가 몇 달간 행해 왔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아아앗-!
회전하는 루루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카라쿰을 포함한 모두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검은 고양이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짜리몽땅한 팔과 다리는 길쭉하게 뻗어 나왔고, 복슬복슬했던 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털이 아닌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났고, 매끄러운 몸을 감싸는 검은색의 의복이 피어났다. 전투 마법사의 복장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으드드득……
무언가가 자라나는 소리.
그와 함께 돋아난 한 쌍의 뿔과, 한 쌍의 날개.
이를 마지막으로 변신을 끝마친 루루가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왓! 인간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변신을 염두에 두고 수련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루루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요술을 갈고닦아도, 평범한 상황에선 절대로 이그넷과 같은 적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문제없었다.
항상 강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른이 위기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그는 지금의 힘을 다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 말은, 평소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희생’해서 특정 상황에서 더욱 강력한 능력을 끌어내도 상관없다는 뜻과 같았다.
‘아이른이 위험한 상황에서만 발동하는 능력.’
그런 형태에 변신보다 어울리는 것은 없다!
아이젠마르크트에서 읽었던 동화책을 읽으며 루루가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허나 변신 후의 모습이 지금과 같을 거라고는, 그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인간 소녀의 몸으로 변한 것도 놀라운데, 머리에 뿔까지 돋아나 버리다니.
게다가 이 날개는 또 뭔가.
깃털이 풍성하지도 않다. 마치 박쥐의 것을 빼앗아온 것 같은 모습에 루루가 작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난 폭신폭신한 날개가 더 좋은데.”
“…….”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4인방, 그 중에서도 브랫이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드래곤?’
대악마들이 판치던 400년 전보다도 훨씬 더 옛날인,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신비로운 존재.
성처럼 어마어마한 몸뚱이를 자랑하는 그들은 종종 마법을 부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고 하는데, 지금 루루의 모습이 그와 흡사했다.
물론 루루가 드래곤일 리는 없었다. 어쩌면 가끔씩 보던 소설책에 그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놀란 마음을 품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
카라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요상한 고양이라고만 생각했건만, 말 몇마디 하더니 순식간에 강렬한 분위기를 내뿜는 존재로 변해 버렸다.
심지어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예상조차 안 갔다.
그는 뛰어난 전사이자 정령술사였지만, 요술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요술사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요술사들은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 심지어 이 녀석은 더 심해 보인다.’
물론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라쿰은 강했다. 인간 세상의 3대 검사인 이안, 쿤, 율리우스 휼을 제외한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로.
허나 요술사와의 싸움은 그런 직관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골치 아픈 무언가가 항상 존재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얍!”
지금껏 내내 자신의 몸뚱이만 훑어보고 있던 요술사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평소 아이른이 자주 보이는 행동이었는데, 직후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마법 지팡이였다.
아주 커다란 묘안석을 달아 놓은 듯 화려한 자태에 루루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와아, 예쁘다!”
“…….”
긴장감 넘치는 전투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목소리.
그러한 반응에 아이른 일행 전부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잔뜩 투지를 끌어올리던 카라쿰마저 잠시 눈에 힘이 풀렸다.
그 순간이었다.
또다시 ‘얍!’ 하는 기합을 외치며 루루가 마법 지팡이로 카라쿰을 가리켰고, 붉게 물든 묘안석으로부터 커다란 불덩이가 쏘아졌다.
마스터에 오른 검사들의 움직임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허나 카라쿰이 이를 피할 일은 없었다.
“아, 빗나갔다.”
“…….”
한참이나 위를 향해 날아가는 불덩이.
이를 지켜보던 4인방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카라쿰 역시 지금껏 긴장했던 게 억울하다는 듯 맥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불덩이는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슈우우웅-
대전사 카라쿰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어느새 몰려든 두르칼리 부족 오크 병력들의 머리를 지나치고.
그보다도 훨씬 멀리 날아간 불덩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지면에 떨어졌다.
평원에 모인 모든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빛이 그들의 눈과 귀를 엉망진창으로 두드렸다.
화아아아아아악-!
“우왓!”
“으으윽!”
강력한 후폭풍이 뒤를 이었다.
살갗이 익을 정도로 후끈한 열기를 동반한 강풍이 두르칼리의 병사들에게 들이닥쳤다.
몇몇 부상을 입은 오크는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몇 바퀴나 바닥을 굴러야 했다.
물론 폭발의 여파가 카라쿰이 서 있던 곳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허나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 드러난 광경은, 그와는 상관없이 모두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
“…….”
어림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크레이터.
그야말로 지옥의 입구와도 같은 살벌한 광경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이거 너무 어려워.”
여전히 힘 빠지게 만드는 그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지만, 루루는 진심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써 보지 않았던 힘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애초에 자신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기껏 변신으로 능력을 끌어올렸는데, 그 막대한 힘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게다가 과하게 신을 냈는지, 급격하게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시간제한 때문일지도 몰랐다.
루루가 이야기 속에서 접했던 변신은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12시가 땡 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리따운 여성이라든가.
물론 여전히 문제될 건 없었다.
미소를 지은 그가 아이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각성한 이유는, 남을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랬다. 누구를 꺾느냐 마느냐 따위, 루루에게 있어서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아이른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무사할 수만 있다면, 싸움의 승패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런 자신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능력을 잘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금 마법 지팡이를 들어올린 루루가 얍! 하고 기합을 내질렀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상하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는 의지를 담아서.’
우우우우웅-!
생각을 마친 루루의 지팡이에서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전의 작열하는 불덩이에 비하면 훨씬 상쾌한 느낌의 힘.
그것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네 줄기로 갈라졌다.
그리고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아앗-!
“……!”
주디스의 몸에 닿은 빛줄기는 화염처럼 붉은 기운으로 변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으음?”
브랫의 몸을 감싼 것은 푸른 기운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강처럼 끊임없이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도 비슷했다. 은색의 기운에 휩싸인 그녀는 자신의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마치 바람의 가호가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의 대검처럼 온통 황금색 기운으로 둘러싸인 그가, 카라쿰을 바라보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
“…….”
“…….”
나머지 셋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 비할 수 없는 힘을 머금은 채.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의 지원을 가슴에 품은 채 오크족 최강의 전사를 향해 검을 세우는 젊은 천재들.
그런 4인방을 바라보며, 카라쿰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픈 것이, 지금의 상황을 끝내더라도 며칠은 더 이런 상태일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은, 자신의 아들이 데려온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라는 것.
카라쿰이 네 명의 검사들과 하나씩 눈을 맞췄다.
두르칼리 부족의 그 어떤 전사들보다도 뜨겁고,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 검사들을 보며, 그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냈다.
불의 기운이 가득한 카라쿰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주변의 공기가 몹시 뜨거워졌다.
무언가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더라도 싸움이 재개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들을 둘러싼 두르칼리의 병사들마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러한 분위기를 종결시킨 것은, 카라쿰과 4인의 인간 검사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떠돌이 오크 점술사, 쿠바르였다.
저벅 저벅
카라쿰의 앞으로 천천히, 허나 단단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쿠바르.
그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강한 전사의 기세는 단순히 분위기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
전사가 아닌 그에게 있어서 카라쿰의 기세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허나 쿠바르는 이겨냈다.
앓는 소리도 하지 않았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카라쿰의 앞에 선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강하게 머리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두르칼리의 정령사 쿠바르…… 아니, 불초자식이, 17년 만에 아버지를 뵙습니다.”
“…….”
지그시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던 카라쿰이 고개를 들었다.
4인의 검사를 바라보고.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요술사를 바라보고.
자신을 원형으로 둘러싼 두르칼리의 전사들까지 바라본 그가 다시금 쿠바르를 향해 시선을 줬다.
표정은 여전히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스르륵……
하지만, 강렬히 뿜어져 나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조용히 뒤돌아서며, 카라쿰이 말했다.
“……얘기는 성에서 하자.”
“…….”
쿠바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 숙인 상태 그대로, 눈물과 핏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 한참을 흐느끼는 떠돌이 오크 정령사.
그런 그를 지켜보던 루루가 펄쩍 뛰어올라 아이른을 향해 안기듯 날아갔다.
사라락-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고양이 요술사.
그를 품에 안으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생각했다.
‘방금 전에 루루가 보여 줬던 모습은…… 동화책의 영향을 받았을 뿐인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준 그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