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대격돌 (4)
‘기묘한 녀석이다.’
오크 최고의 전사 카라쿰, 그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인상을 썼다.
정말이지 이상한 놈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엄청난 검에, 초입으로 보이긴 하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술 실력.
허나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정신력을 가졌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상대에게 약간의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어떠한가.
직전까지의 창백하고 심약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불에 달군 쇠처럼 사나운 기세를 토해내는 ‘진짜 소드마스터’의 기세가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상대.
적지 않은 흥미가 생긴 카라쿰이 좌측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휘리릭
터업-!
그러자 오크 수장에게 던졌던 해머가 날아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아이른이 깜짝 놀랐다.
예전에 브랫에게 들은 적 있다. 마법사나 요술사가 아닌 전사도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초고난도의 오러 운용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외부로 발현한 오러가 물체를 끌어당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려면, 엄청난 힘의 집중과 기교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러가 아니라 정령술인가?’
워낙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대의 실력이 굉장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현재의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
하지만 당당히 맞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짧게 숨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카라쿰이 왼손에 들고 있던 해머를 강하게 집어던졌다.
쒜에에엑-!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쇳덩이!
그야말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투사체를 보며, 아이른이 낮게 무게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면을 받쳐 무기를 방패로 쓰는 듯한 자세를 갖췄다.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정면에서 받아낼 마음이 가득한 그의 태도를 보며, 카라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만용이다.’
아직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허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막아 내기 힘들 정도로 넉넉하게 힘을 담았으니까.
피하지 않고 맞서온다면 무조건 손해를 입을 터였다.
그는 맥 빠진 결과를 예상하며 발을 굴렀다.
해머를 받아내면 자세가 무너질 인간 검사에게 후속타를 가할 생각이었다.
터어엉!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격돌한 해머가 하늘 높이 날아갔고, 아이른의 신형 역시 한참 뒤로 밀려났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지면에 긴 고랑을 남긴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뿐이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공격을 막아 낸 상대를 보며, 카라쿰이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우리 부족의 기술을?’
정령술과 오러 운용을 융합하여 만든 두르칼리 부족의 절기, 오행신공(五行神功).
인간 검사가 보인 건 그중에서도 금의 기운을 이용한 방어술이었는데, 전신에 단단한 기운을 불어넣어 무쇠와 같은 상태에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인간 쪽에 비슷한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러 운용의 6개념 중 하나인 ‘경화’를 극한으로 발휘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금의 기운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어.’
배워서 한 느낌은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몸과 마음에 품고 있던 기운이 자연스레 드러난 것 같았다. 카라쿰은 그래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한 그가 표정을 굳혔다.
어느새 상대의 코앞까지 다가간 두르칼리의 전대 족장이 기합과 함께 도끼를 내려쳤다.
“타하아압!”
콰아앙!
도적 떼의 수장을 박살 냈던 괴력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쏟아졌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브랫으로부터 배운 방어술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이른은 무너지지 않았다.
악착같이, 더욱 악착같이 버텨 내는 그의 머릿속으로 증명의 땅에서의 결전이 떠올랐다.
‘버텨 내면 기회는 온다.’
비단 일리아 린제이와의 싸움만이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도, 요술결계에서도, 그 후에 벌어진 모든 일에서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소년에서 어른이 된 아이른의 검에는 이전보다 훨씬 끈끈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물론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이뤄낼 수는 없다.
몇몇 요술사들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아이른은 요술사라기보단 검사에 가까웠다.
그는 위기의 순간마다 요행을 바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랬다. 지금의 아이른이 선전하는 이유는, 운이나 요술 따위가 아닌 검사로서 쌓아 올린 실력과 경험의 결정체.
그것이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앙!
콰아앙!
터어엉-!
‘놀랍군!’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나무꾼이 나무를 패듯 집요하게 우측 옆구리를 노렸던 카라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힘겹고 괴로운 와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결국 마지막 공격을 튕겨낸 상대를 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가득 즐거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봤던 것과 같은 특별함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내지르는 검 하나에, 움직이는 발걸음 하나에 담긴 노력과 의지, 마음을 느끼며 카라쿰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른을 압박했다.
마치 부족의 재능 있는 젊은이를 마주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파고든다면 어떨까.
이런 방식으로 공격한다면, 그래도 막아 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라쿰의 도끼날에 담긴 마음이 조금씩 변해 갔다.
기세는 여전히 살벌했지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불쾌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듯 엄하면서도 상냥한 공세에,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싸움의 끝을 더욱 아쉬워하는 건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닌 카라쿰이었다.
자신의 또 다른 아들, 타라칸을 제외한 누군가와 이렇게 즐겁게 싸운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오랜 세월 그는 고독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왔다.
족장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나 그는 여전히 지도자였다.
오크 전체를 대표하는 대전사의 위치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강제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짊어져야만 하는 짐이지.’
자신의 본분을 자각한 카라쿰이 눈을 부릅떴다.
돌변한 그의 분위기에 흠칫 놀란 아이른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나아가는 검술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를 본 카라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한 면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감각이 예리했다.
표정을 굳힌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속에 사정을 두마.’
그러니, 얌전히 물러가라.
생각을 마친 카라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했다.
그리고 산조차 갈라 버릴 기세로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목표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닌, 그가 들고 있는 검.
눈 깜빡할 사이에 치고 들어온 도끼날이 황금빛 검신에 맞닿는 순간이었다.
카아앙-!
“음?”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하늘 높이 날아가는 대검의 모습에 카라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옳은 판단일 수도 있다.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텼다가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팔이 빠져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허나 지금처럼, 검을 손에서 완전히 놓아 버릴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의 기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빈손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잡은 것처럼 자세를 취한다.
심지어 그 상태 그대로 휘둘러온다.
그 황당한 모습을 보고 그가 눈을 가늘게 뜰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던 아이른의 손에, 저 멀리 날아갔던 대검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
싸움이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처음으로 다급해진 카라쿰이 뒤늦게 도끼를 끌어왔다.
평범한 검이라면 모를까, 마스터의 오러 소드를 각반이나 견갑으로 받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콰아아앙!
허나 자세가 크게 무너져 있던 탓에 완벽히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의 신형이 기우뚱하며 우측으로 기울었다.
“크윽!”
보폭을 크게 벌려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한 카라쿰.
허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변에 넓게 퍼진 그의 기감에, 눈앞의 상대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들이 포착되었다.
퍼어엉!
작열하는 불꽃처럼 강렬한 기세로 짓쳐드는 붉은 머리의 검사.
스르르륵-
그녀의 뒤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돌아들어오는, 물처럼 음유한 움직임의 또 다른 검사.
우우우웅……!
마지막으로, 지금껏 상대하던 녀석과 마찬가지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은발의 검사!
도합 네 명의 수준 높은 검사들이 사방에서 카라쿰을 압박했다.
그들을 지그시 노려보던 두르칼리의 명예로운 전사가, 하늘과 땅이 반으로 쪼개질 듯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앙!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세를 회복한 카라쿰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원형의 기파가 퍼져 나갔다.
평탄했던 지면이 과자처럼 갈라지고 솟아올라 크로노의 4인방을 밀쳐냈다.
“크윽!”
“으읏!”
“아니…….”
“……!”
상상을 초월하는 한 수.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을 따온 듯 장엄한 광경에 넷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치이이익……
부글부글부글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날만큼 뜨거운 기운이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연기와 함께 차오른 용암이 갈라진 지면을 타고 강줄기처럼 흘렀다.
스르륵-
터업!
지이이잉……
아이른에 의해 저 멀리 튕겨져 나갔던 해머가 다시 카라쿰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존에 들고 있던 도끼와 하나로 융합하였다.
그리하여 새롭게 거듭난 모습은, 이전보다 예리한 날이 하나 추가된 거대한 양날도끼였다.
마치 카라쿰을 무기로 형상화한 듯 섬뜩하면서도 위압적인 형상에 아이른을 비롯한 네 명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그들을 향해, 위대한 전사이자 정령술사인 카라쿰이 말했다.
“인정하마. 그대들은 내 전력을 끌어내기에 모자라지 않은 훌륭한 전사들이다.”
“…….”
“오크가 아닌 인간이라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꽤나 젊은 것 같군. 쿠바르, 이들의 나이가 몇인지 알고 있느냐.”
“……평균 스물 정도입니다, 아버지.”
“예상보다도 훨씬 젊군. 아니, 어리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어. 후우…….”
카라쿰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 아쉬움, 기쁨, 슬픔, 그 밖의 복잡한 감정들이 불의 숨결과 함께 바깥으로 배출되었다.
그것으로 감정을 털어버린 그가 힘주어 말했다.
“가라.”
“…….”
“더 말하지 않겠다. 쿠바르와 함께 떠나라.”
쿠우웅!
드드드드드드득-!
카라쿰이 다시 한번 발을 구르자, 지면의 균열이 더욱 커졌다.
더욱 넓어진 틈사이로 끓고 있는 용암이 당장이라도 솟아오를 듯 꿈틀거렸다.
브랫 로이드도, 일리아 린제이도.
아이른 파레이라도, 심지어 독기로 가득 차 있던 주디스조차 감히 나설 생각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슈우우웅-
“……?”
심각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비행으로 카라쿰과 4인방의 사이에 다가온 검은 고양이.
요술사 루루가 용암이 흐르지 않는 지면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물론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마음은 전혀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뜬 루루가 앞발을 들어 카라쿰을 가리켰다.
“너.”
“…….”
“혼난다.”
“…….”
카라쿰은 할 말을 잃었다.
고양이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말을 하는 것도 황당한데, 삿대질도 모자라 자신을 혼내기까지 한다.
이상한 점은, 그 모습이 마냥 우스운 것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며 고양이를 바라봤고, 루루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성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검은 고양이가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그 상태로 세 바퀴 부드럽게 회전한 루루의 몸에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