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대격돌 (3)
대륙의 10대 검사란 누구인가?
이 말은 옛부터 ‘대륙의 10대 강자란 누구인가?’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는 한다.
실제로 구별하는 의미가 그다지 없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힘을 측정하기 어려운 요술사나, 능력 사용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는 ‘최강’의 칭호를 얻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두르칼리 부족의 대족장, 오크 카라쿰의 이름이 대륙에 퍼진 이후로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라졌다.
검이 아닌 도끼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놀라운 정령술까지.
그는 전사이고, 정령술사였지만 검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대륙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강자였다.
“…….”
“…….”
그런 엄청난 존재의 출현에, 상인들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동료 둘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잃지 않던 도적 떼조차 겁에 질린 표정으로 카라쿰을 바라봤다.
그때, 저 멀리 날아갔던 도적떼의 수장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워어어어어어억!”
쾅쾅쾅쾅!
피의 주술 덕분에 1.5배 이상 덩치가 커진 그의 발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짓이겨져 대롱거리는 팔뚝을 강제로 뜯어낸 수장이 등에 메인 대검을 집어 들었다.
거대한 몸뚱이에 어울리는 무지막지한 크기였다.
카라쿰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그시 상대를 주시하던 그가 힘차게 도끼를 들어 올렸다.
우우우우우웅-!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오러가 도끼날 전체에 맺혔다.
그 사이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수장이 수평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두꺼운 허릿심에 관성까지 더한 무지막지한 공격!
하지만, 카라쿰에게는 닿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앙!
투석기에 당한 병사의 몰골이 저러할까.
오크 도적 떼의 수장은 그야말로 처참한 꼴이 되어 바닥에 처박혔다.
그와 함께 거대한 크레이터가 평원 한가운데에 만들어졌다.
도끼날이 아닌 몽둥이에 당한 듯, 대검과 함께 박살이 난 몸뚱이.
짓밟힌 벌레 같은 모습이 된 자신들의 수장을 보며, 얼어 있던 오크 도적 떼가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eorhdghkddlek! ehakdci!”
“dmdkdkdkdkdkr!”
쩌억-!
휙, 휘익!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동작으로 도끼를 회수한 카라쿰이 육편을 털어냈다.
동작을 취하는 내내 시선은 도적 떼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오크 점술사, 쿠바르.
17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를 보며, 중년의 나이가 되어 버린 아들이 오크의 언어로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가라.”
카라쿰은 살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들고 있는 도끼처럼 서늘한 시선을 보내며, 그가 한마디를 더했다.
“아비로서 보여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 떠나라. 다시는 이곳에 발을 붙이지 마라.”
카라쿰은 진심이었다.
17년 전 자신의 큰아들이 편지 한 통만 남겨 놓고 부족을 떠난 이후,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원망하기도 했고,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이 더욱 컸다.
허나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쿠바르의 선택 덕분에,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이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것.’
그렇기에.
쿠바르는 돌아오면 안 된다.
여전히 사랑하는,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들이 눈앞에 있지만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더 냉정하게, 더 강하게 대해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몰아내야 한다.
생각을 마친 카라쿰이 더욱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아들에게, 또 한 번 으름장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박자 먼저 입을 여는 쿠바르.
속에 품은 감정이 적지 않은 듯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재차 말을 이어 갔다.
“그때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두르칼리가 무탈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잘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반대의 생각도, 반대의 반대 생각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죠.”
“…….”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제 마음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쿠바…….”
“아버지, 그리고 타라칸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쿠바르가 카라쿰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의 눈에 서린 노기가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 밑에 깔린 감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또다시 숨을 가다듬은 쿠바르가 똑바로 눈을 뜨며 말했다.
“부담스럽다고, 겁이 난다고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늦게나마 욕심을 부려 보겠습니다. 아버지도, 동생도, 저도, 부족도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함께 찾아보죠.”
“…….”
“이게 제가 아버지를 다시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깟 허약한 몸으로 네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겠느냐.”
후우욱-!
카라쿰의 기세가 강해졌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무술에 재능이 없는 큰아들을 압박하기엔 차고 넘쳤다.
예상대로 쿠바르는 견디기 힘든 표정을 지었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버티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입가에 피가 흐르도록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도 카라쿰은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그때, 인간 하나가 쿠바르의 앞을 막았다.
화아악-!
힘을 발휘하여 자신의 기세를 상쇄하는 인간 검사.
도적 떼를 추살하다 왔는지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심적인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허나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카라쿰이 대륙 공용어로 말했다.
“부족의 일이고, 혈육의 일이다. 남이 낄 일이 아니다.”
“스승의 일이고, 친구의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
카라쿰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설명을 바라는 그의 눈빛에, 쿠바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어쩔 수 없습니다.”
“…….”
“겁쟁이가 용기를 내기 위해, 조금 뻔뻔하더라도 친구의 조력을 받기로 했습니다.”
* * *
“후우, 후우, 하아…….”
베고, 베고, 또 벴다.
자신의 손에 여섯의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이윽고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지러운 와중에 브랫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른! 쫓아가자! 다 죽여야 한다!’
‘뭐라고?’
‘마음의 짐을 지지 않기 위해, 나 편하기 위해 손속에 사정을 두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괴로워져!’
‘…….’
‘선량한 약자들을 위해 피를 묻히고, 그로 인한 무게까지 짊어지는 것이 크로노 수련생으로서의 의무다. 고민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맞는 말이었다.
허나 옳은 말이라고 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이른은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한 평원 한가운데서 질끈 눈을 감았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음이 무겁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자신이 베어 넘긴 생명의 무게가 두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악한 존재들이라 하여도 생명은 생명이었으니까.
“후우, 후우.”
아이른이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았다. 대륙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라면 모를까, 한참 전부터 이 순간을 대비해 왔던 그였다.
그렇기에 정신을 수습하는 속도 역시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차분해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아이른이 새롭게 다짐했다.
더 강해지고, 더 단단해지자.
이 무게감을 잊거나 외면하는 대신, 온전히 짊어지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되뇌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비로소 눈을 뜬 그가 앞을 바라봤다.
“wnrjfk!”
“gks shaeh tkffuenwlakfk!”
“Rmdkdkdkdkdkr-!”
언제 왔는지 모를 오크 병사들이 도적 떼의 잔당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카라쿰이 이끄는 부대인 것 같았다.
중간중간 상단의 용병들과 브랫, 주디스, 일리아의 모습도 눈에 보였다. 말할 것도 없는 완승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자신이 낄 틈이 없다는 걸 파악한 아이른은 빠르게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쿠바르와 카라쿰이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냥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스터의 등골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살벌한 기세.
이를 느낀 아이른이 재빨리 쿠바르의 앞을 막은 뒤, 카라쿰의 말에 당당히 대꾸했다.
“스승의 일이고, 친구의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
“겁쟁이가 용기를 내기 위해, 조금 뻔뻔하더라도 친구의 조력을 받기로 했습니다.”
“…….”
“큰 용기를 내어 찾아온 아들입니다. 냉정히 대하지 마시고, 일단 대화를 나눠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간 검사의 말을 듣고.
아들의 말을 듣고.
다시 인간 검사의 말을 들은 카라쿰이, 지그시 상대의 검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놀라웠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굉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이 다섯 정령의 힘을 모두 끌어내어 만든 이 도끼보다도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히 금기(金氣), 화기(火氣)가 강하게 느껴진다.’
무기라는 것이 대부분 불로 빚어낸 금속이기에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저 검은 특히 그랬다.
물론 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검이 대단한데 검사의 실력이 형편없을 수는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검이란 독보다 위험한 것이라, 주인의 목숨을 거두어간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검사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애초에 그냥 느껴지는 기세만 하더라도 훌륭했다.
아마도 마스터일 것이다.
여기까지 파악한 카라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들이 어중이떠중이와 연을 맺은 건 아니군.’
조금이지만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마스터의 경지는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괴물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을 갖춘 절대 강자.
게다가 저 인간 검사는 실력에 비해 경험이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그 증거였다. 살육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화아아악-!
오크 카라쿰의 몸에서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이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만인을 압도하는 지도자의 기세였다.
그러한 기도를 유지하며, 카라쿰이 입을 열었다.
“친구의 짐을 함께 부담할 각오가 되어 있나?”
“…….”
“오크 최강의 전사인 이 몸을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물었다.”
화아아아악-!
드드드드드드……
단순히 오러만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들소가 주변을 뛰어가듯, 카라쿰이 서 있는 지면 일대가 떨렸다.
진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져 나가 아이른이 자리한 곳까지 다가왔다.
카라쿰에 비하면 왜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몸 역시 덜덜덜 떨렸다.
하지만 앞서도 그랬듯이, 아이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
“해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물론 해야죠. 스승이자 친구인 쿠바르를 위해서라면.”
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가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소드마스터, 일리아 린제이를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뜨거운 눈빛으로, 단단한 마음으로 무장한 그를 보며, 카라쿰이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