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대격돌 (2)
‘이건…… 위험하다!’
빠르게 잠에서 깨어나 상황을 주시하던 상단의 최고 책임자가 표정을 굳혔다.
좋지 않았다.
지금껏 수많은 상행을 나갔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도적과 산적들을 만나 왔던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을 둘러싼 채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저들은 평범한 강도들이 아니었다.
강도란 폭행이나 협박 따위로 ‘재물’을 탐하는 존재일진대, 이 오크들은 금은보화보다는 ‘폭력’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모습이었다.
라이트 마법에 반사된 그들이 소름 끼치는 안광을 뿜어냈다.
“다 죽여.”
그러한 상단 책임자의 걱정은, 오크 도적 떼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을 때 극에 달했다.
아무런 협상조차 없이 곧바로 공격 명령이라니!
심지어 일부러 오크의 언어가 아닌 대륙 공용어로 말했다.
의도야 뻔했다. 이쪽이 듣고 공포에 빠지고, 혼란에 빠질 것을 노린 것이다.
물론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재빨리 앞으로 나선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멈춰!”
마른 체구답지 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평원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빙글거리며 다가오던 오크들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수십 년간 대륙 북부를 누비며 연륜을 쌓은 상인의 카리스마에 순간적으로 기세를 빼앗긴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계속해서 멈춰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급한 마음의 상단 책임자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리는 누베스 백작의 가호 아래 있는 마르크 상단이다! 우리 중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상단의 자금과 백작가의 병력을 총동원해 피의 복수를 할 것을 다짐한다!”
사실이었다.
누베스 백작은 호전적이진 않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휘하 상단의 몰살을 모른척할 이가 아니었다.
휘하의 병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상단 책임자는 누베스의 위명이 저들에게 통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진심어린 협박이 저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눈을 부릅떴다.
싸움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아무리 이쪽에 일리아 린제이를 비롯한 깜짝 전력이 있다고 한들, 저렇게 많은 인원과 붙으면 피해가 커지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니 말이다.
“skxorhdwk aksgdl tkfkdgowntpdy.”
잠시 후, 도적 떼 대장의 입에서 오크의 말이 흘러나왔다.
대륙 공용어를 쓰는 상단원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허나 경험 많은 상단 책임자는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새끼 죽여.’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그가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앞 열에 있던 오크들 중 하나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도끼를 날렸다.
쒜에엑,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오는 도끼날을 보며 상단 책임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뒤에 떨어져 있던 용병들 역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순식간에 앞에 나타난 은발의 여성이 검을 꺼내 들었다.
카아앙-!
간결한 동작으로 손도끼를 쳐낸 일리아 린제이.
힘 하나 들이지 않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오크 몇몇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상단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단 책임자가 놀란 와중에도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상단 책임자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틀비틀 호위 병력의 사이로 들어간 그를 용병들이 부축해줬다.
무겁게 내리깔린 고요함.
상단 측, 그리고 도적 떼 쪽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나 살벌한 분위기만은 여전했다. 특히 도적 떼 수장의 표정이 몹시 위험해 보였다.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한 그가 일리아, 아이른, 브랫, 주디스를 한 번씩 쳐다봤다.
강자들을 정확히 판별해 내는 모습에 일리아가 내심 긴장할 때, 오크 수장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라.”
“spdspd.”
손도끼를 날렸던 부하가 오크의 언어로 대답하며 대장의 앞에 섰다.
비릿한 미소를 날리던 때와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손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도적 떼의 수장이 주먹을 내리쳐 터뜨렸다.
퍼어엉!
화염이 터지듯 사방으로 비산하는 육편!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상단의 인물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데, 오크 수장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수하들 역시 우스워 죽겠다는 듯 따라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으하하, 으헤, 으헤헤
히히, 으히히, 흐흐흐히……
평원에 가득 퍼지는 혈향.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 소리와 도적 떼 수장의 번들거리는 눈.
잠시 후, 웃음을 그친 그가 대륙 공용어로 말을 전했다.
“실력이 괜찮군. 기회를 주마.”
“…….”
“일대일 승부다. 내가 내보낸 녀석을 홀로 꺾는다면, 조용히 물러가지.”
딱!
오크 수장은 ‘이기지 못했을 경우’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기는 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크 하나가 말에서 내려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갔다.
전신이 근육 대신 돌덩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
가시가 잔뜩 박힌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였다.
일리아는 직감했다.
‘이 녀석들, 평범한 도적 떼가 아니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녀석은 결코 엑스퍼트의 아래가 아니었다.
오크 전사의 근력이 인간 이상임을 생각하면 증명의 땅의 엘리트 검투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목표를 잃고, 방향을 잃었다 할지라도 자신은 소드마스터.
저깟 조무래기에게 패배할 자신은 죽어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비켜.”
일리아 린제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주디스가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도적 떼의 수장에게 말했다.
“이 병신은 내가 상대한다.”
“…….”
“어때, 괜찮지?”
“크흐, 그러시든가.”
주디스의 도발적인 요청에 오크 수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지켜보던 상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녀 역시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검사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드마스터인 일리아 린제이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으로 나선 오크의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
화아아악-!
심지어 그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인간의 말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정황을 파악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허나 분명한 건, 저 오크의 분노가 저 멀리 상인들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라는 것.
상단 일행은 긴장으로 인해 혀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하면 되나?”
그런 상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디스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담담한, 어찌 보면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눈동자가 오크 수장을 향했다.
눈앞의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
주디스의 태도에 오크 전사가 씩씩 콧김을 내뿜을 때, 수장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wnrdufk.”
직후, 무지막지한 크기의 쇠몽둥이가 주디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부우우우웅!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입을 열 틈이 없었다.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쏘아지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기 때문이다.
칸젤도, 프레드릭도, 경험 많은 베테랑 용병조차도 상반신이 날아가 버린 주디스의 참혹한 시체를 상상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행동을 개시했다.
퍼엉!
서걱-!
도깨비불이 점멸한 것처럼 화려하게, 환상처럼 사라진 주디스의 신형이 오크 전사의 뒤에서 나타났다.
동시에 내질러진 검이 상대의 목을 깔끔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걱
서걱
서걱서걱서걱-!
빠르게, 더 빠르게, 더욱 빠르게 폭발하듯 뿜어지는 주디스의 연격!
그것이 오크 전사의 몸을 계속해서 가르고 지나갔다.
강철 같은 뼈대와 돌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뚱이건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여유롭게 공격을 이어나갔다.
휙!
이윽고 검을 회수한 주디스가 핏물을 털어낸 뒤 도적 떼 쪽을 쳐다봤다.
우수수 무너져 내리는 오크 조각을 뒤로한 채, 그녀가 말했다.
“꺼져.”
“……!”
“……!”
승부를 지켜보던 도적 떼와 상인 일행, 양측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디스의 실력이 생각보다 한참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브랫과의 대련을 봤다고는 하지만, 안목이 부족하다 보니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의 머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건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그와 대등한 모습을 보여 준 아이른 파레이라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디스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니,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기세가 등등해질 수밖에 없었다.
타닥!
퍼어엉!
물론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오크 수장이 또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잃고 쓰러진 말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비릿한 액체가 전신을 뒤덮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의 얼굴에는 아까 죽인 부하의 피가 기묘한 문양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금지된 주술이군. 방심하지 말게.”
이제는 거의 사장됐다고 생각한 피의 주술.
시전자의 육체 능력을 대폭 높여 주는, 후유증이 큰 기술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대가가 있는 주술은 결국 악마와의 계약과 비슷하다.
사특하고 괴이한 대신, 그에 걸맞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쿠바르는 빠르게 이를 설명했고,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른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망설일 생각은 아니겠지.”
브랫의 눈에는 약간의 우려가 담겨 있었다.
누구보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성격을 잘 아는 그였다.
어떤 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를 보여 주지만, 지금처럼 누군가를 ‘살해’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반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는 게 그였다.
“……괜찮아.”
다행히, 대답하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목소리는 그리 떨리지 않았다.
진즉에 소환해 둔 검을 고쳐 잡은 그가 한 인물을 생각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샬럿과 빅터를 단박에 때려죽인, 그녀의 확신에 찬 눈동자.
여전히 자신은 그럴 수 없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방황할 것이다. 아마 이 일이 끝난 후에도 한참 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이 망설일 때는 아니라는 것.’
후우, 아이른 파레이라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드러났다.
이를 지켜보던 쿠바르와 브랫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빠르게 다가간 루루가 아이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우우우우웅-!
그러는 동안 도적 떼 수장의 기세는 더욱 흉포해졌다.
터져 버린 손도끼 오크의 몸에서.
조각난 쇠몽둥이 오크의 육체에서.
마찬가지로 박살이 난 말 몸뚱이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허공에 떠오른 혈액은 이내 수장의 몸으로 날아가 그의 전신에 있는 문신을 더욱 검붉게 만들었다.
“…….”
“…….”
어느새 앞으로 나선 4인방과 쿠바르, 그리고 고양이 요술사 루루.
그들의 표정에 적지 않은 긴장감이 깃들었다.
오러를 사용하는 전사라면 이렇지 않을 것이다.
허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을 사용하고 있기에,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퍼어어억-!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거대한 해머가 도적 떼의 수장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저 멀리 날아간 수장이 지면에 넓고 깊은 흔적을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흙먼지 속에 가렸지만, 오크와 상인 일행 모두 기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크 하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손잡이부터 날까지 모조리 금속으로 만들어진 도끼를 보며 아이른 일행이 그의 정체를 짐작했다.
대륙 10대 강자의 일원.
두르칼리라는 거대한 부족의 전대 족장.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이며, 그 누구보다 훌륭한 정령술사.
마지막으로…….
‘쿠바르의 아버지.’
오크 카라쿰.
휘날리는 백발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위압적인 그의 모습에, 평원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