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대격돌 (1)
“…….”
“…….”
장내에 깔린 침묵.
대련을 구경하던 상인들은 물론이고, 열심히 검을 나누고 있던 용병들마저 하던 일을 멈추고 한 곳을 주시했다.
바로 아이른과 일리아를 향해서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둘이 검을 맞댄 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용병들은 그들이 최소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봤던 엑스퍼트보다 더 강한 거 아니야?’
‘동안인가? 너무 어려! 아니, 아무리 동안이라고 해도 20대 중반을 넘진 않았을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이야?’
경악으로 인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용병들.
그런 그들조차 아이른과 일리아의 ‘진짜 실력’은 파악하지 못했다.
일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던 아이른이 나직이 말했다.
“처음 돌진은 일부러 티 나게 한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두 번째 공격이 진짜였으니까.”
“음…….”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은발 검사의 공격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빨랐다.
헌데 금발의 청년은 이를 ‘티 나는’ 공격이라고 폄하했고, 상대 역시 이에 동의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 흐름이었다.
허나 마스터에 오른 두 검사 사이엔 그들이 알 수 없는 깊은 수 싸움이 있었다.
‘내가 오러를 볼 수 있다는 걸 역이용해서 첫 번째 돌격 때는 오러 운용을 단순하게 하고, 그 뒤에는 일부러 복잡하게 페이크를 걸었어.’
초보 검사들은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없다. 자신의 것을 제대로 해내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허나 실력이 붙고 여유로워질수록,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 대처하고 허를 찌르는 것이 중요해진다.
아이른 또한 존 드류에게 배워 이를 알고 있었고, 상대의 근육과 눈빛, 발의 각도만으로도 다음 동작을 유추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헌데, 일리아는 거기에 더해 ‘오러 운용’조차 심리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너만큼 직관적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도 상대의 오러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
“감각 개화로?”
“아마 그렇겠지. 실제로 수준 높은 소드마스터들은 전부 감각이 예민해서, 이런 식으로도 수 싸움을 즐겨한다고 들었어.”
“앞으로 신경 써야겠네.”
‘뭐라는 거야?’
‘뭔 소리야?’
두 검사의 대화를 들은 용병들이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딱 봐도 자신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검사들이다. 그런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돈 주고도 못 살 만큼 가치가 높았다.
허나 그중 반의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일리아, 아이른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서로를 바라보던 둘이 재차 대련을 이어 갔다.
카앙!
카강-!
“후우.”
아이른은 처음보다 빠르게 쏟아지는 일리아의 공격을 막아 내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상대의 방식을 알아챘기에 더 쉬워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 상대가 오러 운용으로 속임수를 쓰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다.
이런 싸움에 익숙할 만큼 깊은 경험, 혹은 눈보다 빠르게 상대의 오러를 파악할 수 있는 예리한 감각.
둘 다 지금의 아이른에게는 무리였으나,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가 된 후에도 여전히 배울 것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크윽!”
허를 찔린 탓에 조금 손해를 본 아이른 파레이라.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일리아 린제이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하고 많이 다르네.’
검술관 시절의 아이른은 이러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 따위에 굴하지 않고 우직하게 걸어 나가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검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때문에 지금 그의 모습은, 새로운 것을 깨달아 너무나도 즐겁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어떻지?’
증명의 땅에서 패배한 후, 지금까지 수없이 던졌던 질문.
허나 여전히 모르겠다.
예전의 검을 좋아하던 자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자신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번뇌가 또다시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의 공격은 매섭게 쏟아졌지만, 찰나의 빈틈을 놓칠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니었다.
터어엉-!
“읏…….”
일리아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공격한 것은 자신이었고, 타이밍이 어긋난 것도 아니었다. 예상한 타격점에 정확한 각도로 쑤셔 넣었다.
허나 상대의 검과 맞닿은 순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둔중함이 전해졌다.
마치 철제 동상을 내리친 느낌.
손바닥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을 느끼며 일리아가 뒤로 훌쩍 빠졌고, 아이른은 반격에 대비함과 동시에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연격을 쏟아냈다.
카앙!
캉!
카강-!
다행히 아까와 같은 둔중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손이 저렸기 때문에 일리아는 상당히 오랫동안 수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챔피언 결정전 이후의 대련에선 대부분 우위를 점했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상황은 꽤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흐름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손이 회복된 것을 느낀 일리아는 적당한 반격으로 아이른을 밀어낸 뒤, 검을 거두며 말했다.
“여기까지 하자.”
“그럴까?”
“중간에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아, 오러로 몸 전체를 강하게 경화해 봤어.”
“몸 전체를?”
“응. 마치 내가 강철의 거인이 됐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움직이면서 하는 건 아직 무리여서, 검 받아내는 타이밍에 맞춰서 한번 해 봤어.”
정확히는 강철의 거인이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버린 꿈속 사내의 모습을 본떴다.
아이른이 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단단하고, 묵직했던 남자.
불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그의 강철 같던 모습을 배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불로 인해 금기(金氣)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기에 이러한 응용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네. 더 얘기 좀 해 볼까?”
“좋지.”
방금까지 살벌하게 검을 나눴던 게 무색하게, 자리에 앉은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러 운용이 어떻고, 경화가 어떻고, 정령의 기운 활용과 꿈이 어떻고.
용병들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였기에, 눈빛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저런 알아듣지도 못할 내용에 골머리를 썩느니, 그냥 박 터지게 싸우는 거나 더 구경하고 싶다!
비록 그것조차 제대로 알아보진 못하는 수준이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껏 잠자코 아이른과 일리아의 대련을 구경하던 주디스가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브랫, 일어서.”
“나?”
“그래, 너.”
주디스의 지목을 받은 브랫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명의 땅에서 벗어난 이후,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수련하는 데 썼다.
혹은 대련을 하더라도 나머지 둘, 특히 일리아와 겨루는 데 할애했다.
지겹도록 싸웠던 자신과 아이른에 비해 그녀는 검술관 이후 처음 만나는 사이였고, 또 ‘대륙 최고’가 되고 싶다는 주디스의 성격상 마스터에게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브랫 또한 개인적인 성취를 차분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한동안 둘은 검을 나누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눈빛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냥 남는 사람 지목한 느낌이 아닌데.’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분위기.
그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브랫이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오랜만에 한번 붙어볼까.”
그의 말을 들은 상단 일행의 사이에서 오오,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른과 일리아가 싸울 때까지만 해도 ‘도대체 저 사람들이 누구지?’ 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크로노 검술관의 이름 높은 수련생들과 린제이 가의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말이다.
프레드릭이 거봐란 표정으로 열심히 떠들고 다닌 덕분이었다.
‘이번에도 대단하겠지?’
‘둘에 비해서 조금 처진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엑스퍼트일 테니까.’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이라고 하던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둘의 수준은 엑스퍼트의 상위권.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경지였고, 나이를 빼더라도 어디 가서 보기 힘들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다시금 기대감을 충전한 그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둘을 바라봤고, 브랫 역시 배경처럼 둘러서 있는 그들을 한번 훑었다.
허나 주디스는 여전히 브랫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묘한 분위기에 기분이 이상해진 그가 큼큼,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바로 가자.”
“좋아.”
터엉!
짧은 대화가 끝난 직후, 아이른&일리아 때와 비슷하게 주디스의 선공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둘의 격돌을 본 용병들이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지켜봤다.
넋을 빼놓고 본 이전과는 달리, 집중해서 뭐라도 건져가려는 속셈이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싸움이 이어지고 얼마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디스와 브랫의 대련 역시, 앞선 것과 마찬가지로 수준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와…….”
“아아…….”
끊임없이 폭발하는 화염처럼 강렬하면서도 화려한 주디스의 연격과, 이를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걷어내는 브랫의 방어술.
분석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부분 부분을 인지하는 것조차 힘에 벅찼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뿐이었다.
헌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열심히 대련을 이어 가던 중, 주디스가 갑자기 검을 거두었던 것이다.
“뭐야?”
“……됐어.”
처음보다 더욱 묘한 눈빛으로, 왠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한 모습으로 뒤돌아서는 주디스.
그런 그녀를 보며 브랫도, 아이른도, 일리아도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주디스지만, 지금은 도무지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일리아 린제이 님…… 맞으십니까? 아,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이렇게 나서지 않으면 나중에 너무나도 후회할 것 같아서…….”
“아이른 파레이라 님! 혹시…….”
“브랫 로이드 님!”
허나 주디스를 향해 다가갈 기회는 없었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한 용병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걸 본 나머지도 우르르 셋을 향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주디스는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에 부담스러웠지만, 셋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들은 자신들이 귀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람들을 내치는 편도 아니었다. 아이른은 더욱 그랬다.
결국 그들은 증명의 땅에서보다 더한 관심 속에서 용병들의 질문을 받아주었고,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브랫, 일어나.”
그리고 대부분이 잠에든 시각.
지금껏 내내 침묵을 지키던 주디스가 브랫을 따로 불러냈다.
“…….”
브랫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을 보며 불침번을 서던 용병 하나가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허나 브랫은 알고 있었다.
주디스가 자신을 부른 것은 남녀 사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후, 날카롭게 눈을 뜬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왜 실력을 숨겼어?”
“……뭐?”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감추고 있잖아, 진짜 실력.”
“…….”
브랫 로이드는 주디스의 단정 짓는 듯한 발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계속해서 그러고 있진 않았다.
정신을 차린 그가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주디스가 한 박자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아이른이나 일리아는 몰라도, 나는 못 속여. 제일 오랫동안, 제일 가까이서 널 봐온 게 나야. 며칠 전부터…… 아니, 아이젠마르크트에서부터 성취가 있었잖아. 그렇지 않아?”
“…….”
“곰곰이 생각해 봤어. 왜 이 새끼가 실력을 숨기고 있지?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일리아나 아이른이랑 대련할 때 한 방 먹여 주려고? 아니, 그런 게 아니더라고. 내가 너를 아는데, 너는 그럴 성격이 아니야. 그렇게 아닌 것들을 지우면서 조금 더 고민해보니까 알겠더라고. 네가…….”
“주디스…….”
“나를 병신으로 보고 있었다는 거 말이야.”
후우, 말을 마친 주디스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빠르게 숨을 고른 주디스는 브랫이 말할 틈도 없이 자기 생각을 빠르게 쏟아냈다.
“내가 우습냐?”
“…….”
“동정하냐? 어? 네가 사정 봐주지 않으면 저 밑바닥에 주저앉아서, 어? 쫓아올 생각도 못 하고 좌절하고, 그럴 정도로 병신같은 새끼로 보여? 어?”
“그게 아니라…….”
말을 하려던 브랫이 잠시 입을 멈췄다.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다가오는 주디스의 눈빛.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 눈빛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힘들었다.
그렇기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허나 브랫이 변명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수십, 아니 백 마리가 넘어가는 말발굽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말소리.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가 이것저것 섞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 자체가 다른 듯싶었다.
아마도 대륙 공용어가 아닌 오크의 언어인 것 같았다.
“뭐야?”
“기상! 다들 일어나!”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낀 불침번이 사람들을 깨웠다.
여기저기서 눈을 비비고 일어난 용병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장비를 챙겼고, 마법사들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라이트(Light) 마법을 사용했다.
쿠바르 역시 불의 정령을 소환해 주변을 밝혔다.
그러자 드러나는 오크들의 모습.
도적 떼였다.
그것도 대단히 큰 규모의.
“이게 무슨…….”
“…….”
상인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도 수지만, 도적들의 분위기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용병대장과 책임자급 상인들이 급히 회의를 시작했다.
다각 다각
그러는 사이, 완전히 포위망을 구축한 도적들 사이에서 오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두 명은 합쳐 놓은 듯 엄청난 풍채를 자랑하는 그가 낮고, 섬뜩하게 대륙 공용어로 말했다.
“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