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뭐 하는 분들이세요 (2)
“……!”
낯선 천장이다.
눈을 뜬 주디스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머리가 멍한 가운데, 그녀는 왜 자신이 낯선 방의 낯선 침대에 누워,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렇게 넋 나간 표정으로 있기를 1분.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확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 발…….”
어제 일이 기억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부 기억난 것은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 그 얄미운 녀석과 술내기를 하고 첫 잔을 마신 것까지만 머릿속에 온전했고, 그 뒤는 그림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흐릿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욕설을 내뱉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이 내기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기억만 안 나는 걸 수도 있어. 그 자식이 먼저 취한 다음에, 내가 신나서 더 마시다가…… 그러다가 기억을 잃은 걸 수도 있잖아?’
유일한 희망을 떠올린 주디스가 인상을 찌푸린 상태로 어제의 기억을 더듬다가, 여전히 떠오르는 것이 없자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마 별 일 없을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끼이익……
“…….”
“…….”
기름칠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열리는 방문.
그리고 그와 함께 조용히 주디스의 방에 들어오는 검은 고양이.
루루는 물이 담긴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려다, 주디스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한 반응이 주디스의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루루를 주시하던 그녀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루.”
“어? 응?”
“혹시 어제, 나 무슨 일 했는지 알고 있어? 뭐 취해서 이상한 말 했다거나, 그런 거.”
“응? 아니? 잘 모르겠는데. 일리아랑 테이블 따로 잡았었잖아.”
“다른 사람이 나 부축해서 여기까지 데려왔을 거 아니야. 내가 직접 올라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으응, 브랫이 데려다줬어. 취해서 졸려하긴 했는데, 별거 없었어.”
별일 없었다고 말하는 루루.
허나 그는 계속해서 주디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그것이 또 한 번 그녀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디스가 성큼성큼 루루를 향해 다가갔다.
덮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조그마한 고양이가 몸을 떨었다.
허나 요술을 써서 도망가기에는 상대의 눈빛이 너무나도 매서웠다.
“루루.”
“응.”
“바른대로 말해.”
“뭐, 무슨 소리야. 난 사실만을 말했어.”
“아무 해코지도 안 할게.”
“…….”
“진짜야. 진짜 괜찮으니까, 어제 있었던 일. 사실대로 얘기만 해 줘. 혹시 내가 이상한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했으면 누가 들었고, 누가 못 들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마, 브랫하고 아이른, 쿠바르는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대화 나누느라 주디스가 무슨 말 했는지는 못 들었을 거야. 마지막에 일어나서 노래 부르던 것만 빼고. 그건 목소리가 너무 커서 가게 사람들이 다 들었어.”
“……그래?”
“……계속해야 돼?”
“응. 계속해야 돼.”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주디스.
그녀의 무서운 얼굴을 보며, 루루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놔야만 했다.
* * *
“……그러니까, 너도 어제 많이 취해서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이거지?”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럼 내기도 무승부인 거로, 그렇게 알아도 되겠지?”
“……그렇게 해.”
“그래, 알았어.”
사나운 눈빛.
허나 조금은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디스가 일리아의 방을 나섰다.
“진짜 기억 안 나는 거 맞지?”
“…….”
“알았어. 간다, 가.”
달칵
“후우.”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문을 닫고 나가는 주디스를 보며, 일리아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일리아는 어제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주디스보다는 주량이 강한 편인지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조용히 어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뭐?’
‘아니, 그렇잖아. 마차에서도 항상 아이른만 쳐다보고 있고, 노숙할 때도 자연스럽게 아이른 옆에다가 자리 펴고, 요리했을 때도 아이른 먼저 주고.’
‘…….’
‘솔직하게 말해.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닌데.’
‘아니긴 무슨,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
‘그냥 너희들보다 친할 뿐이지, 그런 감정은 아니야.’
‘하! 거짓말도 작작…….’
‘……그런 거로 치면, 너도 똑같잖아.’
‘어?’
‘너도 똑같다고. 브랫 로이드와 가장 많이 대화하고, 자연스럽게 브랫 옆에 자리 펴고, 브랫…….’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었어? 아니면 말…….’
‘아, 꺼져! 술이나 더 마셔!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생각보다 깊게 마음속에 박혔던 주디스의 물음.
그것을 뒤늦게 곱씹던 일리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숙여진 고개 밑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이리저리 변했다.
허나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의 그녀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씻어야지.”
조용히 중얼거리며 세면실로 향하는 일리아 린제이.
살짝 뜨거워진 피부를 찬물로 식히며, 그녀는 항상 그랬듯 검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갔다.
* * *
검투의 도시, 아이젠마르크트를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대륙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일까, 6월에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선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들, 네 젊은 검사들의 땀을 식혀 줄 수는 없었다.
점심, 저녁 식사 후마다 치러지는 실전에 가까운 대련과 논검.
이를 통해 4인방은 아이젠마르크트에 있을 때와 비견될 만큼 많은 것들을 얻어 가고 있었다.
“…….”
허나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다.
크로노 검술관을 떠나고 5년, 아니 6년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뒤만을 쫓아왔던 그녀였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지껄임에 떠밀린 행동이었을지라도, 목표로 했던 것이 없어지자 그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어쩌면 크로노 수련생들의 논검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예전의, 한창 독이 올라 검에만 몰두하던 일리아 린제이는 남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베풀지 않았다.
남과의 교류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예전보다 검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예전처럼 검이 소중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전보다 편하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것을 나눠 준다.
아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매일같이 검을 떠올리고, 검술을 가다듬고는 있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상태일까?’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안해. 하지만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
‘아이른이 부러워. 브랫도, 주디스도 부러워.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부러워.’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이 여행의 끝에서 내가 바라던 걸 찾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검에 절실하지 않은 나는, 뭐지?’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일리아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자신이 어디를 걷는지도 모른 채 북서부의 황무지를 걷고, 또 걸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걸음에도 힘이 없었다.
팟-!
그런 그녀의 앞에 검은색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허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일리아가 뭐라 말을 하려는데, 루루의 입이 먼저 열렸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마.”
“…….”
“어차피 해도, 또 해도 계속 생겨나잖아? 뱀이 꼬리 문 것처럼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해결되는 건 없고. 그럴 바엔 그냥 다 쏟아내고, 비워 버려. 그렇게 하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그때부터 다시 채워 나가면 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신들에게도 몇 번 들었던 조언.
다행인 것은, 눈과 귀를 닫고 살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일리아는 비교적 시야가 맑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루루에게 물었다.
“잘, 해 본 적이 없는데.”
“뭘?”
“머리 비우는 거. 그게 뭐든 간에 항상 고민하고 살았던 거 같아.”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은 고양이가 아니니까.”
“고양이는 머리 비우는 거 잘해?”
“응. 마음먹으면 24시간도 할 수 있어. 나 따라해 볼래?”
슈우웅 날아간 루루가 평평한 바위 위에 착지한 뒤, 추욱 늘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런 근심도, 고민도, 생각도 없는 것 같은 얼굴.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검은 고양이가 말했다.
“일리아도 내 옆에 와서 따라해 봐.”
“…….”
일리아 린제이가 주변을 슥 훑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일행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녀는 루루의 말대로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아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앞을 바라봤다.
“…….”
여전히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허나 아까보다 압박감은 조금 줄어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금 더 있다보면 언젠가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잠자코 둘을 지켜보던 브랫 로이드가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멍한 눈빛으로 똑같이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선을 교환한 쿠바르와 아이른 파레이라, 둘도 셋을 따라 옆에 털썩,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이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주디스가 한마디 했다.
“다들 뭔 짓거리야? 단체로 정신 나갔어?”
“주디스.”
“왜.”
“닥쳐.”
“이 미친 새끼가 오랜만에 또 지랄하네…….”
울컥한 주디스가 브랫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리한 전방.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주는 장엄한 광경이,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마음을 씻어 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결국, 말없이 브랫의 옆자리에 앉은 주디스마저 비슷한 표정이 되어 앞을 바라봤다.
그렇게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지금껏 바쁘게 살아왔던 게 전부 거짓말인 것처럼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평화로운 시간이 깨진 것은 약 두 시간 뒤였다.
다그닥 다그닥
웅성웅성
말과 마차를 이끄는 소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그것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쿠바르가 고개를 돌렸다. 상단이었다.
흠, 하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여전히 멍하니 있는 일행들을 깨웠다.
“휴식은 이쯤하고, 어떤가? 저 상단의 목적지와 방향이 비슷하다면, 저기 묻어가는 건.”
“합류하자고요?”
“그렇지. 마차도 부서진 마당 아닌가.”
쿠바르의 말처럼, 현재 아이른 일행은 마차 없이 도보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차를 몰던 브랫이 딴 생각을 하다가 바위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놀라운 운동신경 덕분에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안타까운 사고긴 했다.
물론 마차를 타든, 걸어가든 꼭 상단과 함께할 이유는 없었지만.
“새로운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껏 안 해 봤던 경험을 자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네.”
“…….”
쿠바르의 말을 들은 일리아 린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는 말이었다.
아이젠마르크트의 저택에 갇혀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나은 것처럼, 새로운 인물들과 부딪히면 또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어떤가.
두 시간의 평화로운 시간 덕분인지, 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좋아, 그러면 가 보도록 할까.”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 오크 점술사가 앞장서서 상단 쪽으로 향했다.
예전과 달리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고 있는 4인방과 루루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쪽은 쿠바르에게 맡기는 게 확실히 나았다.
잠시 후, 당연하다는 듯이 상단의 허락을 따낸 쿠바르가 말했다.
“다행히 방향이 같군. 두르칼리까진 아니어도, 그 근처의 오크 부족으로 향하는 상단이야.”
“우리를 꺼리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죠?”
“오크의 영토에서 오크 점술사가 부탁해 오는데 그걸 내칠 상단은 없지.”
“그것도 그러네요.”
쿠바르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상단 쪽에서 두 명이 다가왔다.
높은 사람은 아니고 잡일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보였는데, 선임인 것 같은 이가 먼저 자신들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상단 직원 켄잘이라 합니다. 이쪽은 프레드릭입니다.”
“안녕하시오. 아까 말했듯 떠돌이 점술사인 쿠바르라고 하오.”
“안녕하세요. 아이른이라고 합니다.”
“브랫입니다.”
“주디스예요.”
“……일리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나는 고양이 요술사인 루루야, 반가워!”
“헉! 그, 그렇군요.”
이런 일이 없지 않았는지 주디스와 브랫은 자연스럽게 반응했고, 일리아는 살짝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합류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들은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처럼 상단의 말미에 붙어 함께 움직였다.
“…….”
그렇게 아이른 일행이 상단에 합류하고 잠시 후.
안면을 텄던 두 직원 중 젊은 쪽, 프레드릭이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일리아, 아이른, 브랫, 주디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 것 같은데…….’